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뭐, 뭐야!”
이곳은 마녀의 지하 연구실.
외부인은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각종 함정과 주문을 설치해 뒀다.
그런데 공간을 뛰어넘어서 침입할 줄이야. 혹시 몰라 공간 왜곡진도 깔아 뒀는데 어떻게 뚫은 거지?
“도현 님! 믿고 있었어요!”
정도현의 등장에 유가인은 마치 평소에 덕질하던 남자 연예인을 만난 양 열광했다.
거꾸로 매달려서 그러고 있는 꼴이 영 볼썽사나웠다.
“잠깐만. 저, 정도현?”
마녀는 그가 누군지 뒤늦게 알아봤다.
밤의 마녀가 위험하다고 경고했던 요주의 플레이어잖아.
최근에는 각 구역의 지배자들을 죽였다던데.
“그럼 방금 전화했던 남자가…….”
“그래, 나다.”
마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정도현의 레벨은 107. 악명과 달리 그리 높진 않았지만, 밤의 마녀가 누누이 강조했었다.
저 남자는 레벨만으로 판단해선 안 될 괴물이라고.
더군다나 암흑가의 지배자들이 괜히 당했겠는가?
“다, 당신이 여길 왜 온 거야?”
“저 녀석한테 용건이 있어서.”
정도현이 턱짓으로 유가인을 가리키자, 마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질문했다.
“…부패의 마녀랑 같은 편이었어?”
“따지자면 그런 셈이지.”
“나, 난 정말 몰랐어!”
정도현과 밤의 마녀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즉, 여명의 빛은 정도현과 연관된 사람들을, 정도현 세력은 마녀들을 건드려선 안 된다.
그 사실을 떠올린 마녀는 겨우 안도했다.
유가인한테 아직 아무 짓 안 했으니 좋게좋게 넘길 수 있을 터.
그러나 그건 마녀만의 생각이었다.
“누가 싸울래?”
“제가 할게요.”
서아린이 단검을 꺼내 들며 나서자 마녀는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자신을 공격하면 정도현은 피의 맹약을 어긴 대가를 치르게 될 텐데.
“잠깐만. 네가 날 공격하면 정도현이 죽잖아!”
마녀가 그리 외쳤지만 서아린은 문답무용으로 달려들며 단검을 휘둘렀다.
마녀는 황급히 방어 주문을 펼쳤다.
카앙, 카가강-!
반투명한 마력 장벽은 칠흑의 검기 앞에 오래 못 버티고 쩍쩍 갈라지며 부서졌다.
“무슨……!?”
그녀보다 레벨이 한참 낮은데 마력의 순도는 오히려 서아린이 한 수 위였다.
방어 주문이 깨지자 마녀는 어쩔 수 없이 공격 주문을 준비했다.
원래는 피의 맹약 때문에 서아린을 공격하면 안 되지만, 당장 목구멍에 칼이 꽂힐 판국이지 않은가.
그런 거 따질 겨를이 없었다.
“「윈드 크로스」!”
육안으론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이 십자가 형태로 날아갔다.
마녀의 지척까지 파고들었던 서아린은 바람에 떠밀려 뒤로 쭉 날아갔다.
하지만 큰 피해를 입진 않았는지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착지했다. 그런 다음 보법을 펼쳤다.
스스슥-!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그녀가 쭉 미끄러지며 빠르게 움직였다.
본 적 없는 기술에 마녀가 눈을 부릅떴다.
‘저게 뭐야?’
마녀는 마법 지팡이를 겨눴지만 서아린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팔이 방황했다. 도저히 제대로 맞출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산탄총처럼 바람의 탄환을 마구잡이로 퍼트렸다.
콰과과광!
압축된 공기가 지하실의 벽면을 후려치며 당구공처럼 어지럽게 튕겼다.
지하실은 특수 재질로 만들었기에 이 정도 충격으론 무너지지 않는다.
샥-!
뿌옇게 일어난 먼지구름 사이로 시커먼 섬광이 날아들었다. 서아린의 단검이었다.
“윽!”
푹-!
단검이 마녀의 어깨에 박혔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피가 줄줄 쏟아진다.
마녀가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칠 때. 서아린이 그녀의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덥석, 쾅-!
서아린은 마녀의 안면을 한 손으로 붙잡고선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꺼헉……!”
마녀가 피거품을 물고 부들댔다.
속이 메스껍고 시야가 빙빙 돈다. 가벼운 뇌진탕이었다.
서아린은 마녀의 어깨에 꽂힌 단검을 뽑아 목에 갖다 댔다. 순식간에 제압됐다.
“어, 어째서…….”
마녀는 반쯤 풀린 눈으로 정도현을 쳐다봤다. 서아린이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데도 정도현은 멀쩡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정도현 일행을 마구잡이로 공격했는데 살아 있다.
즉, 피의 맹약이 아예 발동하지 않았다.
설마 밤의 마녀가 자신을 속인 걸까?
“피의 맹약은 내가 없앴어.”
“…뭐?”
정도현이 다가오며 그렇게 말하자 마녀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피의 맹약을 없앴다니. 그건 밤의 마녀와 정도현이 합의하고 깨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밤의 마녀가 죽고 싶어 미치지 않고서야 피의 맹약을 깼을 리 없을 터.
“도현 씨, 바로 죽일까요?”
“자, 잠깐만! 제발 살려 줘!”
서아린이 단검으로 마녀의 목을 꾹 누르자 핏방울이 이슬처럼 맺혔다.
사신의 낫이 목에 드리우자 마녀는 덜덜 떨며 애원했다.
하는 짓이 아까 붙잡혀 있던 누구와 똑같았다.
“빨리 죽여 버려요!”
박성원이 쇠사슬을 끊어 준 덕에 풀려난 유가인. 그녀가 도끼눈을 뜨며 치와와처럼 으르렁댔다.
그러나 정도현이 고갤 저었다.
“바로 죽이진 마. 다른 마녀들을 불러낼 미끼로 써야지.”
“…이 여잘 인질로 쓴다 쳐도 마녀들이 구하러 올까요?”
마녀들은 그렇게 의리 있는 자들이 아니지 않냐.
서아린의 주장에 정도현도 뭐라 반박하진 못했다.
정도현은 박성원 품에 공주님처럼 안긴 유가인을 보며 질문했다.
“야, 뭐 좋은 방법 없어?”
“그, 글쎄요.”
유가인은 눈을 감고 골똘히 고민했다.
정도현이 노린다는 걸 알면 다들 꼬릴 말고 꽁꽁 숨어 버릴 텐데.
고민하던 그녀가 눈을 떴다. 순간 번뜩인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아! 마녀들은 아직 도현 님이 피의 맹약을 푼 걸 모르고 있잖아요?”
“그치?”
“그럼 그냥 자연스레 불러내면 되지 않을까요? 맹약이 있으니까 본인들은 안전하다고 착각할 테니…….”
“오, 듣고 보니 그렇네.”
문제를 너무 어렵게 받아들여서 더 헤맨 느낌이다, 사실 정답은 아주 간단했는데.
마녀들은 피의 맹약이 아직 유효하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불러내도 의심 없이 나올 거다.
‘물론 그냥 불러내면 귀찮다고 무시하겠지.’
마녀들이 혹할 만한 걸 미끼로 내세워야 한다.
뭐가 좋을지 묻자 유가인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씩 웃었다.
“역시 돈이 최고죠. 아니면 실험 재료에 쓸 마정석이라든가.”
“마정석이라…….”
정도현은 1원 상점에서 상급 마정석을 싹 구매했다.
둘 다 C구역에선 구경조차 힘든 아이템.
그가 상급 마정석을 꺼내니 유가인은 물론이고 제압당해 쓰러진 마녀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정도현은 생포한 마녀에게 다가가 은근한 말투로 얘기했다.
“너, 살고 싶지?”
“…예? 아, 네!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할게요!”
“그럼 연기 좀 해 줘야겠어.”
“여, 연기요?”
* * *
밤의 마녀는 여느 때처럼 마법 실험을 끝낸 뒤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반짝-!
그런데 통신용 수정구가 밝게 빛났다.
바람의 마녀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톡톡.
밤의 마녀는 수정구를 손가락으로 두들겨 통화를 받았다.
그러자 수정구 위로 홀로그램 영상처럼 반투명한 바람의 마녀가 나타났다.
“바람의 마녀. 무슨 일인가요?”
[밤의 마녀! 이것 좀 봐 봐. 대박이지?]
“…그건?”
그녀가 보여 준 건 마정석이었다. 그것도 성인 남성 주먹 크기의.
마정석의 등급은 크기와 비례한다. 저 정도면 최소 상급이었다.
마법 연구와 실험을 밥 먹듯이 해 대는 마녀들에게 상급 마정석은 억만금보다도 탐나는 마법 재료였다.
“그 귀한 걸 어디서….”
[정도현한테 선물받았어!]
움찔.
정도현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밤의 마녀는 흠칫했다. 북부 설산 지대에 온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
그 경험치 귀신이 바람의 마녀한테 살갑게 선물을 건넸다니. 믿기지 않았다.
[응, 그러면서 밤의 마녀한테 다른 마녀들을 좀 모아 달라고 했어. 우리한테 뭔가 부탁할 게 있는 눈치더라고.]
“…….”
[아, 다른 마녀들한테도 상급 마정석을 주겠대.]
“저희한테도 마정석을 준다고요?”
누가 봐도 미끼였다.
하지만 바람의 마녀가 보여 준 큼직한 마정석. 보면 볼수록 자꾸 탐이 났다.
‘그래, 그와는 피의 맹약도 맺었잖아.’
우리한테 위해를 가하진 못할 터.
바람의 마녀가 추측한 대로 뭔가 부탁할 거리라도 있는 모양.
하지만 저 귀한 걸 선뜻 내줄 정도면 상당히 위험하거나 힘든 부탁일 터.
그래도 만나서 얘길 들어 볼 가치는 있었다.
“알겠어요.”
밤의 마녀는 곧장 다른 마녀들한테도 연락을 보냈다.
여명의 빛의 수장인 그녀만이 다른 마녀들과 연락할 수단이 있었으니까.
갑작스러운 호출에 다들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응답했지만, 바람의 마녀가 상급 마정석을 보여 주니 돌변했다.
[정도현, 그 남자가 그냥 줬다고?]
[엮이면 위험한 사내라며, 밤의 마녀?]
[그보다 우릴 불러내려는 목적은 뭘까. 혹시 나만 불안한 거 아니지?]
[우리의 마법 지식이라도 필요한 게 아닐까?]
[밤의 마녀, 그래서 어쩔 거야?]
“투표로 정하죠.”
마녀들은 거수투표로 정했다. 정도현과 만날지 말지.
다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들었다. 밤의 마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장일치가 나왔네요.”
여명의 빛이 설립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럼 한 시간 뒤 마녀들의 정원으로 다들 모이죠.”
팟.
밤의 마녀가 시간과 장소를 정해 주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을 끊었다.
밤의 마녀는 생각했다. 평소와 달리 지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다들 상급 마정석을 갖고 싶어서 헐레벌떡 달려올 테니까.
물론 밤의 마녀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리 그래도 30분도 안 돼서 전원 모일 줄 몰랐는걸요.”
“평소엔 30분 넘게 지각하면서.”
“그나저나 바람의 마녀는? 그 남자를 데려온다지 않았어?”
“쳇, 본인은 물건도 받았으니 급할 게 없단 거겠지.”
마녀들의 정원에 다들 집합했다, 바람의 마녀만 빼고.
물론 그녀가 지각한 건 아니다. 단지 다른 마녀들이 너무 일찍 온 것뿐.
다들 애간장이 타는지 그녀를 곱씹어 댔다.
그렇게 수십 분이 흘러 약속 시각이 된 직후.
스스스-!
공간이 일그러지며 정도현 일행이 나타났다.
“어라, 벌써 다 모였네요?”
“그러게. 지각하는 녀석들이 많다길래 일부러 딱 맞춰 왔더니만.”
정도현 옆에 있던 부패의 마녀, 유가인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지각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이게 돈의 힘인가.
“뭐야?”
“부패의 마녀, 네가 왜…….”
“잠깐, 다들 저것 좀 봐!”
죽은 줄 알았던 유가인이 살아 있자 마녀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어떤 마녀가 덜덜 떨며 정도현의 손에 들린 걸 가리켰다.
그건 누군가의 수급이었다.
“아, 이거? 선물이야.”
정도현은 들고 있던 수급을 마녀들 앞에 휙 던졌다.
툭, 데구루루.
축구공처럼 굴러온 여인의 머리.
그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마녀들은 다들 경악했다.
“바, 바람의 마녀?”
상급 마정석을 얻었다며 뛸 듯이 기뻐했던 바람의 마녀. 그녀가 죽어 버린 것이다.
마녀들의 머릿속에서 똑같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대체 어떻게?’
‘피의 맹약을 맺은 게 아니었어?’
마녀들이 덜덜 떨며 밤의 마녀를 쳐다봤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듯.
하지만 밤의 마녀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정도현은 검을 늘어뜨린 채 저벅저벅 원탁으로 걸어와 바람의 마녀 자리에 앉았다.
그러는 동안 마녀들은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럼 죽을 테니까.
정도현은 검을 원탁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싸움에 안 끼어들 거니까.”
“…그게 무슨 소리죠?”
“내 파티원들이랑 일대일로 싸워서 이긴 사람은 살려 줄게.”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스스스-!
진규현이 서아린과 박성원을 데리고 도착했다.
마녀들은 저들의 레벨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끽해야 90레벨대 플레이어. 여기 모인 마녀들은 전원 100레벨의 벽을 넘었다.
“…당신의 파티원들을 죽이면 어차피 우리도 죽는 거 아냐?”
“못 믿겠으면 바로 죽여 줄까?”
정도현이 다시 칼자루를 쥐자, 말대꾸했던 마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갤 저었다.
“아,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냐…….”
“야, 내가 먼저 할래!”
마녀들은 먼저 싸우겠다며 말싸움을 벌였다.
서아린 쪽은 박성원이 나서기로 이미 정했는지 곧바로 나왔다.
“어머…….”
“되게 잘생겼네?”
“죽이기 아까울 정도야.”
그의 수려한 용모에 마녀들이 너도 나도 호감을 보였다. 그러자 유가인이 발끈했다.
“야, 눈깔 안 치워? 저 오빠는 내가 먼저 찜했거든!”
“배신자는 입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