195화
『크워어어어!』
거대 악마가 깍지 낀 주먹으로 정도현이 있는 곳을 내리쳤다.
그것만으로도 땅이 뒤흔들리고 큼직한 구덩이가 생겼다.
타앙-!
정도현이 구덩이 속에서 피어나는 흙먼지를 뚫고 솟구쳤다.
그가 힘껏 내지른 성창이 악마의 살갗을 손쉽게 뚫었다.
『크아악!』
창날이 닿은 피부에서 타는 냄새가 확 풍겼다. 대악마는 괴로운지 짐승처럼 고래고래 소릴 내질렀다.
거대해진 이후로 이성이라곤 전혀 안 느껴졌다.
‘힘이 아무리 세져 봤자 안 맞으면 그만이지.’
정도현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대악마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콰아아앙-!
입에서 얼음 광선을 발사했다.
그가 창날을 뽑아내고 급히 물러섰지만 살짝 늦어서 광선에 닿았다.
“…큭!”
쿠당탕-!
한쪽 다리가 꽁꽁 얼어붙어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땅바닥을 굴렀다.
정도현은 롱기누스의 세 번째 능력, 「저주 파괴」를 사용했다.
이건 일정 시간 동안 그 어떤 저주나 디버프도 깡그리 무시하게 해 주는 버프 스킬이었다.
[빙결의 저주를 해주합니다.]
다리의 감각을 마비시켰던 냉기가 싹 날아갔다. 정도현은 멀쩡해진 다리로 땅바닥을 툭툭 두들기곤 다시 자세를 잡았다.
고갤 들자마자 거대한 얼음 주먹이 다가왔다. 자신을 가로막는 걸 전부 얼리고 깨부술 기세였다.
하지만 정도현은 이제 대악마가 내뿜는 냉기가 무섭지 않았다.
“…후읍!”
숨을 빠르게 들이켰다. 창끝에 맺힌 마력이 더욱 선명해진다.
순백의 갑주도 거기에 발맞춰 밝게 빛났다.
점차 증폭되는 신성력에 대악마가 눈을 찌푸린 순간.
팟-!
정도현이 땅을 박차며 돌진했다. 하얀 섬광이 얼음 주먹을 꿰뚫었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복부까지 관통했다.
『끄어어어……!?』
쿠웅-!
대악마는 휑해진 아랫배를 감싸며 무릎 꿇었다. 정도현은 공중에서 허공답보(虛空踏步)를 펼치며 방향을 전환했다.
마치 거울에 굴절된 빛줄기처럼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대악마의 몸을 마구 찔렀다.
대악마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너무 빨라서 손가락 틈새로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좀 쓰러져라!”
대악마는 상처투성이가 됐으나 정도현도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가 110레벨을 찍고 스킬북으로 익힌 허공답보는 공중전을 가능케 해 줬지만, 빠르게 움직이려면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당장은 속도로 농락했지만, 마력이 실시간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악마의 숨통을 끊기도 전에 마력 고갈로 탈진했다간 그대로 끝이었다.
정도현도 사활을 건 전력투구였다.
“…허억, 허억!”
하늘을 내달리던 정도현이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그때마다 조금씩 느려졌다.
대악마는 피를 토하며 손바닥을 마구 휘저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발생하는 풍압과 서리 안개 때문에 정도현은 시야를 확보하기가 힘들었다.
푸욱!
이번에도 급소를 뚫었다. 하지만 악마족은 인간보다 훨씬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명치를 뚫었는데도 안 죽어?’
머리를 잘게 깨부숴야 죽으려나.
하지만 더 위로 날아오르기엔 체력과 마력이 슬슬 한계였다.
여기서 더 무리하면 심장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회복 포션을 마셔야 하는데…….’
이성이 날아갔어도 대악마는 대악마인지, 본능적으로 싸우는 법을 안다.
포션 마실 틈을 주질 않는다.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피를 저렇게나 흘렸는데 저리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불합리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허억, 헉…….”
정도현이 잠시 착지하곤 숨을 고른 뒤 다시 날아오르려 할 때.
두두두두-!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도현과 대악마는 동시에 눈동자를 굴려 소음의 근원을 쳐다봤다.
‘헬기?’
수십 명을 태우고도 남을 수송용 헬기가 저편에서 똑바로 다가왔다.
대악마는 헬기 소리가 거슬렸는지 입에 냉기를 모았다.
콰아아아-!
얼음 광선이 헬기를 덮쳤다.
『…크워어?』
격추된 줄 알았던 헬기가 멀쩡히 모습을 드러냈다.
헬기 주변에 구체형 보호막이 펼쳐져 있었다.
저걸 어떻게 막았나 했더니 보호막을 구성한 게 신성력이었다.
‘신성력? 설마…….’
교단 놈들이 온 건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일부러 「태양신공」은 안 펼쳤는데.
“메시아님을 지켜라!”
갑옷을 착용한 플레이어들이 그렇게 외치며 우르르 뛰어내렸다. 낙하산도 안 보인다.
그대로 지상으로 낙하한 성기사들이 용감무쌍하게 돌격했다.
당연히 목표는 대악마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정도현을 위해 시간을 끌어 볼 작정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잘됐다.
‘이 틈에 포션을…….’
파아아앗-!
그가 회복 포션을 꺼내려던 찰나.
밤하늘에 오로라처럼 빛의 장막이 일렁였다.
달빛 대신 구원의 빛줄기가 내리쬐자 지친 몸에 점차 활력이 차올랐다.
[「구원의 빛」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체력과 마력이 소모량에 비례해 빠르게 회복됩니다.]
‘능력치 버프랑 체력, 거기다 마력까지 회복된다고?’
누가 썼는진 모르겠으나 어마어마한 스킬이었다.
능력치 버프에 회복 효과까지 곁들이다니.
상위 던전 공략대가 왜 사제를 필수 인원으로 데려가는지 알겠다.
‘스킬을 쓴 사제는 헬기 안에 있는 건가?’
하긴, 귀하디 귀한 몸이시니 안전한 곳에 계셔야지.
그래도 덕분에 숨통이 좀 트였다.
「구원의 빛」 덕에 포션이라도 마신 듯 체력과 마력이 쭉쭉 차올랐다.
타앙-!
그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거닐자 대악마한테 달려들던 성기사들이 경악했다.
“하, 하늘을 날았어!”
“역시 메시아님인 게 틀림없다!”
정도현은 발치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환호하는 성기사들을 무시한 채 전력 질주했다.
서둘러야 한다. 저들이 대악마한테 또 뭔 짓거릴 하기 전에.
‘경험치 분배는 안 돼.’
정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하얀 섬광이 되었다.
촤좌좌좍-!
대악마의 살가죽을 꿰뚫고 찢었다.
그가 속도를 되찾으니 대악마는 맥없이 당하기만 했다.
정도현에게 가세하려던 성기사들은 어느새 걸음을 멈추곤 멍하니 서서 구경했다.
“와…….”
은빛 혜성처럼 날아다니며 대악마를 유린하는 모습이 너무도 신성하고도 아름다웠다.
교단의 성서에 몇 구절 기록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장엄한 전투였다.
성기사 대부분은 어릴 때부터 교단이 거둬들여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하기에 독실한 신자였다.
그들은 감격에 벅차 눈물까지 흘렸다.
“햐아압!”
정도현은 단숨에 높이 날아올라 악마의 미간을 뚫고 두개골까지 깨부쉈다.
대악마의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쿠우웅-!
거인이 뒤로 드러눕자 땅이 흔들리고 주변 일대가 평평해졌다.
정도현은 악마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거대한 시체 위로 착지했다.
[얼음의 대악마를 처치했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70만큼 영구히 상승합니다.]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 이겼어!”
“메시아님께서 악마를 퇴치하셨다!”
“와아아아아!!”
성기사들은 무기와 주먹을 머리 위로 흔들며 뛸 듯이 환호했다.
그들의 열렬한 반응에도 정도현은 냉담했다.
‘어쩌지.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저들의 반응으로 봐선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환대하고 있다.
‘방금 메시아가 어쩌고 했었지.’
저번에 당군평과 함께 처리했던 이단 심문관들도 그런 소릴 했었다.
종교에 너무 심취해서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을 못 하는 건가.
뭐 어찌 됐든 교단이랑 깊이 엮이면 피곤해진다.
‘적당히 정보만 캐고 빠져야겠어.’
정도현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저흰 그리핀 성기사단 소속…….”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이들은 교단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인 성기사단.
“…성녀의 호위로 왔다고?”
“예, 듣기론 북해빙궁주와 만나기로 했다 합니다. 그런데 웬 괴한이 빙궁을 습격해 플레이어들을 몰살시켰다더군요.”
기사단장은 의심 한 점 없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당연했다. 정도현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압도적인 신성력을 내뿜으며 대악마를 무찔렀으니까.
누가 봐도 그는 태양신께서 내려보낸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였다.
“그런데 메시아 님께선 어쩐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난… 얼음의 대악마의 봉인이 무너진 걸 느끼곤 막으러 왔다.”
정도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적당히 어울려줬다. 그러자 성기사들이 알아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저 악마의 봉인이 왜 풀린 겁니까?”
“북해빙궁주의 소행이다.”
“예?”
딱히 거짓말은 안 했다.
정도현이 안 풀어 줬으면 설유천이 풀었을 테니까.
“비, 빙궁주가 왜 악마의 봉인을 푼 겁니까?”
“그 남자는 악마에게 굴복해 영혼을 팔았다. 자신의 힘을 키우고자 가문의 기사들을 죽여 심장을 삼켰고, 시신들은 언데드 몬스터로 만들었지.”
“맙소사…….”
정도현은 설유천의 악행을 축약해서 설명했다.
“난 그가 마지막 선을 넘기 전에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내 경고를 듣지 않았지.”
“그, 그럼…….”
“북해빙궁의 무인들을 죽인 게 메시아님이셨습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설유천의 수족이었으니까. 목숨을 걸고 내게 덤벼들더군.”
하긴, 가문의 일원은 가주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으니까.
설유천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으니 아랫것들도 메시아를 죽이려 들었겠지.
정도현이 적당히 날조한 얘길 진상으로 철석같이 믿은 성기사들.
그들은 숙연한 얼굴로 정도현을 바라보았다. 분명 원치 않은 살생을 벌여서 기분이 착잡하겠지.
물론 정도현은 그딴 거 전혀 없지만.
두두두두-!
멀찍이 떨어져 싸움을 구경했던 수송 헬기가 근처에 착륙했다.
‘저기에 민하은이 있단 거지?’
언니를 죽이고 그 시체 거죽을 뒤집어쓴 채 성녀 행세를 하는 사이코패스.
정도현은 그녀와 마주친 게 영 껄끄러웠다. 헬기 문이 열리며 민하은이 천천히 내렸다.
“…….”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긴장과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그래, 저 성기사들처럼 머릿속이 꽃밭일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부족하나마 성녀의 직책을 수행 중인 민하랑이라고 합니다.”
민하은은 자연스럽게 언니의 이름을 댔다.
거짓말하는 사람 특유의 미세한 눈동자 떨림이 전혀 없었다.
보아하니 본인의 오랜 거짓말에 완전히 심취한 모양. 민하은은 스스로 민하랑이라 굳게 믿고 있다.
‘신호영, 너 진짜 무서운 여자한테 찍혔구나.’
그는 신호영한테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실례지만 정체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성녀님, 이분은 메시아…….”
“기사단장, 당신한테 물어본 게 아닙니다.”
민하은이 쌀쌀맞게 말하자 기사단장은 뻘쭘해서 고갤 살짝 숙였다.
민하은은 정도현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
“분명 거대한 신성력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당신 본연의 힘은 아니죠.”
성녀는 롱기누스의 성창과 방어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선보인 어마어마한 신성력은 전부 거기에 깃들어 있고, 정도현은 평범한 플레이어라고.
그녀의 설명에 성기사들도 그제야 진실을 깨닫곤 흠칫했다.
“즉, 이론상 그 아이템들만 있으면 누구든 메시아 행세가 가능하죠.”
“내가 사기꾼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도 있단 거랍니다.”
민하은이 얄밉게 말했다. 그녀의 의문 제기에 성기사들도 조금씩 술렁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여 주세요.”
민하은이 그렇게 말하자 정도현은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하기엔 상대가 거물이었다.
‘내 힘을 똑똑히 봤으면서도 저리 건방지게 나온다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곁에 대동한 성기사들이 그를 막지 못할 건 자명한 사실.
약삭빠른 그녀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성녀는 교황과 맞먹는 교단의 핵심 인물. 그러니 암살 같은 불상사에도 대비해 뒀겠지.
‘죽이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놔두자.’
그럼 어떻게 해야 민하은의 기세를 한풀 꺾을 수 있을까.
정도현은 잠시 고민하다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녀, 난 네 비밀을 알고 있다.”
“네?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에 민하은은 고갤 갸웃했다. 그러다 얼굴이 조금 굳었다.
설마 싶은 눈동자였다.
정도현은 그녀의 의혹에 쐐기를 쑤셔 박았다.
“「동경의 거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