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권하루와 진규현은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얘길 나눴다.
처음엔 아카데미 테러 이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그녀가 칙칙한 얼굴로 고민거릴 털어놨다.
“계속 아카데미를 다녀야 할지 말지 모르겠어.”
“성적이 낮아서?”
“…응.”
권하루는 며칠 전 부모님과 따로 통화했다. 언니의 위로와 조언 덕분에 그녀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자신의 고충과 상황을 전부 털어놨다.
언니와 달리 자신은 플레이어로서 재능이 아예 없다.
그 탓에 성적은 최하위고, 아카데미에서 줄곧 왕따를 당해 왔다고.
그런 상황인지 몰랐던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펑펑 우셨다.
아버지는 아카데미에 항의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렸다.
그런 식의 해결법은 의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아카데미는 늘 강자의 편을 들어주니까.
“애초에 나한텐 과분한 자리였어.”
언니의 후광 덕에 추가로 붙은 거다.
원래였으면 권하루는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미련을 접고 제 발로 아카데미를 나가는 게 맞지 않겠는가.
권하루의 넋두리에 진규현은 고갤 저었다.
“글쎄다, 내가 볼 땐 어중간한 애들보단 네가 훨씬 낫던데.”
“…어?”
“넌 매일 노력했잖아, 거의 삼 년이나.”
그녀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권하루의 기본기는 아주 탄탄했다.
다른 학생들은 화려한 기술이나 요령 익히기에만 급급한데 말이다.
“플레이어의 진가는 실전에서 나와. 그런데 1, 2학년은 실전을 안 치르잖아? 끽해야 학생끼리 대련 좀 하고 말겠지.”
“…….”
“게다가 저학년들은 필기시험 비중이 더 크다며. 너, 필기시험 점수 안 좋지?”
“…응. 낙제점만 겨우 면했어.”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자 매일같이 검을 쥐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휘둘렀다.
그러지 않으면 대련에서 버티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그러니 진득하게 공부할 시간도 없었다.
애당초 이론이나 암기 쪽으론 약하기도 했고.
언니는 머리도 좋고 「독심술」까지 있어서 문무를 겸비했지만.
“너랑 정식으로 붙어서 이길 동급생, 몇 명 없을걸?”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진짜야. 그렇게 위축됐으니 이길 싸움도 지지.”
권하루는 몇 년간 지속적인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니 대련할 때 심리적으로 말릴 수밖에.
그럼 승률은 현저히 낮아진다.
약간의 재능이 있었다면 그마저도 극복하고 이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전투 쪽에 일말의 재능이 없었다.
대신 노력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노력하는 천재는 못 이기더라도 나머지들은 해볼 만했다.
“기운 내. 성적 좀 낮은 걸로 흔들리지 마. 3학년부턴 던전 실습이랑 대련 비중이 커지잖아? 더 할지 말지는 그때 고민해도 안 늦어.”
“…그럼 나, 더 해 봐도 돼?”
“당연하지. 중요한 건 재능이 아니야.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
사실 그녀도 이대로 포기하기 싫었다.
매일 검을 쥐고 단련하는 건 고통스러웠지만 그 이상으로 즐거웠다.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부모님은 물론이고 언니마저도 힘들면 포기하란 쪽으로 얘기했다.
그런데 진규현은 달랐다.
처음이었다. 포기하지 말고 쭉 해 보라는 격려는.
덕분에 답답하던 가슴이 홀가분해졌다.
‘그래, 좀 더 해 보자.’
내가 하고 싶었던 거잖아.
다른 사람들 말에 휘둘릴 필요 없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관두면 된다.
“아저씨 덕에 힘이 나네. 헤헤.”
“뭘 이 정도로. 밥값은 해야지. 그럼 돌아갈까?”
진규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흠칫했다. 그러더니 황급히 주변을 살핀다.
그의 이상한 행동에 권하루가 고갤 갸웃했다.
“아저씨? 왜 그래?”
“…….”
진규현은 대답 대신 어딘가를 빤히 노려봤다.
저편에서 후드 차림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야?”
“…도망쳐야 해.”
“뭐?”
진규현은 대뜸 권하루의 손을 붙잡고 「공간 도약」을 발동했다.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더니 전혀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혹스러운 눈으로 진규현을 쳐다봤다.
“아, 아저씨? 이게 뭐 하는…….”
“미안. 나중에 설명할게. 집에 먼저 가서 기다려.”
진규현은 안전한 장소에 그녀만 놔두고 다시 「공간 도약」을 발동했다.
그가 공원으로 되돌아오자, 후드 차림의 남자는 신기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뭐야, 진규현. 너 그런 능력도 있었어?”
“멍멍이, 네가 왜 여깄지?”
후드 차림의 사내는 진규현과 똑같은 제한 구역의 실험체였다.
견인족으로 개조됐기에 그는 멍멍이라 불렀다.
“너 데리러 왔지. 주인님이 찾으시거든.”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냐?”
“그것까진 네가 알 필요 없고. 방금 그 여자애는 뭐냐?”
견인족 사내가 권하루한테 관심을 보이자 진규현이 으르렁댔다.
‘근처에 사람은 없어. 다행이야.’
저놈을 곱게 보내 줘선 안 된다.
남부 마탑주한테 분명 일러바칠 터.
물론 녀석을 처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급한 불만 끌 뿐.
‘다른 실험체들을 보내겠지.’
그는 끌려가는 한이 있어도 권하루 가족한테 피해 주기 싫었다.
임종이 다가오는 반려동물은 주인 눈을 피해 조용한 공간을 찾는다고 하던가. 왜 그러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그의 살의를 감지한 견인족 사내는 피식 웃었다.
“뭐야, 나랑 싸워 보게?”
견인족 사내는 실험체 중에서도 전투에 가장 특화됐다.
진규현도 종종 그와 대련했지만 그때마다 이겼었다.
“넌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저번에 네 주인이 쓰레기 같다고 욕해서 그러냐?”
“…그때 그렇게 처맞아 놓고도 아직 정신 못 차렸네. 넌 좀 맞자.”
진규현이 이죽대자 견인족 사내는 이를 갈았다.
진규현은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딴 정신병자한테 진심으로 충성하다니. 너도 불쌍하다, 진짜.”
“닥쳐!”
견인족이 화를 못 참고 먼저 달려들었다. 진규현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퍼억, 퍼버벅!
서로 살벌하게 치고받는다.
주먹을 맞댈 때마다 견인족은 피가 끓어올랐다.
입꼬릴 올리며 점점 더 거세게 밀어붙였다.
반면에 진규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조금씩 밀렸다. 놈의 괴력은 여전했다.
생포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는지 주먹이 급소만 노리며 날아든다.
진규현은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 내기에 급급했다. 그 모습에 견인족이 킬킬댔다.
“어디 계속 막아 봐! 아니면 그 잘난 능력으로 도망치든가!”
「공간 도약」으로 싸움을 피한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녀석은 권하루의 얼굴을 봐 버렸다.
그가 여기서 내빼면 권하루를 찾아내 붙잡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번뜩였다.
내가 못 쓰러트리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자. 진규현이 거릴 쭉 벌렸다.
견인족이 그를 바짝 뒤쫓았지만 이미 「공간 도약」은 발동된 뒤였다.
후웅-!
진규현이 검은 연기에 휘감겨 사라졌다.
사내의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갈랐다.
“쳇! 이 비겁한 새끼. 이럴 줄 알았어.”
진규현이 튀자 견인족은 땅바닥에 침을 탁 뱉고선 씩씩댔다.
망할 고양이 녀석. 그때랑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마탑주가 챙겨 준 마력 탐지기를 꺼냈다.
이것만 있으면 반경 수백 미터 안에 있는 대상은 추적할 수 있다.
삐빅-!
마력 신호가 잡혔다. 다행히 그리 멀리까지 도망치진 못한 모양.
‘놈이 동부에 있다고 보고해야지.’
그는 마탑주한테 연락하려다 멈칫했다.
진규현을 찾았는데 놓쳤다고 보고하면 좋은 소린 못 들을 거다.
‘일단 붙잡은 다음에 보고하자.’
그는 견인족답게 주인의 신뢰를 잃는 게 죽음보다 더 두려웠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는 곧장 진규현을 추격했다.
* * *
「공간 도약」으로 도망친 진규현은 첫 지점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견인족은 의아했으나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 기술, 마력을 많이 잡아먹나 보군.’
놈은 마력 고갈로 지친 거다. 그래서 멀리 달아나지 못한 거겠지.
‘거의 다 왔는데 어디 숨었지?’
반쯤 지어 올린 건물들과 공사장이 보였다. 이곳에 놈이 숨어 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알아서 와 주다니.
그로선 고맙기 그지없었다.
탐지기를 꺼내 진규현의 위치를 재확인하려던 찰나.
“…응?”
삐빅-!
마력 신호가 사라지더니 몇 초 후에 다시 잡혔다. 그런데 두 개로 늘었다.
게다가 새로 잡힌 신호의 크기는 진규현보다 훨씬 컸다.
견인족의 눈동자가 떨렸다.
‘철혈의 여제를 죽인 놈이다!’
주인님이 찾던 범인이 지금 진규현과 같이 있다.
방금 사라졌다 나타난 건 「공간 도약」으로 범인을 데려온 모양.
견인족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당했다. 이건 진규현의 함정이었다.
‘도망쳐야 해.’
혼자선 범인을 감당할 수 없다.
그가 달아나려 마음먹은 순간.
스스스!
시커먼 연기가 일더니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당연히 진규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내였다.
[정도현] [LV.96]
“저 녀석이야?”
“어, 맞아. 멍청해서 따라올 줄 알았어.”
정도현과 눈이 마주친 견인족은 심장이 벌렁댔다. 본능이 경고했다.
저놈은 위험하다고.
‘하지만… 96레벨인데?’
자신보다 1레벨 낮았다. 그런데 왜 이리 식은땀이 날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야, 멍멍아. 너 이제 큰일 났다?”
진규현이 그렇게 말하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꼭 몇 대 맞고 돌아가 형을 데려온 꼬마애 같았다.
견인족은 겁먹은 걸 감추고자 더더욱 사납게 짖었다.
“네놈이구나, 주인님의 원수!”
“…주인님?”
“남부 마탑주, ‘박태오’를 말하는 거야.”
진규현이 옆에서 설명해 줬다.
정도현은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마탑주한테 원한 살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내가 그놈한테 뭘 잘못했는데?”
타앙-!
견인족은 대답 대신 땅을 박차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정도현은 그럴 줄 알았단 듯이 곧장 반응했다.
“……!”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따라잡혔다. 그 속도에 견인족은 경악했다.
정도현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는 팔을 교차시켜 가드를 올렸다.
퍼억!
주먹이 팔뚝에 닿자마자 충격파가 몸을 두들겼다.
누가 오장육부를 손으로 붙잡고 찌부러트리는 느낌이었다.
“쿨럭……!?”
견인족이 피를 왈칵 토하며 땅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그가 일어서며 고갤 들었을 땐 이미 턱 아래로 발길질이 날아든 뒤였다.
빠악-!
하관을 얻어맞았다. 견인족의 시야가 암전됐다.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며 그대로 뻗었다.
정도현은 이제 100레벨 이하의 플레이어는 손쉽게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의 압도적인 무위에 진규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치 열성팬처럼 박수를 짝짝 쳐 줬다.
“어우!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진실의 방으로 데려가.”
“알았어.”
진규현은 기절한 견인족 사내와 정도현의 어깨를 붙잡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 * *
“네 주인이 철혈의 여제랑 사귀는 사이였다고?”
“…예.”
모진 고문 끝에 견인족 사내는 입을 열었다.
남부 마탑주는 철혈의 여제와 긴밀한 사이였다.
그런데 정도현이 그녀를 살해해 버린 상황. 그래서 눈이 돌아 버렸다.
‘시간을 되돌리는 주문이라, 그런 것도 있었다니.’
혹시 몰라 현장과 증거를 지하 속에 파묻었는데 그걸 기어코 발굴해 냈다.
진규현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끌어들여 놓고서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이제 어쩔 거야?”
이번 상대는 마탑주.
석화의 마도사나 철혈의 여제는 음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라 죽여도 어느 정도 수습은 되지만, 박태오는 달랐다.
남부 마탑의 핵심 인물이 죽으면 남부 관리국도 대대적인 범인 찾기에 나설 거다.
‘한 번 죽이고 부활시킬까?’
성공만 한다면 그게 가장 깔끔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그가 복종하지 않고 죽음을 택해 버리면 일이 꼬인다.
‘딱 봐도 단단히 홀렸는데. 놈이 곱게 머릴 숙일까?’
찾아가서 죽이자니 뒤탈이 생길 것 같고, 가만히 놔두면 정도현과 그 주변인들을 들쑤실 거다.
정도현이 어찌할까 고민할 때.
지잉-!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평소 쓰던 게 아니라 신호영이 남기고 간 구형 휴대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