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1원 상점 - 33화
파스스-!
체내에서 피처럼 돌아다니던 마력이 검신을 따라 검극으로 물결치듯 흐른다.
검을 휘두르자 검로에 푸른 잔상이 남았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검이랑 팔이 하나로 합쳐진 것 같네.’
검의 길이만큼 팔이 늘어난 느낌이다.
그런데도 어색하거나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했다.
“저기, 도현 님. 설마 한 번 듣고 해보니까 되네. 뭐 그런 거 아니죠? 원래 할 줄 알았는데 여태 안 쓴 거죠?”
“쓸 줄 알았으면 너랑 싸울 때 진작 썼겠지.”
그의 해명에도 류동하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무리 검술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검기를 저리 쉽게 뽑아낼 수 없단 것쯤은 안다.
저리 쉬웠으면 E나 F구역의 칼잡이들도 개나 소나 다 쓰고 다녔겠지.
그랬으면 마법사나 흑마법사들의 입지도 지금보다 훨씬 좁았으리라.
‘저게 말이 돼?’
정도현은 부들거리는 류동하를 무시하고 신성한 용의 구슬로 최민수를 되살렸다.
잠시 뒤, 최민수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멍청한 얼굴로 둘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뭐, 뭐야? 꿈인가?”
최민수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댔다.
분명 칼에 찔려 죽었는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최민수, 소원을 빌게. 앞으로 나한테 충성을 바쳐라.”
“뭐? 뭔 개소릴···.”
최민수는 류동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뜬 것이다.
류동하는 그 심정 잘 안다며 살갑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최민수도 그제야 알아챘는지 질문했다.
“류동하. 설마 너도냐?”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런 미친···.”
이로써 수수께끼가 풀렸다.
류동하가 정도현에게 굽신댄 건 살기 위해서였다. 최민수도 이제부턴 그래야만 했고.
길드전에서 패하고 모든 걸 잃은 것도 모자라 노예 생활이라니. 끔찍했다.
“최민수.”
“···예.”
최민수가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든 추스르려 애쓸 때, 정도현이 불렀다.
최민수가 부루퉁한 얼굴로 대꾸했다.
저러니 꼭 어쩔 수 없이 따른다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넌 류동하랑 함께 블랙 스컬을 키우고, 주변 구역을 차근차근 정리해라.”
“주변 구역이라니···.”
52구역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구역의 길드와 전쟁을 벌이란 건가?
정도현의 지시에 최민수는 아연실색했다. 그건 무모한 짓이었다.
다른 구역을 지배하는 길드와 붙으면 이기든 지든 성치 못할 거다.
블랙 스컬이 왜 레드 스캐빈저한테 속절없이 무너졌던가. 엉뚱한 곳에서 길드 전력을 날려 먹은 탓이었다.
설사 길드전에서 승리해 다른 구역을 흡수하더라도 또 다른 구역의 길드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그들끼리 연합을 맺어 견제할지도 모른다.
“당장 싸우란 건 아니고. 당분간은 길드 내정과 구역 관리에만 집중해.”
“···알겠습니다.”
최민수는 불안해졌다. 동시에 궁금했다.
‘저 녀석 대체 뭘 노리는 거지?’
정도현이 블랙 스컬을 앞세워 F구역을 집어삼키려는 목적이 궁금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돈이다.
빈민들로 가득한 황무지라도 꽉 쥐어짜면 은근 벌이가 짭짤했다.
구역 하나만 먹어도 상당한데 다른 구역까지 점거해 보호세를 거둬들이면 엄청날 터.
“다른 구역을 노리는 건 돈 때문입니까?”
“아니.”
“그럼 왜···.”
“너, 이 구역 완전히 점거하고 보호세 얼마나 올렸어?”
“예?”
뜬금없는 질문에 최민수가 당황했다.
그래도 물어봤으니 솔직하게 답했다.
“1.5배 정도 올렸습니다.”
“그럼 한 달 수입의 몇 퍼센트지?”
“4할 정도 될 겁니다.”
“4할? 야! 그럼 관리국이 떼가는 세금이랑 비슷하잖아?”
“그, 그래도···. 배식은 꼬박꼬박 해줬어.”
“에이, 씨···. 그건 그냥 굶어 죽지 말라고 준 거잖아!”
뭐 이런 양아치가 있냐며 류동하가 면박을 줬다.
최민수가 조그만 목소리로 변명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류동하도 여태 보호세를 뜯어갔지만 적당한 선은 지켰었다. 그가 봐도 최민수가 책정한 보호세는 도를 넘었다.
“염병. 남는 돈으론 맥주 한 잔 사 먹기도 어렵겠네.”
“류동하. 앞으론 원래 걷던 금액의 절반으로 보호세를 낮춰.”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정도현의 지시에 씩씩대던 류동하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도현은 친절하게 한 번 더 말해줬다.
“보호세를 반으로 낮추라고.”
“어, 언제까지요?”
“뭘 언제까지야. 계속 그렇게 해.”
“마,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걷으면 저흰 뭘 먹고 삽니까?”
류동하가 순간 자신의 처지도 까먹고 언성을 높였다.
정도현이 지그시 노려보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곧바로 머릴 조아렸다.
보다 못한 최민수가 대신 말했다.
“보호세를 너무 낮추면 길드 세력을 키울 수가 없습니다.”
“마, 맞습니다! 보호세는 길드 운영 자금으로 쓰이는데, 길드 복지가 안 좋으면 아무도 가입하지 않을 겁니다.”
“길드 복지? 어떤 걸 해주는데?”
연이은 전쟁으로 블랙 스컬과 레드 스캐빈저는 길드원을 대거 잃었다.
새로운 길드원을 모집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돈이 든다.
그들이 논리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반박하자 정도현도 경청해줬다.
“무기나 보호구 혹은 마법 연구에 필요한 재료들을 길드에서 조금씩 지원해줍니다.”
“그게 다야? 호들갑 떨더니 그렇게 대단한 건 없네.”
“그게 다라뇨? 그것들 구하려면 얼마나 비싼데요!”
이래서 칼잡이랑은 마법을 주제로 대화하면 안 된다. 류동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방 뛰었다.
마법사든 흑마법사든 마법 연구엔 반드시 많은 돈이 든다.
마탑 소속이면 관리국의 지원금을 받으니 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흑마법사는 대외적으로 핍박받는 계층.
그러다 보니 늘 자금난에 쪼들렸다.
“류동하. 내 능력이 뭔지 벌써 까먹었냐.”
“···예? 아, 맞다!”
정도현의 한 마디가 류동하의 머릿속에 벼락처럼 꽝 내리쳤다.
류동하가 물개박수를 치며 깔깔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최민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 정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안전한 곳에 숨어서 통신병 역할을 톡톡히 해줬던 정령술사, 오예찬이었다.
오예찬은 곧장 최민수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막내야, 만나서 반갑다.”
“···뭐?”
“어허. 막내가 어딜 형님한테 반말이야.”
오예찬이 아랫것처럼 대하자 최민수는 기가 찼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34레벨 주제에 뭘 믿고 이리 까부는 걸까?
최민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놈의 주둥이를 후려치려 했다.
“그만.”
우뚝.
정도현의 명령 한 마디에 오예찬 코앞에서 주먹이 멈췄다.
오예찬은 그렇게 될 줄 알았는지 여유롭게 웃었다.
정도현이 잘못을 지적했다.
“같은 편끼리 싸우면 안 되지.”
“···큭! 저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저놈?”
오예찬이 눈썹을 모으며 최민수를 노려봤다.
그런 둘의 모습에 류동하는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악하게 웃었다.
류동하가 최민수에게 서열을 정리해줬다.
“도현 님한테 가장 먼저 충성을 바친 건 나고, 그다음이 오예찬. 그리고 네가 세 번째. 그럼 막내 맞지.”
“그딴 이유로 내가 막내라고?”
“왜, 꼽냐? 꼬우면 나보다 먼저 들어오던가.”
최민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도현을 쳐다봤다.
먼저 들어온 순서대로 서열을 정한다니. 힘이 전부인 세상에선 비합리적이었다.
최민수는 정도현에게 당당히 주장했다.
“가장 강한 순으로 서열을 매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민수는 저 둘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그는 부활 페널티로 3만큼 떨어져 현재 53레벨.
오예찬은 붙어볼 필요도 없고, 류동하랑은 레벨이 똑같았다.
레벨이 같다면 육탄전에 능한 최민수가 훨씬 유리했다. 설사 류동하한테 지더라도 막내에선 탈출할 수 있을 터.
최민수의 제안에 류동하가 발작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릴! 길드전에서 진 놈이 무슨 형님 대접이야? 막말로 너 전쟁 포로야.”
“맞습니다. 어딜 기어오르려고.”
류동하와 오예찬은 모처럼 죽이 척척 맞았다.
둘의 연합에 최민수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분하지만 저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면 누가 있고 싶겠는가.
결국, 개노답 삼인방의 서열을 정하는 건 정도현 몫이 됐다.
“서열은 들어온 순서대로 한다. 강함 순으로 하면 한 명 들어올 때마다 너희끼리 치고받고 싸울 거 아냐?”
그러면 상당히 번거로워진다. 진 쪽은 악감정을 품을 수도 있고.
정도현의 선언에 오예찬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막내에서 벗어난 게 아주 기쁜 모양이다.
그가 최민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막내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형님이라 한번 불러봐라.”
“···예. 형님.”
오예찬은 그새 류동하한테 안 좋은 걸 배웠다.
최민수는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랜 숙적이었던 최민수가 굽신대자 류동하는 아주 좋아 죽었다.
“길드 복지에 필요한 아이템들은 내가 틈틈이 지원해줄게. 너흰 길드 키우는 데만 집중해.”
“예!”
“알겠습니다.”
“···?”
오예찬은 방금 도착했는데도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다.
이해를 못 한 건 막 들어온 막내뿐이었다.
오예찬은 막내한테 장황한 말투로 정도현의 개인 특성이 뭔지 설명해줬다.
누가 보면 포교 활동하는 사이비 신도인 줄 알 거다.
“아, 아이템 창조라니···. 개사기 아닙니까?”
“그래. 거의 신이나 다름없으시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호칭에 정도현이 오예찬을 째려봤다.
오예찬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곤 말을 줄였다.
“아무튼, 우리 길드는 앞으로 포션이나 장비템, 마법 재료가 부족할 일은 없단 거지.”
“이, 이해했습니다.”
최민수는 정도현을 다시 봤다.
그저 레벨업에 목마른 전쟁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마어마한 인물이었다.
개인 특성이 있는 플레이어는 대부분 유명해진다더니 그 말이 확 와닿았다.
훗날 엄청난 거물이 되리라.
최민수는 부러움과 동경심이 뒤섞인 눈으로 정도현을 쳐다봤다.
“너도 이거 써라.”
정도현이 막 생각났단 얼굴로 뭔가를 던져줬다. 조그만 약병이었다.
약병을 주워든 최민수가 고갤 갸웃했다.
“이건 뭡니까?”
“앞으로 열심히 일하라고 주는 선물.”
“선물이요?”
회복 포션은 아닌 것 같은데. 최민수는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고서 입을 쩍 벌렸다.
특성 강화의 비약.
개인 특성을 얻거나, 기존의 특성을 강화해주는 아이템이었다.
‘개인 특성이 생긴다고?’
절로 심박수가 빨라졌다. 최민수는 황송한 표정으로 허릴 굽신댔다.
“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도현한테 쌓인 악감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몇 년을 함께 해온 부하들이 죽은 거? 그게 뭐 대수인가. 개인 특성을 얻었는데.
흑마법사들은 대체로 나만 아니면 된다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는 오늘 겪은 수모를 깔끔하게 잊고, 정도현을 평생 큰형님으로 모시겠다 맹세했다.
***
얼마 전, 폭삭 망했다던 블랙 스컬이 부활했다.
52구역을 점거한 레드 스캐빈저는 길드전에서 패했고 블랙 스컬에 합병됐다.
뜻밖의 결과에 인접 구역의 길드들은 심히 당황했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블랙 스컬에 가입하면 장비 아이템을 세트로 준다고?”
“에이. 그럴 돈이 어딨어?”
“사기 아냐?”
“아냐. 내 친구도 얼마 전에 속는 셈 치고 가봤는데 진짜로 받았대.”
블랙 스컬은 줄어든 병력을 보충하고자 신입을 모집했다.
가입한 사람에겐 무려 본인 레벨대에 맞는 장비템을, 그것도 풀세트로 챙겨줬다. 실로 파격적이었다.
“포션이랑 마법 재료도 달마다 조금씩 제공해준다던데.”
“나도 가볼까?”
여태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흑마법사들은 혹했다.
F구역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길드전으로 줄어든 병력은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물론 새로 충원된 이들의 레벨은 대부분 낮았다.
여태 길드에 가입하지 못했으면 수준이 낮은 건 당연했다.
‘그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해.’
부족한 레벨은 올리면 그만.
그게 정도현의 지론이었다.
그는 신입들을 F구역 던전이나, 게이트 붕괴로 몬스터의 터전이 된 곳으로 원정을 보냈다.
장비 아이템도 든든하게 갖췄고, 포션도 적당량 지원해줬으니 괜찮으리라.
정도현은 개노답 삼인방에게 길드 운영을 맡기고 E구역으로 올라갔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왔다.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던 정도현이 멈칫했다.
‘피 냄새?’
게다가 문도 이미 열려 있었다.
정도현은 무기와 보호구를 장착한 채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뜻밖의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서아린?”
“···미안해요, 주인도 없는데 멋대로 들어와서.”
검은 뱀, 서아린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많이 다쳤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숨이 곧 끊어질 것 같았다.
정도현은 회복 포션을 건넸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회복하고 내 방부터 치워.”
“···아.”
방은 그녀가 흘린 피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었다.
정도현의 요구에 그녀가 픽 웃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위험한 일에 엮이기 싫어서 내쫓거나, 무슨 상황인지 물어봤을 텐데.
청소를 시킬 생각부터 하다니.
참 희한한 사람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