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가면녀는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검강. 그건 견습 기사가 정식 기사로 인정받기 위해 도달해야만 하는 경지.
재능이 없으면 평생 노력해도 닿지 못하며, 설사 재능이 있더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걸 저 녀석이 어떻게?’
그나마 정도현의 검강은 어딘지 불안정했다.
하지만 그건 깨달음의 깊이가 얕아서는 아니었다. 그랬었으면 애당초 저렇게 구현하지도 못했겠지.
문제는 그의 레벨에 있다.
‘아직 100레벨이 아니라서 시스템 페널티가 붙은 거야.’
즉, 검강의 사용 조건인 100레벨만 충족하면 저 검강도 온전해진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업적이었다.
가면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질문했다.
“…너 몇 살이야?”
“먹을 만큼 먹었어.”
그녀는 가문의 비전 무공 덕에 상대의 기의 흐름과 선천진기를 훤히 내다볼 수 있다.
그래서 상대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정도현의 남은 선천진기로 볼 때 끽해야 20대 초중반.
‘저 나이에 벌써 저만한 경지를 이뤘다고?’
인생 2회차? 아니면 말로만 듣던 희대의 검술 천재?
그게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하물며 C구역 출신이지 않은가.
주변에 가르쳐 줄 스승도 없었을 텐데.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이었다.
그녀는 욕심이 났다. 잘 키우면 가문에 도움이 될 인재다.
“너, 내 견습 기사가 될 생각 없어?”
“…견습 기사?”
“그래, 난 기사거든. 사천당가 소속이야.”
그녀가 출신을 밝혔다. 물러서서 관망하던 투랑이 눈을 부릅떴다.
사천당가는 B구역 실세인 5대 가문 중 하나였다.
독과 암기술 그리고 인체를 치료하는 의료술로도 유명했다.
‘어쩐지 더럽게 세더라니.’
투랑은 정도현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상대가 가문의 기사라면 아무래도 혼자 상대하긴 벅찰 터.
자신의 목을 노린 도전자라 해도 생명의 은인.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여차하면 도망칠 시간이라도 벌어 줘야겠군.’
투랑이 그렇게 결심했을 때.
탓-!
정도현이 잔상을 남기며 이동했다. 가면녀도 마찬가지였다.
채앵-!
금속의 마찰음이 들렸다.
투랑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둘의 움직임을 쫓았다.
어느새 가면녀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거기엔 정도현의 것과 달리 온전한 형태의 검강이 깃들었다.
푸른빛과 보랏빛. 서로의 검강이 부딪히며 곳곳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
투랑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둘의 공방은 너무도 치열했다.
그는 설렁설렁 싸우던 가면녀를 상대로도 버티는 게 고작이었는데, 정도현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대등하게 맞섰다. 그와는 수준이 달랐다.
‘어떻게 저런 힘을?’
그는 힘을 얻고자 많은 걸 포기했다.
그런데 정도현은 100레벨을 넘지도 못했는데 그보다 강했다.
투랑은 그제야 깨달았다. 정도현은 자신이 걱정해 줘야 할 수준이 아님을.
쾅-!
강렬한 폭발과 함께 둘의 거리가 쭉 벌어졌다.
툭.
반으로 쪼개진 토끼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당소예] [LV.124]
가면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고약한 심보와 달리 눈이 동그랗고 귀여운 인상의 미녀였다.
그녀는 가면이 사라진 걸 확인하곤 정도현에게 삿대질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너… 방금 진짜로 죽이려 했지!”
“당연한 걸 왜 묻지?”
“진짜 미쳤어? 나 기사야! 그것도 사천당가의 성을 물려받은 정식 기사!”
“어쩌라고.”
정도현은 그녀가 어느 가문의 기사든 기사단장이든 상관없었다.
이건 진검 승부. 지는 놈은 경험치가 되어 승자에게 먹힐 뿐이다.
‘B구역 출신이라 그런지 강해.’
도핑제까지 먹었는데도 쉽게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빈틈을 노려 반격까지 꾀했다.
‘하지만 약점은 있다.’
그가 볼 때 당소예의 검강은 어딘가 조잡했다.
이해도가 부족한 게 눈에 보인다.
단계로 치면 초급 수준.
보아하니 정식 기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모양.
반면에 정도현은 레벨이 낮아 위력만 약할 뿐, 검강의 이해도 면에선 중급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100레벨이 되어 「검강」 스킬북까지 쓴다면 완전무결한 검강을 구사할 수 있으리라.
“진짜 마지막 기회야. 죽기 싫으면 항복해! 얌전히 내 견습 기사가 되라고.”
당소예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그래 봤자 귀엽고 순한 인상이라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정도현은 무시하고 다시 보법을 밟아 거릴 좁혔다.
그의 검강이 목전으로 쇄도하자 당소예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네가 선택한 거야!”
스스스-!
불길한 보랏빛 마력이 그녀의 전신에서 발산됐다.
투랑과 강유라를 중독시켰던 독기였다.
지금까진 정도현의 재능이 아까워서 독공을 안 썼지만, 그는 마지노선을 넘었다.
“죽어!”
그녀의 앙칼진 외침과 함께 검강이 독기로 물들어 한층 짙어졌다.
살짝만 스쳐도 서서히 독이 퍼져 죽으리라.
물론 고레벨 플레이어라면 체내의 독기를 마력으로 태워 없앨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러니 전투 중에 치료할 순 없다.
즉, 중독되면 그녀를 빨리 쓰러트려야 살 수 있다.
‘네 실력은 대충 파악했어.’
종합적인 능력치는 정도현이 그녀보다 우위였다. 하지만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끽해야 종이 한 장 차이.
중독시킨 뒤 조금만 버티면 내가 이긴다. 그렇게 판단한 당소예는 자신만만하게 검을 내질렀다.
채재재쟁!
정도현은 다가오는 칼날을 튕겨 냈지만, 그때마다 검강에 실린 독기가 연막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이런!”
투랑이 도망치듯 경기장에서 물러났다.
저 둘이 검을 섞을 때마다 독기가 퍼져 이젠 경기장 일대를 뒤덮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저 독기 속에서 싸우라니. 조금만 숨 쉬어도 중독될 거다.
“그러게 내 말 들었으면 좋았잖아? 네 재능이면 분명 정식 기사가 됐을 텐데.”
당소예는 이미 승리한 것처럼 여유를 부렸다.
독기 속에 갇힌 정도현은 칼자루를 꽉 붙잡고 숨을 훅 들이켰다.
화르륵-!
그러자 칼날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어났다.
“……!”
독안개는 열기에 휩쓸려 순식간에 타 버렸다. 뿌옇던 경기장이 환해졌다.
“어떻게 화염의 마력을……?!”
정도현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불꽃의 검이 춤추듯 날아들자 당소예는 기겁하며 피했다.
불꽃의 마력은 독기와 상극이라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콰앙, 쾅!
검을 휘저을 때마다 거친 폭발이 일었다. 자신만만했던 당소예는 도망치기 바빴다.
그녀는 정면 대결을 포기하고 투척용 나이프를 꺼내 허공에 흩뿌렸다.
“주, 죽어!”
독기와 마력을 잔뜩 머금은 암기가 휘어지며 한 곳으로 모였다. 목표는 당연히 정도현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수십의 암기들.
정도현은 제자리에서 풍차처럼 검을 휘둘렀다.
불길의 장벽에 휩쓸린 암기들은 힘을 잃고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서 조잡한 잡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오, 오지 마!”
당소예가 덜덜 떨며 경고했지만, 정도현은 더더욱 세차게 몰아쳤다.
그의 체내에 스며든 독기는 이미 화염의 마력에 불타 날아간 지 오래.
독기와 마력을 잔뜩 소모한 당소예는 지쳐서 움직임이 굼떠졌다.
“잡았다.”
“……!”
콰앙!
그에게 따라잡힌 당소예는 단검으로 불꽃의 검을 막아 냈다. 하지만 막아도 막은 게 아니었다.
폭발에 떠밀린 그녀가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쿨럭, 으…….”
당소예가 비틀대며 일어섰다.
아름답던 피부는 군데군데 화상으로 얼룩져 엉망이 되었다.
정도현이 달려온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속절없이 죽을 터.
‘이것밖에 없어.’
까득-!
그녀는 입속에 감춰 뒀던 가문의 단약을 삼켰다.
그것은 혈독을 만들어 내는 재료였다.
사천당가가 다루는 독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혈독’.
이는 플레이어의 피를 매개체로 만든다.
순도 높은 마력이 농축된 피일수록 혈독의 위력도 올라간다.
그녀는 자신의 몸속의 혈액을 모조리 혈독으로 바꿨다.
주르륵-!
그 반동으로 당소예의 눈, 코, 입에서 보랏빛 피가 쏟아졌다.
‘넌 나랑 같이 죽는 거야.’
당소예는 방어와 회피도 포기하고 정도현을 향해 뛰어들었다.
푹!
화염의 칼날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당소예가 그의 품에 안겨 부둥켜안았다.
‘자폭?’
당소예의 몸이 흐물거리더니 풍선처럼 펑 터졌다.
그녀의 몸속에 흐르던 혈독이 정도현을 덮쳤다. 그는 보랏빛 피로 흠뻑 젖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침내 100레벨에 도달했다.
하지만 기뻐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 이봐! 괜찮아?”
투랑이 혈독에 범벅이 된 정도현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쿨럭, 쿨럭!”
정도현의 얼굴에 물집이 잡히고 고름이 줄줄 흘러나왔다.
투랑과 강유라가 당했을 때보다 중독 속도가 훨씬 빨랐다.
당연했다.
그들이 당한 혈독은 100레벨 미만의 플레이어 혈액으로 만든 것이고, 정도현이 당한 건 기사급이었으니까.
“미, 미안하다. 도와주지 못해서…….”
투랑은 그에게 무릎 꿇고 사죄했다.
정도현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는데, 자신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력감이 몰려왔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을 때처럼.
그와 스승님의 모습이 겹쳐 보여 눈물이 찔끔 나왔다.
“쿨럭, 쿨럭! 아파 죽겠네.”
그런데 정도현이 자연스럽게 엘릭서를 꺼냈다. 투랑은 입을 쩍 벌렸다.
엘릭서가 한 병 더 있었다고?
엘릭서를 마시자 뒤집혔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세계수의 열매 덕에 독에 내성이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목숨을 걸 만한 공격이었다.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뼈도 못 추렸겠지.
“넌… 아니,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투랑은 궁금증을 못 참고 질문했다.
처음엔 5대 가문의 직계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기사 출신인 당소예가 몰라볼 리 없었다.
애초에 저 둘이 목숨 걸고 싸우지도 않았을 거고.
“내가 그걸 말해 주겠냐?”
“…….”
정도현이 그렇게 대꾸하며 회복 포션을 마셨다.
세상에, 상급 포션이었다.
그도 여태 몇 번밖에 못 본 귀한 아이템이었다. 그걸 당연하단 듯이 마셔 댄다.
“너도 하나 마셔.”
“저, 전 괜찮습니다!”
“아냐, 내가 안 괜찮아. 빨리 마셔.”
정도현은 투랑한테도 상급 포션을 건넸다.
그는 부담스러웠지만 별수 없이 마셨다. 억지로라도 먹일 기세였으니까.
몇 모금만 마셨는데도 지친 몸에 활력이 돌아왔다.
투랑은 머릴 바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계산해 볼까?”
“아, 돈이라면 모아 둔 게 있습니다.”
“아니, 돈 말고 더 좋은 게 있잖아.”
“예?”
“경험치로 갚아야지.”
정도현이 웃으며 검을 겨눴다.
투랑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