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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1원 상점-194화 (194/240)

194화

정도현이 전리품으로 챙겼던 혹한의 마검, 겔리온이 무한비도처럼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칼자루를 움켜쥔 얼음의 대악마는 수백 년 만에 느껴진 생생한 감촉을 실컷 만끽했다.

그녀는 본인 몸보다 길쭉한 대검을 가볍게 돌려 대며 자세를 취했다.

“내 사도가 되겠다고 말하면 살려 줄게.”

“거절한다.”

설유천 같은 괴물이 될 바엔 차라리 죽겠다.

정도현이 단칼에 거절하자, 얼음의 대악마는 어린애가 부리는 재롱이라도 본 듯 입꼬릴 올렸다.

“인간은 대부분 그러더라. 자기가 죽을 상황인지도 모르고 까불대.”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후회하거나 현실을 부정한다.

정도현도 그런 인간들과 다를 바 없겠지.

얼음의 대악마가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압(劍壓)으로 생긴 바람에 서리 조각이 뒤섞여 불어닥쳤다.

정도현은 불꽃의 검강으로 얼음 파편들을 쳐 내며 거릴 좁혀 갔다.

“근접전? 좋지!”

얼음의 대악마는 오랜만에 칼싸움을 치를 생각에 희희낙락했다.

채재재쟁-!

정도현과 악마 사이에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악마는 다소 여유가 있었지만, 정도현은 필사적이었다.

그녀가 정신없이 검을 휘갈기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아쉽네, 내가 예전 수준만큼 힘을 회복했으면 더 즐겼을 텐데.”

쩌저적!

그녀가 발을 가볍게 굴리자 땅바닥에서 얼음 기둥이 솟아나 정도현이 움직일 경로를 틀어막았다.

그런 뒤 단숨에 대검을 찔러 급소를 노렸다.

앞뒤로 막힌 정도현은 어쩔 수 없이 태양 기사단의 세트 아이템 스킬을 발동했다.

“「폭렬용쇄참」.”

쿠오오오오-!

용이 칼날에 직접 새겨 준 룬 문자가 빛나며 괴수와도 같은 울음소릴 토해 냈다.

불꽃의 검강이 용의 머리처럼 변하더니 아가릴 쩍 벌렸다.

얼음의 대악마는 급히 땅바닥에 대검을 박아 넣고 돌진을 멈췄다.

그런 다음 칼날을 비스듬히 세워 벽처럼 활용했다.

콰앙-!

혹한의 대검과 화염룡이 부딪히자 시원한 폭발음과 함께 충격파가 퍼졌다.

빙마굴이 크게 뒤흔들리며 동굴 천장에서 사람 크기만 한 고드름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후……. 위험해라.”

폭발에 떠밀려 멀리 날아간 악마가 벌떡 일어섰다.

몸 곳곳이 검게 그을렸지만 큰 데미지는 없는지 실실 웃고 있었다.

반면에 정도현은 오른팔이 반절 이상 얼어붙어 있었다.

팔 상태를 확인해 본 그가 표정을 찌푸렸다.

체내에 냉기가 침투해서 마력의 흐름이 원활하지가 않았다.

‘비장의 스킬도 막아 버리네.’

괜히 대악마라 불린 게 아니군. 지금껏 상대한 가주들보다 훨씬 강했다.

게다가 그녀는 봉인에서 막 풀려나 전성기 시절보다 약해진 상태인데도 말이다.

인정했다. 이 상태론 더 싸워 봤자 못 이긴다.

“슬슬 깨달았지? 너한테 더는 승산이 없단 거.”

얼음의 대악마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곤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그러더니 맨발을 쑥 내밀며 말했다.

“아직 안 늦었어.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여기에 입맞춤해 봐. 그럼 살려는 줄게.”

그녀는 정도현이 마음에 들었다.

좀 건방지지만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애당초 이 정도로 강한 인간은 극히 드물다. 흑마법을 통한 편법이나 설유천처럼 고위 악마랑 손이라도 잡지 않는 한.

하지만 정도현은 그런 짓을 저지를 이가 아니었다.

‘폭군처럼 잔혹하면서도 자신이 정해 둔 선은 넘지 않는다니.’

그런 인간을 타락시킨다면 그녀는 전성기 시절,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으리라.

그녀가 희망 회로를 돌릴 때. 정도현이 무기를 슬쩍 내리며 말했다.

“아까 네 입으로 말했지. 인간은 본인 묫자리도 못 알아보고 나대는 멍청이라고.”

“…응? 그게 뭐?”

“널 보면 악마도 다를 거 없는 것 같아서.”

정도현은 그렇게 말하곤 다른 장비템들로 싹 갈아입었다.

그러자 대악마의 표정이 굳었다.

악마족인 그녀는 온몸으로 느꼈다. 그가 교체한 장비들이 품고 있는 신성한 기운을.

“서, 성유물?”

게다가 성유물에도 저마다 급이 있다.

단언컨대 저것들은 최상위 수준.

그러니 아이템 등급은 더 볼 것도 없이 레전드리일 터.

레전드리 등급 성유물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다섯 개나 있다니.

저것들 하나하나가 교단에서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어야 할 보물들이건만. 개인이 함부로 지닐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꺼내 쓴다는 건…….

“너… 혹시 교황이나, 뭐 팔라딘이라도 돼?”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신성력이 없는 인간이 교단에서 중책을 맡을 리 없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멍청하게 질문했다.

교황이나 성녀 혹은 성기사들의 정점인 팔라딘 같은 거물급 인사가 아니고선 성유물을 저렇게 들고 다닐 리 없으니까.

“그럼 그 귀한 성유물들이 다 어디서 난 건데!”

“돈 주고 샀어.”

“뭐, 뭐라고?”

아무리 수백 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그렇지.

성유물을 사고파는 세상이 도래했다니, 실로 가관이었다.

‘교단 놈들도 완전 갈 데까지 갔네.’

그렇게 불평하던 얼음의 대악마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정도현이 롱기누스의 성창을 곧추세우고 마력을 모았다. 그러자 순백의 검강이 치솟았다.

“…윽!”

악마인 그녀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갑갑해지는 힘, 신성력이었다.

정도현은 성창을 빙글빙글 돌려보며 몸을 풀었다.

창을 잡는 자세와 다루는 동작만 봐도 느낌이 왔다.

그는 검만 잘 다루는 게 아니라 창술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 같았다.

그녀는 그 영웅한테 잘못 걸려서 퇴치당하는 괴물 역할이고.

“저, 혹시 대화로 풀 생각은 없을까?”

“있겠냐? 「멸마의 빛」.”

파아앗-!

창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와 동굴을 가득 채웠다.

「멸마의 빛」.

일정 범위 내에 있는 저급한 악마나 마족은 소멸.

그리고 소멸당하지 않은 고위 악마나 마족에겐 강력한 디버프를 걸어 버린다.

아무리 고대에 악명을 떨쳤던 대악마라 할지라도 최상위 성유물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꺄아악!”

그녀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아리따운 여성으로 의태했던 그녀가 서서히 본모습을 되찾았다.

『크윽, 제길…….』

머리 위의 뿔은 몇 배로 길어지고, 흰자위가 먹물에 물든 듯 시커멓게 변했다.

동공도 염소처럼 가로로 길쭉해졌다.

아름다운 면모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지만, 인간과는 영 거리가 먼 괴물이었다.

『아직, 아직 안 끝났어…….』

얼음의 대악마는 정도현의 오른팔을 쳐다봤다.

아까 냉기의 마력에 당해서 피부 세포가 시퍼렇게 얼어붙어 죽어 버렸다.

놈이 강해 봤자 어차피 인간.

인간은 악마나 마족보다 재생력이 뒤처지고 육신과 체력도 나약한 종족이다.

저 정도 부상이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터.

다친 팔로는 창을 자유롭게 다루기 힘들 테니 그 사각지대를 노리자.

그렇게 판단했을 때.

“「완전 치유」.”

정도현이 비웃듯 롱기누스의 성창의 두 번째 능력, 「완전 치유」를 발동했다.

스킬 이름 그대로 강대한 신성력을 일으켜 소유자의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

외상은 기본이고 포션으론 치유할 수 없는 내상마저도.

엘릭서가 따로 필요 없었다. 물론 스킬 쿨타임이 보름에 한 번으로 꽤 길었지만.

스스스-!

동상으로 망가진 팔뚝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말끔히 나았다.

성창의 기적에 대악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도현은 몸에 찬란한 휘광을 두른 채 위풍당당하게 다가왔다.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살아남는 건 포기했다.

대신 죽더라도 정도현은 끌고 가기로 했다.

우득, 콰드득-!

그녀의 육체가 또다시 변했다.

인간의 거죽이 찢어지고 그 속에 잠재되어 있던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덩치가 어찌나 거대한지 머리가 동굴 천장을 완전히 뚫고 나갔다.

『쿠어어어!』

잠시 뒤, 수십 미터가 넘는 대악마의 포효와 함께 빙마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대악마의 눈빛에서 이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폭주한 건가?”

아직도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니.

정도현은 혀를 내두르며 전투태세를 잡았다.

* * *

“…방금 뭐라 했죠?”

“북해빙궁 일대에서 「태양신공」의 마력을 포착했습니다.”

B구역 교단의 총본산 대성당.

성녀, 민하은은 헐레벌떡 뛰쳐 들어온 수하로부터 믿기 힘든 소식을 접했다.

북해빙궁의 직할령 안에서 「태양신공」의 마력이 감지됐다고.

그 말은 즉 북해빙궁에 신호영이 있다는 뜻이다.

‘설마 북해빙궁주가 붙잡아 온 건가?’

민하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갤 저었다.

그랬으면 「태양신공」을 북해빙궁의 영지 안에서 펼쳤을 리 없다.

‘그렇다면…….’

신호영이 그림자의 능력을 통해 제 발로 북해빙궁의 영지에 갔단 거다.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가 북해에 있는 건 확실해진 상황.

“추적대는요?”

“몇 분 전에 출발했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예?”

더는 놓쳤다는 보고를 듣기 싫었다.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녀가 직접 나선단 말에 수하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얼마 전에 친위대로 부렸던 이단 심문관들이 싹 당했지 않은가.

“위, 위험합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성기사단을 대동할 테니까.”

C구역에 있는 신호영을 찾아내라는 등 사적인 목적으로 성기사단을 움직이는 건 아무리 그녀라도 여러모로 무리였지만, 북해빙궁주를 만나겠단 명목으로 호위를 청하면 아무도 반대 못 하리라.

몇몇은 왜 북해빙궁주를 새벽에 만나러 가는지 궁금해하겠지만, 그깟 이유는 대충 지어내면 그만이다.

“대외적으론 북해빙궁주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 성기사단도 따라오겠죠.”

그러다 신호영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성기사들을 통해 붙잡으면 되는 거고.

“알겠습니다. 그럼 대기조 부대를 소집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성기사들을 호위로 대동한단 말에 수하도 겨우 안심이 됐는지 불평 없이 물러났다.

민하은은 가슴이 설렜다.

이십여 년 넘게 그의 얼굴도 못 봤으니까. 나이를 먹고 훨씬 멋있어졌겠지.

‘그 사람만 손에 넣으면…….’

완벽하게 언니가 될 수 있다. 이제 딱 한 걸음 남았다.

민하은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 * *

민하은은 기사들과 함께 수송 헬기를 타고 북해빙궁의 영지로 날아갔다.

그들이 거의 도착해갈 때쯤.

민하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먼저 출발했던 이단 심문관들이었다.

지금쯤이면 그들도 북해빙궁 성 앞에 도착했으리라.

[서, 성녀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이죠?”

[북해빙궁이… 습격당했습니다!]

“……!”

뜻밖의 소식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습격이라니?

[북해빙궁의 기사단과 장로들까지 전멸했습니다.]

“뭐, 뭐라고요?”

생존자라곤 한쪽 팔을 잃고 지하 창고에 대피했던 설유천의 둘째 아들과 플레이어조차 아닌 식솔뿐.

“…그들 외에는 다 죽었다고요?”

[그렇습니다.]

5대 가문 하나가 소리 소문도 없이 쓸려 나갔다니. 소름이 쫙 끼쳤다.

범인이 누군지는 예상이 간다.

십수 분 전에 「태양신공」을 펼쳤던 신호영이겠지.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지?’

“그럼 북해빙궁주는요? 그는 무사합니까?”

[북해빙궁을 싹 뒤졌지만, 그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밖으로 빠져나간 듯합니다.]

설유천마저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단 건가?

남궁제보단 한 수 아래라 평가받긴 해도 B구역에선 손에 꼽히는 강자인데.

‘이건 위험해.’

성기사들을 데려오긴 했지만, 고작 열다섯 명.

신호영이 설유천을 꺾었다면 이 정도 병력으로는 대처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버프를 걸어 줘도 역으로 당하겠지.

일단은 후퇴해야 한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

헬기 안에 앉아 있던 성기사들과 민하은이 동시에 흠칫했다.

너무나도 거대한, 지금껏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미증유의 신성력이 저 멀리서 느껴졌다.

“이, 이건…….”

“교황님의 신성력을 넘어섰어?”

교황마저도 저 신성력 앞에선 어린애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대단한 존재가 있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술렁대며 신성력의 정체를 추측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메시아 아닐까?”

그 말에 성기사들이 극도로 흥분했다.

교단의 성서에 나오는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그가 현세에 강림한 것이라면?

“성녀님, 당장 가 봐야 합니다.”

작전상 후퇴하려고 했던 민하은은 성기사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주춤했다.

차마 그냥 돌아가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도 고갤 끄덕였다.

이 거대한 신성력의 출처가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게 헬기는 북해 대호수를 지나 협곡 위를 날아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저, 저건 또 뭐야?”

수십 미터나 되는 대형 악마. 그리고 그런 악마와 단신으로 맞서 싸우는 순백의 창기사를.

거대한 신성력의 원천은 순백의 기사였다. 성기사단 전원이 황홀경에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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