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레벨이 올랐습니다!]
쓰러트린 백승빈의 숨이 끊어졌다. 정도현은 아쉬움에 입술을 핥았다.
10레벨이 더 높은 상대랑 혼자 싸워 이겼는데도 1레벨밖에 안 올랐다.
갈수록 레벨 업 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정도현이 칼을 집어넣으려 할 때. 근처에서 소란이 일었다.
“컥!”
“티, 팀장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
촤악! 서걱!
백승빈이 쓰던 검을 쥔 한은성이 돌연 주변 사람들을 베었다.
요원과 용병들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피와 비명을 뱉으며 바닥에 나뒹구는 사람들.
남은 이들이 무기를 겨누자 한은성은 당황한 얼굴로 뭐라 변명했다.
“아,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뭔 개소리야!”
“당신 미쳤어?”
“내 몸이 멋대로…….”
한은성이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에 정도현의 얼굴이 들어왔다.
『저놈을 죽여! 그럼 더 큰 힘을 얻게 해 주마!』
그의 머릿속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윙윙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저항하려 들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검을 놓고 싶어도 칼자루를 쥔 손이 꿈쩍도 안 했다.
실에 묶인 마리오네트처럼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다들 물러서세요.”
정도현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그의 지시에 한은성을 둘러쌌던 이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정도현과 마주 선 한은성. 뇌령검의 극렬한 분노와 광기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죽여, 죽인다…….”
이성이 날아가 반쯤 풀려 버린 눈. 얼굴에선 살기가 넘실거린다.
뒤늦게 진실을 눈치챈 정도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검이 문제였네.”
그가 방금 처치한 백승빈도 단지 뇌령검에 조종당했던 피해자일 뿐.
결과적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셈이었다. 정도현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남의 몸 뺏어서 노니까 재밌냐?”
“…닥쳐라!”
정도현이 역겹단 눈으로 보자 한은성의 육신을 장악한 뇌령검의 혼이 소리쳤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파지직-!
시뻘건 벼락이 뇌령검의 칼날을 타고 휘몰아쳤다.
아까 상대했던 백승빈의 천뢰격보다 기세가 훨씬 강맹했다.
숙주의 레벨과 마력이 강해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기생충 같은 놈이.”
“그 입 닥치라니까!”
정도현의 비꼼에 녀석이 발끈해서 달려들었다.
콰과곽-!
칼날에 맺힌 우레가 바닥을 긁으며 고랑을 만들었다.
“뒈져라!”
파지직-!
서로의 검이 충돌했다. 충격과 함께 붉은 뇌전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그중 일부는 정도현의 팔뚝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저릿한 감각이 말초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오래 싸우면 위험하겠어.’
방어구와 뇌령심법을 익혀서 전기 내성을 올려서 당장은 버텨지지만 계속 받아 내자니 부담스러웠다.
퍽-!
정도현은 발차기로 상대를 밀어내 대치 상태를 끊었다.
복부를 걷어차여 몇 걸음 밀려난 뇌령검의 혼은 오히려 씩 웃었다.
“흐흐. 이젠 오래 못 버티겠지?”
천뢰격은 막아 내도 몸속으로 뇌기가 조금씩 침투한다. 그러다 내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도현은 전기 내성이 너무 높아서 이전 전투에선 내상을 입지 않았다.
게다가 레벨을 능가하는 움직임과 완숙한 검기까지.
천뢰격이 안 먹히자 뇌령검의 혼은 완전히 농락당하다 패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크하핫! 죽어, 빨리 뒈지란 말이다!”
한은성의 몸으로 천뢰격을 쓰자 백승빈 때보다 위력이 크게 증가했다.
물론 한은성은 뇌령심법을 익히지 않아 정도현처럼 몸속에 안정화된 뇌기가 없었다.
그래서 뇌령검의 혼은 자연의 기운을 억지로 몸속에 가둔 뒤 뇌기처럼 써먹었다.
제대로 정제하지 않은 뇌기를 다루니 당장은 멀쩡해 보여도 조금씩 몸에 부담이 쌓일 터.
저리 무식하게 천뢰격을 써 대면 한은성은 폐인이 되거나 죽을 것이다.
‘상관없다.’
뇌령검의 혼은 한은성의 몸이 망가지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에게 굴욕감을 준 정도현만 죽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후욱-!
그가 숨을 삼키며 마력에 강제로 뇌기를 부여했다.
숙주의 몸이 장작처럼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쾅! 콰과광!
두 검기가 충돌할 때마다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윽!”
뒤로 밀린 정도현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금의 격돌로 내상을 입었는지 그의 입술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걸 본 뇌령검의 혼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직 부족해. 네놈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계속 괴롭혀 주마!”
정도현은 흘러나온 피를 닦아 내며 따졌다.
“걘 뇌령심법도 안 익혔는데 너무 막 굴리는 거 아니냐?”
“이 남자가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네놈만 쳐 죽일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
타앙-!
뇌령검의 혼이 그렇게 외치며 다시 달려들었다.
정도현은 연이은 전투로 마력이 거의 바닥났다. 검기가 흐릿해졌다.
검기가 사라지면 천뢰격을 막는 것도 벅찼다.
놈을 쓰러트리려면 체력과 마력을 회복해야 한다.
“서아린.”
정도현의 부름에 서아린이 기다렸단 듯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
뇌령검의 혼이 갑자기 난입한 그녀를 째려봤다. 끽해야 52레벨.
“아둔한 계집아, 주제를 알아라!”
꽈르릉-!
그는 천뢰격으로 구불구불 휘어진 서아린의 단검을 쳐 냈다. 그녀는 곧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리라.
카앙-!
뇌령검과 단검이 충돌했다.
“……?”
서아린은 비명을 지르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천뢰격을 받아 낸 것치곤 표정이 평온했다.
“어떻게…….”
뻐억-!
그녀가 그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뇌령검의 혼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가 주춤하던 사이, 서아린은 자세를 바짝 낮춰 용수철처럼 몸을 수축했다.
그녀가 땅을 박차며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파바바밧-!
단검과 발차기가 마구 날아든다. 뇌령검의 혼은 그걸 받아 내기 급급했다.
“뭔……!”
그녀의 공격은 빠르면서도 묵직했다.
순수하게 힘만 놓고 보면 정도현보다 훨씬 강했다. 검을 쥔 팔이 저릴 정도.
서아린의 신체 능력은 52레벨 수준을 아득히 벗어났다.
“……!”
다시 보니 그녀의 머리 위에 이상한 것이 달려 있었다.
쫑긋!
까딱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까만 고양이 귀. 허리 뒤엔 꼬리가 갈대처럼 살랑거렸다.
「묘인화」를 쓴 서아린은 버프 효과로 일시적이지만 신체 능력이 급상승한다.
피지컬로는 정도현마저 한참 앞설 정도.
주룩!
서아린의 입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천뢰격의 뇌기가 침투해 내상을 입었단 증거.
하지만 이 정도 내상으론 그녀에게 제동을 걸지 못했다.
할짝!
그녀가 입술에 묻은 피를 핥으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녀는 천뢰격이 무섭지 않은지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뭐, 저딴 년이 있어?’
뇌령검의 혼은 괴물 보듯 서아린을 쳐다봤다. 아까 맞은 아래턱이 욱신거렸다.
얻어맞기 직전에 뒤로 도약해서 충격을 대부분 흘렸는데도 이 정도라니.
정통으로 맞았으면 그대로 턱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카가가강-!
서아린은 무식하게 튼튼한 몸으로 천뢰격의 뇌기를 견디며 단검을 휘둘렀다.
플레이어가 아니라 몬스터랑 싸우는 기분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방어뿐이었다. 그렇게 둘이서 수십 초간 공방을 주고받았을 때.
“이제 됐어.”
“……!”
서아린이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집요하게 달라붙다 정도현의 지시를 듣고선 물러났다.
서아린이 시간을 끌어 줄 동안 정도현은 중급 포션을 몇 개나 사용했다.
내상은 물론이고 소진했던 마력까지 몽땅 회복했다.
파스스-!
전보다 한층 선명해진 푸른 검기가 뇌령검을 향해 날아들었다.
“네놈!”
정도현이 회복한 걸 뒤늦게 깨달은 뇌령검의 혼. 그는 천뢰격을 힘껏 휘둘렀다.
파지직-!
천뢰격을 막은 정도현의 표정은 전처럼 아주 평온했다.
이젠 한은성의 마력이 거의 다 떨어져서 천뢰격의 출력도 확 줄었다.
이 정도 뇌기로는 정도현의 전기 내성을 절대 뚫지 못한다.
게임으로 치자면 데미지가 1씩 들어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슬슬 너도 힘들지? 가뜩이나 뇌령심법을 안 익힌 녀석 몸으로 천뢰격을 쓰니까…….”
“닥쳐라! 네놈이 뇌령심법의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느냐!”
“잘 아는데.”
정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뇌령심법을 펼쳤다. 그의 호흡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뇌령검이 뭔가 깨닫곤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내 심법을……?!”
“너 숨 쉬는 거 보고 따라 했지.”
실상은 스킬북으로 심법을 완벽히 터득한 거였지만, 정도현은 일부러 거짓말했다.
그편이 녀석의 자존심을 확실히 짓밟을 수 있을 테니까. 예상대로 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말도 안 돼! 잠깐 본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닌…….”
“근데 방금 익혀서 뇌기를 못 쌓았거든? 좀 빌려 쓸게.”
파지직-!
천뢰격의 뇌기가 정도현의 검기로 빨려 들어갔다.
정도현은 포션으로 몸을 회복하면서 머릿속에 쌓인 뇌령심법의 이론을 쭉 정리했다. 그러다 상대의 마력에서 뇌기를 빼앗는 법도 알아냈다.
그는 뇌기가 어떤 건지 궁금해서 써 봤다.
하지만 뇌기를 빼앗긴 당사자는 기겁했다.
‘상대의 뇌기를 흡수하다니. 이건 10성의 영역이다! 창시자인 나조차 도달하지 못한 것을 저놈이 어떻게?’
심법은 성취와 이해도에 따라서 1성부터 10성까지 단계를 나눈다.
10성에 가까워질수록 심법을 보다 완벽히 구사할 수 있었다.
타인의 마력에서 뇌기를 갈취해 가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뇌령심법의 창시자인 그조차도 생전에 8성을 이룩한 게 고작이었다.
그는 죽어서 육신을 잃고, 자신의 무기인 뇌령검에 혼을 봉인한 상태로 수십 년을 보냈다.
그동안 뇌령심법의 이론과 깨달음을 정리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9성의 경지에 도달했건만.
정도현은 그와 검 몇 번 섞어 보곤 뇌령심법의 원리와 심득을 홀라당 빼 갔다.
심지어 원주인보다 훨씬 잘 활용했다.
“이, 이… 도둑놈의 새끼가!”
평생 이룩했던 업적을 눈 뜨고 빼앗겼다. 뇌령검의 혼이 분통을 터트렸다.
정도현은 막 빨아들인 뇌기를 자신의 검기에 녹여 냈다.
파지직-!
그의 검기가 마치 푸른 전류처럼 변했다.
“쓸 만하네. 앞으로 잘 쓸게.”
“이 개자식…….”
정도현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꽈앙-!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천뢰격과 쌩쌩한 천뢰격이 맞부딪혔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정도현의 검기가 상대의 검기를 가볍게 찍어 눌렀다.
서걱-!
한은성의 오른팔이 벼락에 뜯겨 저 멀리 날아갔다.
“끄아아악!”
팔이 잘린 한은성은 뇌령검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신만은 멀쩡했었다.
몸의 주도권만 빼앗겼을 뿐 모든 상황을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끄, 끄어어… 내, 내 팔…….”
한은성이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허전해진 어깨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결판이 나자 요원들이 다급히 그에게 달려와 포션을 뿌려 지혈해 줬다.
하지만 완전히 절단된 팔은 다시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엘릭서가 필요했다.
“젠장, 젠장…….”
오른팔만 잘린 게 아니다.
뇌령검이 몸을 함부로 굴려 댄 탓에 내부가 너덜너덜해졌다.
마력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인정할 수 없다! 내가 저딴 놈보다 못하다니!」
바닥에 떨어진 뇌령검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자신보다 뇌령심법을 더 잘 다룬다니,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파직! 파지직!
뇌령검의 혼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칼날에 뇌기가 맺히더니 그대로 산산이 무너졌다.
그걸 본 정도현이 혀를 차며 말했다.
“두 번이나 졌으면서 끝까지 추하게 구네.”
* * *
소유자한테 해를 끼치거나 역으로 지배하려 드는 아이템을 ‘저주 아이템’이라 부른다.
뇌령검이 아주 적합한 예시였다.
그 뇌령검은 파괴되었지만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저주 아이템에 홀려서 공격한 한은성.
그런 그를 제압하다 오른팔을 잘라 버린 정도현.
정황만 놓고 본다면 정당방위였지만, 문제는 그들의 출생지가 다르단 점이었다.
정도현을 불러낸 안태환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F구역 출신이 D구역 관리국 팀장의 팔을 잘랐으니 윗선에 썩 안 좋게 보인 모양이야. 그나마 이번 임무가 비밀리에 진행돼서 망정이지, 세간에 공개됐으면 당장 자네부터 잡아들였을 걸세.”
“그렇군요.”
정도현도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곤 고갤 끄덕였다.
그와 한은성은 같은 3급 시민이지만 태생이 다르다.
이유야 어찌 됐든 F구역 출신이 D구역 시민을 불구로 만들었다.
윗선에서 게거품을 물 만했다.
“물론 어느 정도 참작해 줄 걸세. 나도 온 힘을 다해 자넬 변호할 거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왜 제 편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자네 덕에 박성원의 레벨이 꽤 올랐지 않은가. 그 보답이라 생각하게.”
과연. 지금보다 박성원을 더 성장시키고 싶으니 날 도와주겠단 건가.
박성원이 강해지면 안태환의 입지도 그만큼 올라갈 테니까. 이해타산적이지만 그만큼 믿음이 갔다.
똑똑!
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부장님, 손님분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 왔나 보군. 들어오게.”
한은성 팀장의 형, ‘한은철’.
그 남자가 정도현을 직접 만나 보고 싶다며 E구역에 내려왔다.
그는 파도 길드의 간부인데, 파도 길드는 D구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규모가 크다고 한다.
문이 열리며 민규원 비서실장과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은철] [LV.81]
한은철은 정도현을 보더니 대뜸 고갤 숙이며 말했다.
“제 동생을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예?”
D구역에서 잘나간다는 양반이라 해서 원망이나 책임을 물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감사 인사를 했다. 정도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