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보, 보스!”
“괜찮으십니까!”
윤우빈이 공격당하자 부하들이 식겁했다. 몇몇은 무기를 꺼내고 심정환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자 정도현이 마음에 안 든단 말투로 말했다.
“윤우빈, 부하 교육 제대로 안 시켰냐?”
“죄, 죄송합니다! 야, 이 새끼들아, 당장 무기 내려!”
벽에 처박혔던 윤우빈이 황급히 소리쳤다. 부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정도현이 80레벨이긴 해도 윤우빈은 82레벨.
정면으로 붙으면 우리가 훨씬 강할 텐데 왜 굽혀야 한단 말인가? 뭐 약점이라도 잡혔나.
“허튼짓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윤우빈은 부하들에게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안 그러면 싹 다 죽을지도 모르니까.
* * *
윤우빈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복날에 개 잡듯이 실컷 두들겨 맞았다.
만신창이가 된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끙끙댔다.
“으으…….”
“형, 더 때리면 진짜 죽을 거야.”
“후… 알았어.”
정도현이 적당히 하라고 말리자 심정환은 아쉽단 얼굴로 손을 탁탁 털었다.
그래도 속이 좀 후련해졌다.
고문이나 다름없었던 매질이 끝나자 윤우빈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 어째서… 절 살려 주는 겁니까?”
조롱이나 도발하는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가 한 짓을 떠올리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을 텐데.
겨우 이 정도로 용서될 리 없었다.
윤우빈의 질문에 심정환은 솔직히 답했다.
“나도 마음 같아선 확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럼 브라더가 곤란해지거든. 한은성 팀장이 너한테 복속됐다며? 그래서 살려 두는 거야.”
“…그, 그런 이유로 복수를 포기한다고?”
“브라더가 내 눈을 고쳐 줬거든. 이 정돈 양보해 줘야지.”
심정환은 마치 자식 자랑하는 부모처럼 굴었다.
“자, 이거 써.”
정도현은 중급 회복 포션을 적선하듯 휙 던져 줬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포션을 쓰니 고통이 한결 가셨다.
윤우빈이 비척대며 일어서려 하자 심정환이 차갑게 말했다.
“무릎은 꿇고.”
“…예.”
윤우빈은 사정을 모르는 부하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더 추락할 자존심도 없지만 진짜 죽고 싶을 만큼 굴욕적이었다.
정도현은 상석에 가서 앉더니 다릴 척 꼬았다.
“윤우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마, 말씀만 하십쇼! 누굴 처리하면 됩니까? 한은성, 그 새끼 슬슬 처리할까요?”
“아니, 걘 그냥 놔둬. 형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게 더 고역일걸.”
정도현은 그렇게 말하곤 길드원들을 쭉 쳐다봤다.
윤우빈은 부하들에게 전부 나가라고 명했다.
수십 명이 아지트를 우르르 빠져나가자 금세 조용해졌다.
정도현은 핵심만 말했다.
“삼 일 뒤에 해방단 간부들이랑 전면전을 치를 거야.”
“…예? 해, 해방단이요?”
“너도 좀 도와줘야겠다.”
정도현의 폭탄 발언에 윤우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 미친 새끼. 해방단이랑은 왜 싸우는 건데?
정도현은 독심술이라도 익힌 것처럼 이어서 말했다.
“자세한 이유는 알 필요 없고. 너랑 정환이 형, 이렇게 둘이서 한 팀이야. 둘이서 간부 한 놈만 맡으면 돼. 쉽지?”
가해자랑 피해자가 한 팀이라니. 대체 왜?
그건 심정환도 궁금했는지 이유를 물어봤다. 정도현은 이렇게 말했다.
“팀원과 함께 싸울 땐 서로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잖아.”
“음, 그건 그렇지?”
낯선 이나 손발이 안 맞는 사람이랑 편을 먹고 싸우면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
“팀원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싸우는지 잘 알아야 유리하단 건데. 둘은 서로 목숨 걸고 싸워 봤잖아?”
“아.”
얼추 일리는 있었다.
둘은 과거에 진검승부를 했었다.
그러니 전투 방식을 얼추 기억한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팀을 짜는 것보단 호흡이 잘 맞을 터.
납득은 간다. 그래도 원수랑 손잡고 싸우라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그래. 형이 좀 이해해 줘.”
“뭐, 어쩔 수 없지, 브라더 부탁이니까.”
이번 작전은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다.
실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절대 배신하지 않아야만 했다.
해방단이랑 싸우라고 하면 보통은 미쳤냐면서 곧장 발을 뺄 테니까.
정도현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삼 일 내에 구하라니.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게 최선이다.
“…저희가 맡아야 할 간부는 레벨이 몇입니까?”
“87.”
“…예? 아니! 그런 놈을 저희 둘이서 죽이라고요? 어떻게 죽입니까?”
정도현은 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몸만 오라 말했다.
“난 동부 지역에 갔다 올 거니까, 둘이서 미리 호흡 좀 맞춰 보고 있어.”
* * *
삼 일이 지났다. 회담장에 먼저 도착한 건 D구역을 관리하는 간부들이었다.
남자 간부가 한규리를 보며 이죽댔다.
“엔지니어의 긴급 호출을 왜 무시했지, 관측자?”
“죄송해요. 그동안 급한 사정이 있어서 미처 받지 못했습니다.”
“급한 사정? 우린 골리앗이 사망한 줄 알고 늦은 새벽까지 계속 회의했다! 그것보다 더 급한 게 뭐가 있지? 어디 말해 봐라!”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하, 어이가 없어서.”
D구역 간부는 모처럼 건수를 잡자 꽉 붙들고 늘어졌다.
동료를 대하는 것치곤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보다시피 한규리는 간부들에게 썩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녀의 전투 능력이 보잘것없으니까.
그렇다고 엔지니어처럼 조직에 큰 도움을 주는 개인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사이코메트리」는 정보 수집에 도움이 될 뿐, 없어도 큰 문제는 없었다.
D구역 간부가 으르렁대며 몰아붙였다.
“그때 뭘 하고 있었는지 똑바로 설명 못 하면 다들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모두 모이면 설명하죠.”
한규리가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혀를 찼다.
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길래 긴급 호출까지 무시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진짜 스파이인 거 아냐?’
엔지니어가 했던 말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죽었던 간부들도 그녀와 가까운 사이였지 않은가?
퍼펫과 불멸자. 공교롭게도 그 둘은 정도현한테 죽었다. 거기다 관측자와 아주 친했었다.
그게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관측자, 너 정도현이랑은 무슨…….”
D구역 간부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캐물어 보려던 순간.
끼익!
문이 열리며 C구역 간부들이 들어왔다.
D구역 간부와 한규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인사했다.
“뭐야, 어떻게 알고 회담에는 나왔네?”
“관측자, 어떻게 된 거야?”
“연락 안 받길래 당한 줄 알았잖아.”
한규리를 무시하는 건 C구역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질책에 그녀는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꼴 좋군.’
D구역 간부는 그 광경을 보며 입꼬릴 비틀어 올렸다.
예전 같았으면 퍼펫과 불멸자가 감싸 줬겠지만 이제 그녀를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보다 훨씬 약해 빠진 주제에 동급 대우를 받는 게 쭉 불만이었는데 속이 다 시원했다.
“관측자의 처벌 건은 골리앗이 오고 난 뒤에 찬찬히 정하자고.”
엔지니어가 상황을 중재했다.
그녀를 제외한 간부들이 그 말에 고갤 끄덕였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골리앗과 정도현 쪽으로 넘어갔다. 엔지니어가 말했다.
“정도현, 그 녀석이 골리앗을 한 번 쓰러트렸다니, 믿기지 않아.”
“그보다 우린 골리앗한테 개인 특성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고.”
“맞아! 같은 편한테도 숨기다니, 너무한 거 아냐?”
골리앗의 개인 특성은 보스와 해방단 초창기 멤버만 알고 있었다.
초창기 멤버는 이제 골리앗과 엔지니어 말고는 없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관리국과 싸우다 전부 죽었다.
“이해 좀 해 줘. 그 녀석 능력 특성상 알려져서 좋을 게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맞아. 우린 다 공개했는데.”
“다들 진정해. 혹시 모르잖아? 이 안에 배신자가 있을지.”
엔지니어가 그렇게 말하며 한규리를 흘끔 쳐다봤다.
바로 그때, 회담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골리앗과 정도현이었다.
“오, 드디어 주인공이 오셨구만.”
‘저 녀석이 정도현인가.’
‘생긴 건 되게 평범하네.’
‘각성하고 반년 정도밖에 안 됐는데 80레벨이라니.’
‘대체 어떤 특성이 있길래 저리 빠르게 성장한 거지?’
간부들은 호기심과 경계심이 반씩 섞인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다들 정도현한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D구역 간부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어? 골리앗 씨?”
“왜 그러나?”
“레벨이 왜… 88로 줄었습니까?”
그 말에 다른 간부들도 정도현한테서 눈을 떼고 골리앗을 쳐다봤다.
정말이었다.
골리앗의 원래 레벨은 91.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골리앗은 고작 88레벨이었다.
“뭐, 뭐야?”
“레벨이 줄어들 수도 있는 건가?”
“그, 개인 특성의 페널티 아냐? 원래 강한 능력일수록 제약이나 리스크도 크니까…….”
간부들이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웅성거렸다. 그때, 엔지니어가 말했다.
“아니, 골리앗의 대가는 수명이야. 한 번 죽을 때마다 수명이 1년씩 줄어들지.”
골리앗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와 골리앗이 알고 지낸 세월만 30년이 넘는다.
그동안 엔지니어는 한 번도 골리앗의 레벨이 줄어든 걸 보지 못했다.
그러니 단언할 수 있었다.
“넌 누구냐. 진짜 골리앗은 어딨지?”
엔지니어의 질문에 골리앗은 말없이 정도현을 쳐다봤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묻는 것 같았다.
정도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작해.”
말 끝나기 무섭게 간부들 주변에서 다수의 마력이 느껴졌다.
은신용 에픽 아이템, 암흑의 눈동자로 몰래 들어온 자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부 정도현이 데려온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런, 씨……!”
“너흰 뭐야!?”
간부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혼비백산하며 그들의 기습을 막아 냈다.
콰광! 쾅!
원탁이 부서지고 회담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젠장!”
전투 능력이 없었던 엔지니어는 급히 호신용 마도구를 발동했다.
그의 팔찌가 빛나며 회색빛 보호막이 펼쳐졌다.
그가 따로 개조해서 어지간한 충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분명 그럴 터였다.
“……!”
콰직-!
도핑제를 먹은 정도현이 보호막을 힘껏 내리찍었다.
그러자 금이 쩍 갈라지며 칼날이 파고들었다.
검기가 엔지니어의 머리 위에서 딱 멈췄다.
“흐, 흐억……!?”
하마터면 그대로 머리가 쪼개질 뻔했다.
치지직!
보호막이 재생하면서 칼날을 밀어내 주지 않았으면 말이다.
겨우 목숨을 건진 엔지니어가 다급히 주변에 도움을 청했다.
“골리…….”
습관적으로 파트너의 이름을 부르려던 엔지니어. 그러나 골리앗은 여기에 없었다.
엔지니어는 급한 대로 다른 간부들을 찾았다.
“사, 살려 줘! 이 자식 좀 어떻게 해 봐!”
그의 외침에 창을 쥔 간부가 달려왔다.
다른 간부들은 정도현이 데리고 온 플레이어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아예 벽이나 바닥을 깨부수고 다른 구간으로 이동했다.
[???] [LV.87]
“이 자식! 당장 떨어져라!”
채앵-!
87레벨의 간부가 정도현의 급소를 노리고 창을 뻗었다.
정도현은 완벽한 타이밍에 창을 쳐 냈다. 깔끔한 패링이었다.
겨우 한 합이었지만 간부는 정도현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챘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둘은 서로를 잠시 노려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움직였다.
채재재쟁! 카앙! 쾅!
엔지니어의 눈에는 시커먼 잔상들이 마구 뒤엉키는 것처럼 보였다.
냉병기들이 부딪치면서 불똥이 튄다.
마치 타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큭!”
간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아귀가 얼얼했다.
정도현은 87레벨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든 면에서 훨씬 앞섰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강한 압박이 불어닥쳤다.
간부는 자신이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단 걸 느꼈다.
채재재재쟁!
정도현의 공세가 점차 빠르고 과감해졌다.
간부는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창을 휘저었다.
콰드득-!
그러다 회담장 바닥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다.
둘은 지하로 추락하면서도 계속해서 공방을 주고받았다.
“허억, 헉…….”
탁!
간부가 아래층에 착지하고서 숨을 헐떡였다.
반면에 정도현은 땀만 좀 흘릴 뿐, 호흡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정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뭐 해? 심법 안 쓰고. 너, 어느 방계 가문의 사생아라며?”
“……!”
간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아는 거냐?
“빨리 써. 괜히 귀족 핏줄이니 뭐니 뻗대며 자존심 부리지 말고. 그러다 나중에 후회…….”
“그 입 닥쳐라!”
정도현의 지적질에 간부가 발끈했다.
그러면서 아껴 뒀던 심법을 펼쳤다.
정도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쓸 거면서 까탈스럽게 굴긴.”
촤악-!
간부가 창을 빙빙 돌렸다. 그러자 궤적을 따라 푸른 물결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한규리가 말한 대로 물 속성의 마력을 다루는 모양이다.
“뒈져라!”
간부가 회전을 멈추곤 야구 방망이처럼 창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물줄기가 반월 모양으로 발사됐다.
콰가가각-!
회전력이 가미된 탓에 바닥을 갈아 버리며 날아온다.
‘검기의 응용기군.’
검기를 상대에게 주문처럼 쏘아 내는 응용 기술, 일명 「비검기」.
80레벨에 구매할 수 있길래 정도현도 스킬북을 사서 익혔다.
냉병기가 지닌 사거리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만, 그 대가로 마력을 더 소모한다.
‘나도 한번 써 볼까.’
샤악-! 콰가가각!
정도현도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상대방이 날린 것처럼 반월 모양의 검기가 쏘아졌다.
다만 마력의 속성이 전격이었다.
“……!”
벼락의 검기가 물의 마력을 산산이 찢어발겼다.
간부는 기겁하며 몸을 내던져 겨우 피했다. 그가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그가 「비검기」를 성공한 건 플레이어로 각성하고서 5년이 지났을 때였다.
보통 플레이어들 기준으론 상당히 빠른 편이라고 들었다.
‘그 어려운 걸 저 녀석이 어떻게?’
각성한 지 반년밖에 안 된 놈이 검기를 날려 보낼 줄 안다고?
그가 태어났던 방계는 물론이고 직계 가문도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이, 이… 사기꾼 같은 새끼가! 난 그거 익히는 데만 5년이 걸렸는데!”
“꼬우면 너도 돈 주고 사든가.”
“뭔 개소리야!”
정도현은 검기를 마구 날려 댔다.
반월 모양의 천뢰격이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칼만 들었지, 마법사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