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뭐야? 방금 어떻게 한…….”
샤악-!
불멸자의 질문에 정도현은 대답 대신 칼을 휘둘렀다.
불멸자는 신체 일부를 점액으로 바꿔 고무줄처럼 유연하게 몸을 휘어 칼날을 피했다. 아니, 피한 줄 알았다.
촤악-!
검로가 기이하게 꺾이더니 그대로 불멸자의 몸을 갈랐다.
“아악!”
불멸자가 베인 곳을 움켜쥐고 꽥 소릴 질렀다.
끽해야 열몇 살쯤 되어 보이는 애가 칼에 맞아서 우는데도 정도현은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연기해 봤자 안 통해.”
“아, 들켰어?”
쫘아악!
연약한 척 동정심을 유도했던 불멸자가 언제 그랬었냐는 듯 안면을 싹 바꿨다.
그가 점액을 부풀리며 날아드는 검을 휘감았다.
레벨 차이 때문인지 예리한 검기로도 점액 덩어리를 완전히 끊어 내지 못했다. 무기를 봉쇄한 불멸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잡았다. 이제 꼼짝 못 하겠…….”
쩌저적-!
정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코앞에서 중급 매직 스크롤, 「프로즌 스트라이크」를 꺼내 사용했다.
그들 주변으로 냉기가 휘몰아쳤다.
크고 작은 얼음 기둥들이 바닥에서 솟구치며 불멸자의 몸을 무자비하게 관통했다.
“크윽!”
관통상도 관통상이었지만 몸속으로 한기가 파고들자 불멸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급히 물러났다.
얼어붙은 점액들이 산산이 쪼개져 모래 알갱이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칼날을 붙잡았던 점액들도 주인의 곁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갔다.
정도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물러서는 불멸자를 바짝 뒤쫓았다.
서걱! 촤악! 촤좌좌좍-!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팔이 몇 번씩 움직였다. 얼어붙어서 결집도가 약해진 점액들은 전보다 수월하게 잘렸다.
“이… 비겁하게 주문 쓰는 게 어딨어!”
불멸자가 엄마한테 반찬 투정하는 아이처럼 짜증을 부렸다.
대꾸해 줄 가치도 없다.
정도현은 검무를 펼치며 계속 압박했다. 핵을 베고 또 베어도 불멸자는 죽지 않고 어떻게든 재생하며 반격했다.
‘끈질기긴 하네.’
하지만 반격 패턴이 너무 뻔했다.
전부 직선적이고 기본적인 페인트 동작조차 섞질 않는다.
‘레벨에 비해 전투 경험이 턱없이 부족해. 플레이어만 죽여 댔나?’
나이가 어리긴 해도 레벨은 무려 76.
높은 레벨에 비해서 싸우는 법을 모른다.
마치 몬스터처럼 자신의 피지컬만 믿고 무작정 들이박는 느낌이었다.
마침 능력도 슬라임처럼 변하는 거라 진짜 슬라임 보스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서걱-!
정도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불멸자의 한쪽 팔을 찢어발겼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하던 불멸자가 기회를 포착한 맹수처럼 눈을 부릅떴다.
꾸물-!
바닥에 떨어진 불멸자의 팔이 조그만 슬라임으로 변하더니 꾸물꾸물 기어가 정도현의 발목에 껌처럼 달라붙었다.
그러자 불멸자가 환호성을 질렀다.
“됐다!”
[포이즌 슬라임과 접촉했습니다.]
[중독되었습니다.]
[체력이 빠르게 감소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소폭 감소합니다.]
발목에 들러붙은 점액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몸을 슬라임처럼 바꾸는 것뿐만이 아니라 속성까지 부여할 수 있는 건가.
중독 상태에 빠진 정도현이 공격을 멈추고 거릴 쭉 벌렸다.
도망치는 그를 보며 불멸자가 킥킥 웃었다.
“도망치면 뭐, 어쩔 건데? 곧 독기가 퍼져서 죽을…….”
정도현은 보란 듯이 중급 해독 포션을 꺼냈다.
50레벨을 찍고 구매할 수 있게 된 아이템이었다. 어지간한 독은 전부 해독할 수 있다.
당연히 틈틈이 구매해 둬서 여유분은 수십 개나 있었다.
비장의 수단까지 막혀 버리자 불멸자가 입을 쩍 벌렸다.
“아, 아냐… 아직 안 끝났어!”
또 중독시키면 돼!
불멸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현은 한 번 당한 수법에 또 당해 줄 멍청이가 아니었다.
촤좌좍-!
그는 불멸자가 쏴 대는 점액 탄환을 베어 넘기며 서서히 접근했다.
그러면서 철퍼덕 소릴 내며 바닥에 떨어진 점액들도 유심히 살펴봤다.
그러다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들은 족족 찔러 없앴다.
“이, 이게…. 이건 말도 안 돼!”
기척을 죽이고 사각지대를 노려도 소용없었다.
그는 마치 온몸에 눈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뭐 저딴 괴물이 다 있어.
불멸자가 점액 탄환을 쏘아 대며 최대한 거릴 벌리려 할 때.
“꺄악!”
박성원과 맞붙던 관측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레벨은 62. 박성원보다 레벨이 무려 10이나 더 높다.
그런데 오히려 그가 그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녀가 궁지에 몰리자 불멸자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불멸자에게 있어 그녀는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싸울 때 한눈팔면 안 되지.”
“…!”
초보나 저지를 법한 실수를 범한 불멸자. 정도현이 자비 없이 모가지를 베었다.
촤아악-!
목이 반쯤 썰리며 푸른 피가 콸콸 쏟아졌다. 불멸자의 머리가 옆으로 덜렁거렸다.
푸른 피가 쏟아지자 정도현이 주춤했다.
슬라임으로 변하는 능력은 그렇다쳐도 이런 체액은 인간과 영 거리가 멀었으니까.
‘어쩌지? 누나 쪽도 얼마 못 버틸 것 같은데.’
불멸자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잘린 부위를 재생했다.
관측자가 신경 쓰여서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검기에 베일 때마다 그의 마력도 착실하게 깎여 나가고 있었다.
불사에 가까운 슬라임의 재생력도 핵이 모조리 파괴된 탓에 현격히 줄어들었다.
궁지에 몰린 불멸자. 이제 어쩌면 좋을지 몰라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을 때.
박성원과 싸우고 있던 관측자가 다급히 소리쳤다.
“공격을 멈추세요! 안 그럼 심정환이 죽습니다!”
멈칫.
그녀의 외침에 정도현의 손이 멈췄다.
‘효과가 있어.’
그의 반응에 그녀가 속으로 안도했다.
의형제를 맺었다더니 그게 정말인가 보다.
그녀와 대치했던 박성원도 눈치껏 공격을 멈추더니 몇 걸음 물러났다.
불멸자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마, 맞아! 아직 소화는 안 했으니까 꺼낼 수 있어.”
“…꺼낸다고?”
정도현은 이해가 안 돼서 눈을 가늘게 떴다. 소화한다니, 그럼 사람을 잡아먹는단 말인가?
그래, 그런 개인 특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는 존재를 같은 플레이어라고 봐도 좋은가.
플레이어보다는 몬스터에 가까운 존재 아닐까?
“심정환을 살리고 싶으시면 무기를 거둬 주세요.”
“거둔 다음엔? 얌전히 죽어 달라고?”
“아뇨,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무슨 대화?”
“저흰 해방단 소속입니다. 정도현 씨, 당신이 퍼펫을 죽였다는 건 알고 있어요.”
“…….”
해방단 소속이란 말에 정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해방단이랑 엮이기 싫어서 퍼펫을 처치한 공로도 관리국에 넘겨줬는데 곧바로 들켰다.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보단 저쪽에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가 더 중요했다.
블랙 스컬처럼 퍼펫의 복수를 하겠다며 정도현과 주변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노릴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게 빠른 성장 속도. 게다가 퍼펫보다 레벨이 훨씬 낮은데도 쓰러트렸죠.”
관측자는 그렇게 얘기하곤 한 박자 쉬었다.
“개인 특성을 갖고 계시죠?”
“그래서 뭐? 본론을 말해.”
“정도현 씨, 해방단에 들어오세요.”
“…뭐?”
설마 동료를 죽인 녀석한테 영입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당연히 복수하겠다며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너, 살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거 아냐?”
“아니에요. 저희 해방단은 능력이 있고 이해관계만 일치한다면 누구든 받아 줍니다.”
“맞아! 나도 몬스터인데 동료로 받아 줬는걸?”
“…몬스터?”
불멸자가 굳이 말해서 좋을 거 비밀까지 밝히며 그녀를 거들었다. 관측자는 한숨을 쉬었다.
정도현이 못 믿겠단 눈으로 불멸자를 쳐다봤다.
“그럼 네가 진짜 슬라임이라고?”
“응. 아, 이거 비밀이니까 남들한테 절대 말하면 안 된다, 형?”
“들어 본 적 있습니다. 도플갱어나 뱀파이어처럼 사람을 닮은 몬스터들이 인간 사회에 숨어 산다고요.”
슬라임이 저 정도 지능을 지닌 건 들어 본 적 없지만요. 박성원의 설명에 정도현은 고갤 끄덕였다.
몬스터가 인간 행세를 한다니. 그런 게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럼 심정환은 왜 건드렸지? 순순히 안 따르면 인질로 삼으려는 수작이냐?”
“아냐! 그 형 부하들이 우리 누나를 먼저 건드렸다고!”
불멸자가 억울하단 표정으로 변명했다. 관측자도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도현 씨의 뒷조사를 했다고 수하들을 보내더군요. 저희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어쩌라고.”
“…예?”
“이유야 어쨌든 너흰 인질을 잡아 놓고 날 협박하고 있잖아.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내가 순순히 따를 줄 알았어?”
정도현의 눈빛에서 적개심을 본 관측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단 표정으로 중얼댔다.
“그럼 죽일 수밖에요.”
“……?”
그녀의 발언에 정도현이 고갤 갸웃했다.
불멸자는 레벨만 높고 전투 경험이 부족해 정도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저 여자도 박성원 상대로 버티는 게 고작. 전황은 이미 이쪽으로 기울었다.
‘무슨 자신감이지?’
저 꼬맹이한테 뭔가 더 있는 건가.
정도현은 그렇게 판단함과 동시에 두 다리를 움직였다.
그의 검기가 불멸자의 머릴 향해 쏘아졌다.
푹-!
검기가 담긴 칼날은 아무런 저항 없이 쑥 들어갔다.
“……!”
그런데 단단한 바위에 꽂힌 것처럼 칼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정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꾸물, 꾸물!
불멸자의 전신이 푸른 액체로 변하더니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확 부풀었다.
정도현은 단단히 박혀 뽑히질 않는 검을 놓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에도 불멸자의 몸은 멈추지 않고 급격히 커졌다.
[오닉스 슬라임] [LV.76]
불멸자가 사람 형태를 포기하고 거대한 슬라임으로 변했다.
이름도 ‘오닉스 슬라임’이라 따로 표시됐다.
‘저게 본모습인가.’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녀석은 몸에 맞지 않던 옷을 벗어 던진 것처럼 개운한 말투로 말했다.
정도현은 슬라임의 미간에 꽂힌 +10강 롱소드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오닉스 슬라임이 깐족댔다.
『아, 이거? 안 돌려줄 거야!』
스륵.
롱소드가 슬라임의 점액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상대는 본모습을 드러냈고, 정도현은 아끼던 무기를 빼앗긴 상황.
관측자는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강력한 개인 특성을 가졌어도 이 상황까지 뒤집진 못할 거라고.
『본모습으로 싸우는 건 거의 1년 만이야.』
오닉스 슬라임은 그렇게 말하곤 몸을 바짝 수축했다. 그러더니 풀쩍 뛰어올라 정도현 일행 쪽으로 낙하했다.
시커먼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저거에 깔리면 죽는다.
정도현과 박성원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려 찢어졌다.
쿠웅-!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짓눌려서 납작해지는 건 겨우 면했다.
쿠구궁-!
오닉스 슬라임이 낙하하자 건물과 지축이 마구 흔들린다.
박성원은 순간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자빠질 뻔했다.
『자, 몸풀기는 이제 끝이야.』
오닉스 슬라임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번엔 점액들이 성게의 가시처럼 변하더니 쏘아졌다.
푸부북-!
정도현과 박성원은 미칠 듯이 쏟아지는 점액 가시를 쳐내거나 피했다.
그때, 정도현이 인벤토리에서 기다란 창을 꺼내 힘껏 던졌다.
푹-!
오닉스 슬라임의 덩치가 워낙 커서 대충 조준해서 던져도 맞았다.
하지만 투창은 작은 생채기만 났을 뿐 별 피해를 주지 못했다.
창에 맞은 오닉스 슬라임은 간지럽다며 깔깔 웃었다.
푹! 푸욱-!
정도현은 포기하지 않고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며 창을 던졌다.
『아하핫! 소용없대도?』
스르륵!
몸 곳곳에 박힌 수십 개의 창이 롱소드처럼 점액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창날에 오러를 싣지도 않으니 사람으로 따지면 주삿바늘로 피부를 콕콕 찌르는 거나 마찬가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응?』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오닉스 슬라임의 점액 일부가 흐물거리더니 피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게다가 몸속이 타들어 가듯 뜨거워졌다.
『이게 뭐야? 아윽!』
“아무거나 주워 먹으니까 배탈 나지.”
『뭐, 뭐라고?』
정도현이 던진 창은 그가 슬라임 던전에서 만들어 둔 특수한 무기였다.
“창날에 독을 발라 뒀거든.”
『도, 독이라고?』
게다가 날이 금방 부식될 정도로 강렬한 맹독을 썼다.
물론 인벤토리에 넣어 두면 시간이 멈추기에 무기도 손상되지 않는다.
각설하고 드디어 놈의 몸속에 독이 퍼진 것이다.
『이깟 독… 흡수하면 그만이야…….』
포이즌 슬라임의 특성은 독의 성분을 분석한 뒤 흡수해 자신의 독으로 쓸 수 있었다.
그러니 이깟 독 공격에 내가 무너질 리 없다. 그렇게 생각했던 오닉스 슬라임은 독을 분석하려다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독이 왜…….』
“수십 종류의 독을 썼지. 하나만 쓰면 금방 해독할 거 아냐.”
독을 일일이 분석해 흡수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마치 벌레들이 몸속을 파먹는 듯한 고통에 오닉스 슬라임이 버둥댔다.
녹아서 줄줄 흘러나온 점액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치이익-!
몸에서 떨어져 나온 점액들이 독기 때문에 눈처럼 녹아 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뒤로 물러나 지켜보던 관측자가 당황했다.
자신의 패배를 직감한 오닉스 슬라임은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누나, 누나라도… 빨리 도망쳐!』
그 말에 관측자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달렸다. 그녀가 남아 봤자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도망치던 그녀를 향해 정도현이 창을 힘차게 던졌지만, 오닉스 슬라임이 제 몸을 방패처럼 사용해 막아 냈다.
쨍그랑-!
오닉스 슬라임이 시간을 벌어 준 덕에 그녀는 창문을 깨고 건물 밖으로 도망쳤다.
『아, 으으…….』
오닉스 슬라임의 육체가 한계에 달했다. 몸이 아이스크림처럼 줄줄 녹아내렸다.
푸화악-!
놈이 삼켰던 무기들과 속옷 차림의 심정환이 점액 속에서 튀어나왔다.
정도현은 심정환이 숨을 제대로 쉬는 걸 확인하곤 +10강 롱소드를 주워들었다.
칼날의 상태를 점검해 본 그가 안도했다.
‘날이 멀쩡해서 다행이야.’
“성원 씨, 이 녀석이 깰 때까지 옆에 있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무기를 되찾은 정도현은 박성원한테 그리 말하고 곧장 도주한 관측자를 뒤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