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석화의 마녀 사건이 끝나고 며칠 뒤 이른 아침.
“유성아!”
50세가 훌쩍 넘어 보이는 사내가 문을 열며 헐레벌떡 병실로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과 팔뚝 곳곳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전부 석화의 마녀가 남긴 흔적이었다.
“삼촌…….”
“어, 어떻게 된 거냐?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남자는 강철 길드장, 강지호였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는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조카, 강유성이었다.
조카의 오른쪽 소매와 발목 아래가 허전했다.
강지호는 대형 던전을 공략하느라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
“…석화의 마녀요.”
“뭐? 그, 그럴 리가!”
그 여자는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저번에 C구역 수용소 하나가 테러로 무너졌단 얘길 들었는데.
하필 거기에 그 여자가 갇혀 있었던 건가. 예상치 못한 낭패였다.
“그 마녀한테 공격받고 살아남은 게 천만다행이구나. 정말 잘 버텼다. 마녀는 어떻게 됐니?”
도주했다면 자신에게 복수하러 찾아올 터. 강지호는 애써 불안함을 감췄다.
“…그 자식이 죽였어요.”
“죽였다고? 그 자식이 누군데?”
“이거 좀 보세요.”
강유성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어 SNS에 업로드된 동영상 하나를 보여 줬다.
영상을 재생하자 어떤 남녀가 나타났다.
“……!”
3분 안팎의 짤막한 영상. 그러나 거기에 담긴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강유성과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와 석화의 마녀가 일대일로 맞붙었다.
그런데 남자 쪽은 밀리긴커녕 오히려 그녀를 밀어붙였다. 강지호의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무슨……?!”
움직임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영상 속 남자는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다. 그가 애지중지했던 조카보다 훨씬 더.
“유성아, 이 남잔 대체 누구냐?”
강지호는 수천 년 전 고대 문명의 흔적이라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흥분했다.
반면에 강유성은 며칠 전의 치욕이 떠올라 이를 갈았다.
“정도현이란 놈이에요.”
“…정도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얼굴 역시 본 적 없다.
이런 실력자가 D구역에 있었으면 당연히 그에게도 보고가 올라왔을 텐데.
혹시 레벨이 낮아서 걸러 낸 걸까?
“레벨은?”
“싸울 땐 저랑 똑같았어요. 그 여자 죽이고 나선 2레벨이 더 올랐고요.”
82레벨. 낮은 레벨은 아니다.
하지만 석화의 마녀를 상대로 이런 싸움을 펼칠 수 있다니.
착용한 장비들은 상당히 좋아 보인다.
‘전부 에픽 등급이군.’
그렇지만 백승아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강지호도 그때 죽을 뻔했으니까.
그녀의 남동생을 인질로 붙잡지 않았다면 그날 싸움은 그가 졌을 것이다.
‘이 녀석, 엄청난 물건이야.’
반드시 우리 길드로 데려와야 한다.
그나저나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왔지?
혹시 이 녀석도 C구역에서 탈옥한 레드 플레이어가 아닐까.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강유성이 말했다.
“그 녀석, F구역 출신이에요.”
“…뭐? F구역? 말도 안 돼!”
“정보 길드 통해서 알아낸 확실한 정보예요.”
F구역 출신은 쓰레기 소굴이나 마찬가지다.
상위 구역에서 태어난 자들은 그렇게 배우고 자라 왔다.
출신지에 별생각 없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드물었고, 대부분은 그걸로 차별했다.
강유성과 강지호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으음.”
강지호는 정도현의 전투를 빤히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탐난다.
F구역 출신인 게 조금 흠이지만 그것 때문에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삼촌? 삼촌! 내 말 듣고 있어?”
“…어? 뭐, 뭐라고 했어?”
“그 새끼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됐다니까요!”
“뭐?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강유성이 그때 상황을 설명하며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백승아가 그를 공격할 때 정도현은 물러서서 빤히 구경만 했다.
정도현이 바로 나섰다면 팔다리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왜 너랑 같이 안 싸워 줬는데?”
“그, 그거야… 절 미끼로 써서 그 여자 힘을 빼려던 거겠죠. 그 치졸한 새끼!”
강유성은 찔리는 게 있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강지호는 그 말에 순순히 납득이 안 갔다.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백승아가 수용소로 들어간 지 십 년이 훌쩍 지났다. 그런데 예전보다 더 강해졌다.
물론 그녀의 나이를 고려해 보면 지금이 전성기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용소에서 십 년 넘게 썩었는데 저만큼 성장한 건 좀 이상했다.
‘투견으로 살았나 보군.’
상위 구역에선 죄수나 돈이 궁한 플레이어들끼리 싸움을 붙여 투기장을 연다고 하던데.
그녀도 그간 투견처럼 싸우고 살아남은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레벨도 상당히 올랐을 거고.
‘이젠 나도 못 이기겠는데.’
그녀에 비해 이쪽은 전성기가 지나간 지 한참 됐다.
십여 년 전에 싸웠을 때도 버거웠는데 지금은 아예 가망성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정도현 혼자 쓰러트렸다.
물론 그도 크게 다쳤지만.
“이 남자는 몸 상태 괜찮냐?”
영상 끝부분쯤에 정도현의 육체 일부가 돌로 변했다.
보아하니 백승아가 숨겨 둔 패를 꺼낸 것 같았다.
던전 공략 건으로 때마침 자릴 오래 비워서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조카가 아니라 자신을 노렸을 터.
지금의 그녀와 마주쳤다면 그는 쪽도 못 쓰고 당했을 것이다.
“하, 열받지만 그 새낀 멀쩡해요.”
“멀쩡하다고? 어떻게?”
“어디서 났는진 몰라도 그놈한테 성수가 있었어요.”
“…성수?”
그 말에 강지호는 영상의 마지막 부분을 천천히 돌려 봤다.
사실이었다.
어떤 여자가 달려와 주저앉은 그를 부축해 줬다.
힘겹게 일어선 정도현이 인벤토리에서 유리병 형태의 아이템을 꺼냈다.
직후 영상 화면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유리병의 실루엣이 비친 건 불과 1초 내외. 하지만 강지호의 눈을 속이진 못했다.
‘상급 성수다. 저 귀한 걸 어떻게?’
그도 십여 년 전에 석화된 육신을 고치고자 상급 성수를 구했었다.
그때 본 성수의 형태와 크기가 완전히 일치했다.
F구역 출신이 상급 성수를 갖고 있다니, 이상했다.
교단이 상급 성수를 순순히 내어 줄 리 없는데.
자신도 인맥을 동원해서 겨우 받아 냈지 않던가. 강지호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삼촌, 저 이대론 억울해서 못 살겠어요! 그 자식 인생도 좇되게 해 주세요.”
강유성은 마음 같아선 정도현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
그러니 평소처럼 삼촌한테 대신 처리해 달라고 떼를 썼다.
조카의 요구에 강지호는 곤란했다.
분명 정도현은 조카를 장애인으로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일조했다.
하지만 이쪽 업계에서 재능 있는 사람은 일정 선만 넘지 않으면 전부 용서가 된다.
‘그 녀석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정도현이 백승아와 바로 맞붙지 않았던 건, 그녀의 기량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조카가 저렇게 된 건 정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해야지.
“교단에 신고해 버리면 안 돼요? 그 녀석이 상급 성수를 빼돌렸다고 말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텐데…….”
“일단 녀석을 만나보마.”
조카의 말에 강지호는 좋은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정도현을 구슬릴 방법이 생각났다.
* * *
[강지호] [LV.87]
“강철 길드 대표 강지호일세. 만나서 반갑네.”
강지호는 곧장 정도현을 찾아갔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건 결례였지만, 강지호는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도현의 가치를 알아보고 다른 길드에서 접촉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만 했다.
“석화의 마녀랑 싸우던 영상, 잘 봤네. 아직 젊은데 여러모로 대단하더군.”
“감사합니다.”
정도현도 동영상에 대해선 한규리한테 전해 들었다.
그가 전투하던 모습을 현장의 누군가가 휴대폰으로 찍어서 SNS에 올렸다고.
그 영상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이곳저곳 퍼졌다.
상대는 과거에 제법 악명을 떨친 레드 플레이어고, 정도현은 얼굴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 두 가지 요소가 적절히 맞물리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런데 영상 마지막쯤에 인벤토리에서 성수를 꺼내더군, 그것도 상급 성수를.”
강지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상급 성수는 개인이 지닐 만한 물건이 아니야. 도현 군은 그걸 어떻게 입수했지?”
“대답하지 않으면 어쩌실 겁니까?”
“무력을 써서라도 들어야지.”
정도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강지호가 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일세. 싸우는 걸 보니 나보다 한 수… 아니, 몇 수 위더군.”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였습니다.”
정도현이 겸양을 떨자 강지호는 더더욱 그가 마음에 들었다.
입에 발린 말일지라도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철부지 조카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대중은 강유성보다 정도현처럼 겸손한 플레이어를 더 선호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강철 길드로 들어오게. 팀장직을 주겠네. 그리고 내 뒤를 이을 후보로도 임명하고.”
강지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신입 길드원이 받을 수 있는 조건 중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강철 길드가 어딘가? D구역 3대 길드 중 하나였다.
“자네가 상급 성수를 썼단 걸 교단이 알게 되면 곧장 출처를 알아내려 심문할 걸세.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거든.”
“그렇군요.”
“우리 길드에 들어오면 내가 책임지고 중재해 주겠네. 실은 D구역을 담당하는 주교랑 내가 잘 아는 사이거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강철 길드에 들어갈 마음은 없습니다.”
“…뭐?”
강지호가 눈을 부릅떴다.
팀장 직책에 다음 길드장 자리도 노릴 수 있게 지원해 주겠다 했는데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한다고?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감이 안 오는 건가.
“혹시 이전에 다른 길드랑 협상을 했나?”
영상을 본 다른 길드에서 먼저 접촉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대형 던전에 있느라 며칠 늦었으니까.
파도나 달빛 길드에서 그를 영입하려 시도했을지 모른다.
“다른 길드에서 연락이 오긴 했지만 전부 사양했습니다.”
“…혹시 우리 강철 길드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나?”
“예, D구역 3대 길드라 들었습니다.”
“그래, 그중에서도 우리가 선두 주자지.”
강지호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달빛 길드는 서서히 침몰하는 배였다.
파도 길드는 3대 길드로 올라선 지 얼마 안 됐다.
그가 이끄는 강철 길드야말로 명실상부 D구역 최강의 길드였다.
“날 따라오면 후회하지 않을 걸세.”
“죄송합니다. 전 D구역에 계속 머무를 생각이 없어서요.”
“설마 C구역 진출을 노리는 건가? 그랬군. 그 마음 잘 아네. 하지만 관두는 게 좋아. 나도 자네만 할 땐 야심을 품고 도전했었지. 거기서 호되게 당했지만.”
C구역은 자네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강지호는 훈계하듯 말했다.
“거긴 자네보다 강한 플레이어들이 널렸어. 괜히 욕심냈다간 죽을지도 모르네.”
여기 있으면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데, 뭐 하러 더 올라가려 한단 말인가.
F구역 태생이라 그런가, 혈기만 앞서고 생각이 너무 짧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거나 불구가 됐겠군.’
강지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자화자찬했다.
정도현은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파도 길드에선 제 결정을 존중해 주던데, 강지호 길드장님은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까?”
“쯧, 파도 길드 놈들. 그건 존중이 아니라 방임이야. 자네가 올라가면 잘못될 게 뻔한데 그냥 놔둬서야 되겠는가? 초면에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내 아들 같아서 이러는 걸세.”
강지호는 그를 놔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정도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좋게 말해 줘도 못 알아먹으니 제대로 말해 주는 수밖에.
“길드장님.”
“그래, 편히 말해 보게.”
“늑대 새끼가 어떻게 개 밑으로 들어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