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뭔 일이야?”
“권하율이랑 광 팀장이 한판 붙는다는데?”
“진짜? 왜?”
“나도 몰라. 광서혁 그 새끼가 평소처럼 긁다가 못 참았겠지.”
권하율과 광서혁이 대련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본부에 있던 요원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다.
둘 사이가 안 좋은 건 다들 알고 있었지만, 결투로 번진 건 처음 있는 일.
광서혁이 시비를 걸어도 그녀는 줄곧 무시했으니까.
원인이야 어쨌든 싸움 구경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법.
‘좋아. 구경꾼도 충분하고.’
광서혁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눈대중으로 헤아리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아카데미 수석 졸업이니, 최연소 팀장이니 하는 건 전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철저히 짓밟아 주지.’
그는 자신 있게 검을 뽑았다. 그녀도 검을 들며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어째 전보다 견고하단 느낌이 들었다. 광서혁은 고갤 갸웃했다.
‘기분 탓인가?’
광서혁은 묘한 위화감을 떨쳐 내고 먼저 달려들었다.
어차피 그녀는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피하거나 막아 내는 것밖에 못 한다.
그 외엔 죄다 평범하니 쫄 필요도 없다.
“햐압!”
대련용 철검이 그녀에게 쏘아졌다.
분명 피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광서혁은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피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날렸다.
카앙!
둘의 검이 교차했다. 그녀는 손목을 부드럽게 꺾어 검을 튕겨 냈다.
그가 뒤로 몸을 빼며 기겁했다.
평소와 달리 그녀가 공격에 적극적이다. 게다가 노림수도 굉장히 날카로웠다.
“어, 어떻게…….”
카가가강-!
그녀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그는 아차 하는 사이에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내가 검술로 밀렸다고? 그것도 이딴 반쪽짜리 년한테?
“이… 망할!”
초반에 당황해서 조금 말린 것뿐이야.
주춤했던 광서혁은 마음을 다잡고 반격을 개시했다.
그녀의 공격 리듬을 파악해 흐름을 뚝 끊었다.
카각-!
작은 불똥이 튀면서 그녀의 검이 멈칫했다.
틈이 생기자 광서혁이 눈을 번뜩였다.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
그가 검을 몇 번 휘두르자 그녀의 검이 엇박자로 불쑥 파고들었다.
아까 그가 써먹었던 기술이었다.
검술에 재능이 없던 그녀가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 준 것이다.
티잉-!
가볍게 부딪혔지만 광서혁의 움직임은 뚝 끊겼다. 그의 칼이 갈 곳을 잃고 허우적댔다.
권하율은 과감하게 안쪽으로 몇 걸음 파고들었다.
자신의 공격을 방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라고 말하듯이.
“어?”
“팀장님이 웬일이시지?”
권하율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자 구경하던 그녀의 부하 요원들이 깜짝 놀랐다.
평소의 전투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르다. 억척같이 몰아붙여 상대를 압박해 갔다.
게다가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다 아는 것처럼 먼저 공간을 선점해 선택지를 착실히 지워 나갔다.
광서혁이 눈 깜짝할 사이에 궁지에 몰렸다.
요원들이 감탄하며 저들끼리 떠들었다.
“솔직히 예전엔 좀 의아했거든?”
“의아했다니, 뭐가?”
“권하율 팀장,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잖아.”
“그치, 그게 왜?”
“처음엔 엄청난 천재니까 우리랑 궤가 다를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뭐랄까… 되게 평범했거든.”
“아,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요원들이 고갤 끄덕였다.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칼 솜씨를 지녔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평범했다.
물론 ‘철벽’이란 별명답게 방어와 회피만큼은 평생 연습해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대단했지만, 그 외엔 기대 이하였다.
“솔직히 레벨만 좀 높고 그 정도로 강한가 싶었거든.”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지.”
채앵-!
검 한 자루가 핑그르르 회전하며 저 멀리 날아갔다. 광서혁이 끝내 무기를 놓친 것이다.
그녀가 그의 목에 칼날을 겨눴다.
승자가 결정됐다.
““우와아아아!””
요원들이 열렬한 함성을 보내며 그녀의 승리를 축하해 줬다.
그녀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배척당하고 있지만, 그건 관리국 간부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얘기다.
일반 요원들 대다수는 그녀를 귀감으로 여기고 존경했다.
“제가 이겼으니 앞으론 귀찮게 굴지 말아 주세요.”
“…….”
패배의 충격이 컸는지 광서혁은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그녀와 요원들이 대련장을 빠져나가는데도 망부석처럼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떠나가는 인파 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광서혁에게 다가왔다.
“저,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씨발.”
툭-!
광서혁은 부하 요원들을 어깨로 밀친 뒤 도망치듯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본부 요원들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 * *
심장 포식자 사건이 마무리되고 2주가 흘렀다.
정도현은 권하율의 신원 보증 덕에 C구역 이주 신청에 성공했고 시험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반인은 거금을 내고 관리국이 제시한 조건에 부합하는지 심사하고 끝나지만, 플레이어는 인성 및 실력을 꼼꼼히 테스트했다.
80레벨을 넘겼다고 다 받아 줄 순 없었으니까.
기껏 받아 줬더니 레드 플레이어로 전향해 범죄를 저지르면 골치가 아팠다.
안 그래도 밀항해서 넘어오는 놈들도 수두룩하니까 말이다.
정도현은 동부 관리국 면접실로 들어갔다.
“정도현 씨는 F구역 출신이시군요?”
“예.”
“뭐, 신원 보증이 됐으니 이건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인성 평가 면접관들이 순차적으로 질문했다.
누군가는 강하게 압박했고, 누군가는 회유하듯 부드러운 말투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껏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가치관과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등등.
간혹 민감한 질문들도 나왔지만 정도현은 능수능란하게 받아넘겼다.
“각성 시기가 반년을 좀 넘기셨는데 레벨이 상당하시네요. 재능이 출중하신 모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성장이 너무 빠른데, 정말 던전 공략으로 레벨을 올리신 게 맞습니까? 플레이어들을 사냥하고 다닌 거 아닙니까?”
면접관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사내가 공격적인 말투로 지적했다.
권하율한테 덤볐다 패했던 광서혁 팀장이었다.
그는 권하율이 신원 보증을 섰다길래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서 면접관을 자진했다.
‘몬스터만 잡아서 저만큼 올렸다고? 그것도 F구역 출신이?’
말도 안 된다. 분명 플레이어도 죽였겠지.
관리국의 주의 명단에 없는 걸 보면 마지노선은 넘지 않았겠지.
하지만 분명 죽였다, 그것도 꽤 많이.
“레드 플레이어가 먼저 덤벼들어서 대응하거나 사살한 적은 있습니다만, 제 쪽에서 먼저 그런 적은 없습니다.”
“한 번도 없다고요?”
“예.”
“그 말은… 킬 카운트가 0이란 소립니까?”
“예.”
너무 당당하게 대답해서 순간 혹했다.
하지만 저 정도 레벨에 F구역 출신이면 그건 불가능했다.
광서혁은 그의 새빨간 거짓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들다니.
“이번 면접은 정도현 씨의 인성과 밑바탕이 어떤지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대놓고 거짓말을 한다면 통과시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광서혁이 다른 면접관들을 선동했다.
몇몇이 고갤 끄덕였다.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니까.
“광 팀장, 질문이 좀 성급했던 거 아닌가? 대뜸 사람을 죽인 적이 있냐고 물어보면 당황해서 숨길 수도 있는 거지.”
어떤 면접관은 정도현을 두둔해 줬다.
그러자 광서혁의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옆에 있던 사람이 헛기침하며 면접관에게 눈치를 줬다.
정도현을 두둔해 주려던 면접관도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혔다.
“정도현 군, 솔직하게 말해 주겠나? 다른 플레이어를 몇 명이나 죽였지?”
“선공을 당한 경우를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안 죽였습니다.”
정도현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면접관들도 웅성댔다.
광서혁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래서 F구역 놈들은.’
F구역 출신치곤 그래도 좀 멀쩡해 보이더니 결국 쓰레기는 쓰레기였다.
끝까지 거짓말을 하다니, 우릴 바보로 아는 건가.
광서혁은 놈에게 쓴맛을 보여 주기로 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정 못 믿겠으면 제 킬 카운트를 확인해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대신 킬 카운트가 하나라도 있다면 탈락시키죠. 다들 이견 없으시죠?”
광서혁이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자 면접관들이 당황했다.
플레이어는 유용한 인재였다.
게다가 정도현은 상당히 젊다. 더 성장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런데 킬 카운트를 빌미 삼아 쫓아내겠다니.
솔직히 저 정도 레벨이면 사람 몇 명쯤 죽인 건 그리 큰 흠도 아니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딨겠는가.
‘너무 빡빡한 거 아닌가?’
‘아무리 거짓말을 했어도 그렇지.’
‘열 명 넘게 죽인 놈도 면접은 통과시켜 주는데…….’
면접관들은 떨떠름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갤 끄덕였다.
광서혁은 여기 모인 면접관들 중에서 유일한 플레이어였으니까.
발언권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었다.
“어, 난데. 카인의 눈동자 좀 들고 와. 확인할 녀석이 있어.”
광서혁은 부하 요원한테 연락해서 킬 카운트를 보여 주는 아이템을 들고 오라고 시켰다.
잠시 뒤, 부하 요원이 은빛 목걸이를 들고 내려왔다.
광서혁은 그걸 목에 걸고 정도현의 정보를 살펴봤다.
[킬 카운트: 0명]
“……?”
킬 카운트가 표시됐다.
그런데 그는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시스템이 그렇게 말했다.
광서혁은 부하 요원한테 카인의 눈동자를 돌려주며 말했다.
“…네가 한번 살펴봐.”
“예? 아, 네.”
부하 요원도 정도현의 킬 카운트를 살펴봤다. 물론 결과는 똑같았다.
“…0명인데요?”
“이제 됐습니까?”
정도현이 당당하게 묻자 광서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면 면접관들은 한시름 놨다.
이제 킬 카운트로 꼬투리를 잡아서 탈락시킬 일은 없을 터.
“그럼 문제도 없는 듯하니…….”
“면접은 이걸로 끝내도 되겠지요, 광 팀장님?”
“…….”
광서혁은 주먹을 말아 쥐곤 면접관들의 의견에 따랐다. 반박할 거리가 없었으니까.
그는 분했는지 부하와 함께 가장 먼저 면접실을 빠져나갔다.
정도현은 그의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면죄부 덕에 잘 넘어갔군.’
면죄부. 킬 카운트를 초기화해 주는 아이템.
그가 80레벨이 되고서 구매할 수 있게 된 소비 아이템이었다.
이걸 쓴 덕에 순백교 지부를 몰살시킨 흔적도 말끔히 지울 수 있었다.
‘이제 실력 평가만 남았군.’
몬스터와의 전투, 던전과 유사한 환경에서 일정 기간 생존하기, 다른 플레이어와의 대련 등등.
시험 과목들은 전투와 직결된 것들로 이뤄져 있었다.
권하율은 그의 실력이면 문제없이 통과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 녀석, 곱게 물러나려나?’
정도현은 광서혁 팀장이 좀 신경 쓰였다. 설마 심기 좀 건드렸다고 시험을 방해하진 않겠지?
‘아니, 하고도 남을 관상이야.’
F구역 출신이 불합리하게 탈락당했다고 항의한들 무시당할 터.
혹시 모르니 주의는 해야겠지.
* * *
“광서혁 팀장님, 그놈 대체 뭡니까?”
“권하율, 그년이 신원 보증 해 준 놈이다.”
“시, 신원 보증요?”
부하 요원이 깜짝 놀랐다.
그건 팀장급 요원들만 쓸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자칫하면 본인도 손해를 볼 수 있어서 계륵 같은 거였지만.
“그럼 그놈이 권하율 팀에 들어가는 겁니까?”
류진후 부팀장은 이번 작전에서 사망했다.
그 빈자리를 누가 채울지 다들 궁금해했는데, 신원 보증까지 해 준 걸 보면 부팀장으로 점찍은 게 아니겠는가?
레벨은 좀 낮아도 아직 젊으니 더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니, 알아보니 요원으로 영입한 건 아니야.”
“…예? 그럼 뒷돈이라도 받았답니까?”
“꽉 막힌 년인데 그런 거 받아 챙길 리 있겠냐.”
“아, 하긴…….”
부하 요원이 고갤 끄덕였다.
권하율 팀장이 청렴한 건 유명했으니까.
그녀에게 몇 번이나 뇌물을 찔러 넣은 공직자들이 있었는데 전부 좋은 꼴 못 봤다고 들었다.
그래서 관리국 안에서도 그녀 편을 들어주는 고위 간부가 없었다.
그나마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후광이 있어서 본부 전력으로 남을 수 있었다.
“팀원으로 스카우트한 게 아니고, 돈을 받은 것도 아니면… 설마!”
“그래, 이번 토벌 작전 때 만나서 둘이 눈 맞은 거겠지.”
“세상에…….”
부하 요원은 믿기지 않았다.
저런 놈한테 그녀가 반했다고?
얼굴은 평범하기 그지없던데. 게다가 F구역 출신이지 않은가.
재력, 외모, 출신. 뭐 하나 가진 거 없는 놈한테 신원 보증까지 해 주다니.
광서혁 말대로 사랑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짓이다.
“너, 교관으로 투입되는 애들이랑 동기라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 녀석들한테 얘기 좀 해 봐. 그놈 무조건 떨궈 버리라고.”
“예? 그래도 됩니까? 그럼 권하율 팀장이 가만있지 않을…….”
“그년이 뭐라 하면, 뭐? 내가 굽신대야 하냐?”
광서혁이 째려보자 부하 요원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쯧.”
광서혁이 혀를 찼다.
의기양양하게 굴던 정도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짜증이 확 치밀었다.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그년이나 그놈이나 재수 없는 건 똑같았다. 넌 반드시 탈락시켜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