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빛바랜 정도현의 머리칼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망가지고 뒤엉켰던 마력 회로도 제자리를 되찾았다.
그는 회복 포션을 쭉 들이켜곤 좀 살 것 같단 표정을 지었다.
쓰러졌던 그의 머릴 무릎으로 받쳐 주던 서아린이 흐느끼듯 말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요.”
“이제 괜찮아. 좀 위험하긴 했지만.”
그새 눈물을 흘렸는지 그녀의 눈가가 빨갰다.
“하나도 안 괜찮아요.”
“뭐가?”
“몸이 심하게 망가졌잖아요. 죽을 뻔할 만큼.”
그녀의 말에 정도현은 그게 어때서란 표정을 지었다.
“엘릭서가 있는데, 뭘.”
“…쓰기도 전에 죽으면요? 방금도 저희 없었으면 잘못될 뻔했잖아요.”
그건 사실이라 정도현은 반박하지 못했다.
“혼자 싸울 땐 그 기술 쓰지 마세요. 절대로.”
“알았어.”
그가 고갤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도 실전에서 처음 써 보고 나서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 말대로 선천진기를 사용하다 까딱하면 동귀어진이 될지 모른다.
궁지에 몰려도 도와줄 사람이 곁에 있을 때만 써야겠다.
그의 대답에 서아린도 안심이 됐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다들 고생했어.”
정도현은 동료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도 그 못지않게 피투성이였다.
물론 그들이 흘린 피는 아니었다.
주변에 널린 기괴한 시체들. 권속이 되지 못한 실패작들이었다.
“…아뇨. 고생은 정도현 씨가 했죠.”
권하율이 그렇게 말하며 면목 없단 듯 고갤 떨궜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심정인지 머쓱한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기껏 따라왔는데 정도현 혼자 보스를 상대했다. 그것도 목숨이 위태로웠을 만큼 무리해 가며 말이다.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게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다들 뭘 이런 거에 주눅 들어요. 제가 언제는 무리 안 했습니까?”
정도현의 농담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래, 철혈의 여제는 토벌했다. 사상자도 없다. 결과적으로 모든 게 잘 해결됐다.
“그럼 얼른 돌아가자고.”
진규현이 하품을 쩍 하며 그리 말했다.
요새 고양이로 사느라 잠이 부쩍 늘었다.
장거리 왕복 이동에 혈투까지 치렀다.
오늘은 정말 열심히 굴렀다.
빨리 따뜻한 안방에 드러누워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 * *
북부 암흑가를 지배해 온 철혈의 여제.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암흑가에서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던 집행자들은 앞다투어 관리국에 보고했다.
그녀의 실종 소식을 접한 북부 관리국은 초비상 상태에 돌입했다.
철혈의 여제는 북부 전쟁을 일으켰던 장본인. 눈에 안 보이면 불안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가 살해당했을 거라곤.
시커먼 까마귀가 북부 설산의 상공을 날아다녔다.
밤의 마녀가 기르는 사역마였다.
그녀는 철혈의 여제의 행방이 묘연하단 소문을 접하곤 무언가 직감했다.
‘정도현이 한 짓이야.’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 건 아니지만 정황상 죽은 게 확실했다.
얼마 전까지 94였던 정도현의 레벨이 96으로 올랐으니까.
그가 사냥한 거다. 무려 110레벨의 보스 몬스터를.
‘찾았다.’
밤의 마녀는 철혈의 여제의 본거지가 어딨는지 알고 있었다.
북부 설산 중턱 부근에 숨겨진 지하 공간으로 연결된 동굴이 있다.
그런데 동굴 입구가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흔적으로 봐선 얼마 안 됐다.
‘증거를 없애려 지하 시설을 통째로 파묻은 거야.’
폭삭 내려앉아서 내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철혈의 여제는 정도현 손에 죽었다.
그녀는 소름이 쫙 돋았다.
정도현이 자신에겐 위해를 가할 수 없단 걸 알면서도.
‘천만다행이야. 미리 맹약을 맺어 둬서.’
그가 더 강해진 뒤에 찾아갔더라면 분명 콧방귀를 뀌었으리라.
혹시나 했던 노파심이 마녀들을 살린 것이다.
암흑가의 지배자들은 죽어도 마녀들은 살아남으리라. 늘 그래 왔듯이.
스륵.
까마귀는 검은 연기로 변해 주인 곁으로 되돌아갔다.
그로부터 수십 분 뒤. 무너진 동굴 앞에 웬 무리가 나타났다.
다들 청색 로브를 걸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던 이가 급히 내려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파묻힌 입구를 보더니 맥없이 무릎 꿇었다.
“이럴 수가……. 안 돼, 이럴 순 없다!”
그가 오열하며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손등은 주름지고 손가락은 앙상한 걸 봐선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일행들이 그를 부축해 주려 다가갔지만, 노인은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가 흘린 눈물이 설산의 서릿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노인 옆에 서 있던 일행이 조심스레 말했다.
“주인님, 상심하지 마십시오. 분명 피신했을 겁니다.”
“…그 입 닥쳐라! 누굴 바보로 알아? 그녀가 살아 있다면 왜 여태 연락이 없었겠어!”
“죄, 죄송합니다!”
노인이 도리어 역정을 내자 입을 연 사내가 급히 고갤 숙여 사과했다.
그래도 노인은 분이 안 풀리는지 사내를 노려봤다.
“네깟 게 감히… 날 머저리 취급해?”
“그, 그런 게 결코 아닙니…….”
“닥쳐라! 어디서 말대꾸냐!”
“컥, 커헉!”
노인이 중지에 낀 반지를 겨눴다.
그러자 사내가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이내 다리까지 풀리며 눈 위에 털썩 엎어졌다.
“끄, 으…….”
“가축이, 제 주제도 모르고 주인을 능멸해?”
“죄, 죄송… 합니다……. 사, 살려…….”
노인은 사내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형벌을 멈췄다. 반지에서 빛이 사라졌다.
“…콜록! 허윽, 허억…….”
쓰러졌던 사내가 겨우 숨을 내쉬었다.
다른 일행들은 벌벌 떨며 그 광경을 지켜만 봤다.
휘잉-!
차디찬 칼바람이 불었다.
쓰러진 사내의 후드 부분이 뒤로 넘어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사내의 머리 위에는 강아지 귀가 달려 있었다. 그는 수인, 견인족이었다.
다른 일행들도 일족만 다를 뿐 전부 수인이었다.
견인족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아무도 부축해 주지 않았다.
노인의 심기를 거스르면 그들 역시 벌 받을 테니까.
“다들 옆으로 꺼져.”
노인이 그렇게 말하곤 손으로 술식을 짰다.
수인들이 황급히 좌우로 비켜섰다.
주문을 완성한 노인이 동굴을 향해 양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쿠구구궁-!
거대한 바윗덩이와 흙더미로 꽉 들어찬 입구가 진동했다.
그러더니 조금씩 길이 뚫렸다.
얼핏 보면 대지의 주문으로 암석들을 옮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이 광경을 직접 봤다면 알아챘을 거다.
노인이 사용한 주문은 그런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노인의 마력에 무너진 암석들이 알아서 제자리를 되찾아갔다. 마치 시간이 돌아간 것처럼.
그렇게 수십 초가 지났다.
무너졌던 입구가 거짓말처럼 시원하게 열렸다.
입구만 돌아온 게 아니었다.
흙더미에 파묻힌 내부 공간마저 말끔히 수복됐다.
“후우, 후…….”
“주인님, 고생하셨습니다.”
설산의 한파 속에서도 노인은 구슬땀을 줄줄 흘렸다.
그만큼 마력과 체력 소모가 큰 주문이었다.
작업이 끝나자, 옆에 있던 수인이 능숙하게 마력 포션을 바쳤다.
노인은 그걸 마시곤 수인들에게 앞장서라 했다.
* * *
지하 내부는 참담했다.
노인의 주문으로 무너진 잔해물이 사라지자, 그 밑에 파묻힌 시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역시… 전투가 있었군.”
괴상한 모습의 시체들.
전부 철혈의 여제가 만든 괴물들이었다.
수백의 괴물들이 깡그리 죽었다.
여기서 격렬한 싸움이 있었단 반증.
그는 주변을 두리번대다 마침내 발견했다. 다른 괴물들보다 거대한 시신을.
“아…….”
추한 몰골의 괴물이었지만 그는 그게 누군지 알아봤다.
철혈의 여제다. 노인은 그녀의 시신에 주문을 사용했다.
그러자 거구의 시신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아름다운 인간 여성으로 변했다. 틀림없는 철혈의 여제였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하네.’
‘시간을 되돌린다니…….’
노인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시신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사물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만, 이미 꺼져 버린 생명은 어쩌지 못했다.
노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맹세했다.
“…내 기필코 이렇게 만든 놈을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노인은 철혈의 여제와 동맹 관계였다.
또한 서로 사랑을 속삭이던 사이였다.
물론 철혈의 여제는 진심이 아니라 연기였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다.
노인은 남부의 마탑주였다.
이 자리까지 오르고자 평생 마법 연구에만 몰두했다.
해가 갈수록 그의 성질은 괴팍해졌다.
자연스레 인간관계도 멀어졌다.
심지어 그는 얼굴마저 못생겼다.
그렇게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늙어 갈 때.
철혈의 여제와 만났다. 그는 첫눈에 반했다.
“주인님…….”
아까 벌을 받았던 견인족이 그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귀와 꼬리도 축 늘어졌다.
견인족은 개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 주인이 슬프면 거기에 공감한다.
주인이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은 거스를 수가 없었다.
“간악한 놈들 같으니. 매장하면 안 들킬 줄 알았더냐?”
플레이어는 전투할 때 자신의 마력을 남긴다. 그걸 전문 용어로 ‘마력흔’이라 부른다.
며칠이 지나 마력흔도 희미해졌지만, 그는 남부의 마탑주. 성깔은 더러워도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스스스-!
그는 철혈의 여제 몸에 남겨진 마력흔을 추출해 유리병 속에 담았다.
수인들은 저마다 코를 킁킁거리며 마력향을 기억했다.
마탑주는 지하 곳곳에 남겨진 마력흔도 찾아냈다. 범인의 동료들이겠지.
“…음?”
범인의 동료들이 남긴 마력을 확인하던 수인들이 고갤 갸웃했다. 익숙한 냄새 하나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서로 쳐다봤다.
“뭐냐?”
“아, 그게…….”
“주인님, 마력향 하나가 익숙합니다. 다들 맡아 봤던 마력입니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희소식이었다.
범인의 동료가 누군지 알면, 범인의 위치를 쉽게 특정 지을 수 있을 터.
그는 수인들을 닦달했다. 대체 누구냐고.
수인들은 잠시 의견을 나누더니 정체를 알아냈다. 견인족이 대표로 말했다.
“주인님, 진규현의 마력입니다.”
“…진규현? 그 묘인족 말이냐?”
“예, 틀림없습니다.”
기억이 난다.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는 특이 개체였지.
전투 센스가 출중해서 양질의 연구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순백교에 넘겼는데?”
그 녀석한테 더 얻어 낼 데이터가 없어서 돈 받고 팔았다.
하지만 순백교는 원인 모를 이유로 멸망했다.
교주가 죽었고, 신도들도 그녀를 따라 모조리 불타 죽었다.
‘그럼 그 녀석도 죽었을 텐데?’
수인들이 헷갈렸을 린 없다.
한 명도 아니고 넷 다 같은 소릴 했으니까.
“그놈을 찾아내서 내 앞에 끌고 와라.”
“예.”
마탑주는 수인들에게 마력을 추적하는 마도구를 하나씩 던져 줬다.
탐지 범위가 그리 길지 않아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반드시 찾아내 주마.
* * *
그로부터 몇 주가 흘렀다.
진규현은 오늘도 여느 때처럼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
물론 집에서 뒹굴뒹굴할 뿐 딱히 하는 건 없었다.
다 큰 어른인데 그래도 되냐고?
물론 된다. 그는 고양이니까.
‘아늑하다.’
따뜻한 방바닥에 몸을 지지자 노곤함에 졸음이 몰려왔다.
그가 고롱고롱 코까지 골며 낮잠을 잘 때, 누군가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그는 귀찮단 듯이 꼬릴 까닥대며 눈을 떴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보였다.
“…애옹?”
권하율의 여동생, 권하루.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눈을 끔뻑였다. 이거 혹시 꿈인가?
“아저씨, 안녕.”
“애옹……?”
네가 여기 왜 있어?
권하루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는지 설명했다.
“오늘부터 겨울 방학이거든.”
아, 그래서 집에 온 거구나.
작년에 부모님이랑 대판 싸우고 집에 쭉 안 들어왔다고 하더니. 이제 화해한 모양이다.
“아저씨, 같이 산책하러 가자. 겸사겸사 내 인생 상담도 좀 해 주고.”
“…애옹.”
“아, 귀찮아도 해 줘. 여기서 밥도 챙겨 주고, 잘 곳도 마련해 주잖아. 응? 가자.”
아, 이불 밖은 위험한데.
진규현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뭐 별일이야 있겠어? 여기가 암흑가도 아니고.
인생 상담인지 뭔지 말하는 걸 보면 뭔가 고민거리가 있나 보다.
어른인 내가 들어 줘야지. 밥값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