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1원 상점 - 16화
어떤 남자가 서류를 쭉 훑어보곤 시선을 떼면서 말했다.
“한 달 만에 39레벨이 됐다고?”
“예,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왔습니다. 필드형 던전에서 레드 플레이어도 여럿 죽였다더군요. 거둬들이면 분명 쓸만할 겁니다.”
“흠. 정도현이라···.”
비서의 보고에 남자는 프로필에 적힌 이름을 중얼댔다.
정도현의 빠른 성장에 그도 관심이 생겼는지 이어서 질문했다.
“이 정도 유망주면 다른 후보들도 눈독 들였을 것 같은데?”
“아, 그게···.”
비서가 잠시 망설이더니 사실대로 고했다.
“알아보니 안태환 후보 쪽에서 사적으로 한 번 고용했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계약은 안 맺었지만요.”
“···안태환이? 왜 고용했지?”
“얼마 전에 안태환 후보의 사생아를 둘러싸고 칼부림이 크게 벌어졌지 않습니까? 그때 구출팀으로 투입됐더군요.”
“설마···.”
비서의 보고에 남자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쳐다봤다.
그도 며칠 전에 암흑가에서 벌어진 사건은 알고 있었다.
안태환의 내연녀가 낳은 사생아.
그 아이를 납치해 안태환의 약점으로 써먹으려 했던 후보가 있었다.
그러나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던가.
또 다른 후보가 검은 뱀, 서아린을 고용해 그 판에 끼어들었다.
그 결과, 안태환의 사생아를 둘러싼 후보들의 삼파전으로 변했다.
그 싸움의 승자는 놀랍게도 안태환 후보의 승리였다.
사생아를 납치했던 갱단은 검은 뱀에 의해 몰살당했지만, 검은 뱀은 안태환이 고용한 플레이어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정도현이 검은 뱀을 막아냈다고?”
“예. 동료가 네 명 더 있긴 했습니다만···.”
동료가 있었다는 걸 감안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그가 알기론 검은 뱀, 서아린의 레벨은 50이 넘는다.
그런 그녀와 싸우고 살아남은 데다가 임무까지 완수했다.
“사상자는?”
“한 명입니다.”
“···믿기 어렵군.”
동료 한 명이 죽었어도 이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기적의 중심에 있었던 건 필시 정도현일 터.
“개인 특성 보유자일지도 모르겠군.”
“성장 속도로 보면 십중팔구 그럴 겁니다.”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래봤자 F구역 출신이니까요.”
남자가 탐욕에 찬 눈으로 비서를 쳐다보자, 비서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그가 만나본 F구역 출신들은 하나 같이 속물적이었다.
돈과 편안한 삶을 추구하며 이를 거부할 인내심이 없었다.
‘안태환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꼬릴 흔들며 복종하겠지.’
비서가 방을 나가기 전, 남자가 넌지시 말했다.
“회유에 실패한다면 조용히 묻어버려.”
“알겠습니다.”
다른 후보에게 넘겨줄 바엔 아예 없애버리는 편이 낫다.
비서는 이런 명령에 익숙한지 망설임 없이 답했다.
***
한편, 정도현은 민규원에게 연락을 받았다.
특수형 던전 건으로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면서 말이다.
정도현은 약속 장소로 나왔다.
E-14구역 번화가의 작은 카페. 유리창 너머로 앉아 있는 민규원이 보인다.
정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민규원이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도현 씨,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의 레벨은 이제 역전됐다.
그래서일까. 민규원의 언행이 전보다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자리에 앉자, 민규원이 원하는 커피를 주문해주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특수형 던전에 들어가고 싶으시다면서요?”
“예, 혹시 도와주실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민규원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단 듯이 말했다. 그러자 괜스레 불안해졌다.
자고로 대가 없는 호의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드니까.
아니나 다를까. 민규원이 말을 덧붙였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부지부장님께선 도현 씨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정식 계약을 맺으시죠.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조건으로 모시겠습니다.”
능력 있는 플레이어가 관리국 고위층의 사병으로 일하는 건 흔했다.
안태환은 정도현을 자기 파벌로 끌어들이고 싶은 것이다.
실력은 검은 뱀을 쓰러트린 것으로 충분히 증명했다.
“부지부장님은 분명 다음 지부장 자리에 오르실 겁니다.”
민규원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 단순히 운만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건 아닐 테니까.
다음 지부장 후보 중에서 가장 유력한 건 안태환일 것이다.
민규원은 장황하게 설명했다.
안태환이 권력을 잡게 되면 최소 이십 년 가까이 E구역의 왕처럼 군림할 것이라고.
지부장과 부지부장이 지닌 권력은 그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권력 격변의 시기에 줄을 잘 서야만 남은 인생이 편해질 거다.
정도현은 비싼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잠자코 들어줬다.
설명을 끝낸 민규원이 기대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단칼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지 민규원이 당황했다.
“혹시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시면···.”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면 다른 후보 쪽이랑 계약하신 겁니까?”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오긴 왔는데 거절했습니다. 전 누구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서요.”
민규원은 이해가 안 됐다.
지금은 E구역에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정도현처럼 능력 있는 자들이 부상하기에 딱 좋은 시기 아닌가.
그런데 누구 밑에도 들어가지 않겠다니. 타고난 재능을 썩히는 짓이었다.
“제 목표는 더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더 위요?”
그 말에 민규원도 그가 뭘 노리는지 알아챘다.
민규원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확인차 질문했다.
“설마···. 고레벨 플레이어를 노리시는 겁니까?”
“예.”
“도중에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편한 길이 있는데 왜 힘든 길로 가시려는 겁니까?”
“F구역 출신이라고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요.”
대충 둘러댄 답변에 민규원은 말문이 턱 막혔다.
거절한 이유에 논리가 있었다면 필사적으로 설득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저토록 감성적이고 순수한 욕망으로 움직인다면 옆에서 뭐라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정도현은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동차와 같았다. 그는 결승점을 향해서 계속 달릴 거다.
결승점에 무사히 도착하거나, 낭떠러지로 추락해 끝장나거나.
그의 앞에 놓인 미래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민규원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쉽네요. 도현 씨와는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았는데.”
“죄송합니다.”
“아뇨, 도현 씨의 선택을 존중해야죠. 그 꿈, 꼭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민규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응원해줬다.
“특수형 던전은 저희가 자릴 마련해보겠습니다.”
“예? 그러실 필욘···.”
정도현은 누구 밑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안태환이랑 더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정도현이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기에 하는 말이었다.
“다른 후보한테서도 연락을 받으셨다 했죠?”
“예, 장현민 의원의 비서랑 통화했습니다.”
“역시···. 장 의원은 부지부장님 다음으로 유력한 후보입니다.”
민규원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상당히 초조해 보인다.
“저흰 얌전히 포기하겠지만, 장 의원은 안 그럴 겁니다.”
“···그게 무슨?”
“다른 후보한테 인재를 뺏길 바엔 처리할 겁니다. 이미 그런 식으로 몇 명이나 죽었죠.”
“예?”
그렇게까지 하다니.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들 인재 영입에 목을 매는 것 같은데, 혹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예.”
민규원은 지부장 선출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해줬다.
지부장으로 뽑히려면 D구역 고위층한테 과반수의 표를 받아야 한다.
즉, 후보들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그들로부터 점수를 따내야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있다.
바로 후보들이 영입한 플레이어들로 결투를 벌이는 것.
“저흰 그걸 무투전이라 부르죠.”
“무투전?”
“예, 거기서 우승하면 지부장 자리는 거의 확정됩니다.”
이 세상은 강한 힘이 지배한다.
우수한 부하를 데리고 있다는 건, 곧 강한 지도자임을 입증하는 것.
그렇기에 지부장 후보들은 인재 영입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이 귀찮게 꼬였네.’
정도현이 머릴 긁적였다.
단기간에 레벨을 바짝 올려 블랙 스컬을 물리친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E구역 고위층들 눈에 띄고 말았다.
‘블랙 스컬만 아니었으면 적당히 텀을 두며 성장했을 텐데.’
“곤란하네요.”
“그러니 당분간은 저희와 가까이 지내시죠.”
민규원이 제안했다.
이쪽에 합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그럼 다른 후보들도 도현 씨를 함부로 못 건들 겁니다.”
“하지만···.”
“부담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검은 뱀의 개입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저희 측의 사죄라 생각해주세요.”
민규원이 그렇게 말했지만, 정도현은 한 줄기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저러다 갑자기 말 바꾸는 거 아냐?’
그런 의혹은 민규원이 피의 맹약서를 꺼내들면서 깔끔히 사라졌다.
정도현이 서명하며 질문했다.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정도현이 안태환 밑에 들어갈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그냥 죽게 내버려 둬도 안태환 입장에선 별 상관없을 텐데.
“실은···. 부지부장님이 최대한 도현 씨의 편의를 봐주라고 지시했습니다.”
“부지부장님이요?”
“도현 씨가 남 밑에서 일할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며,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측하셨습니다.”
즉, 이건 안태환의 투자였다. 훗날 정도현이 고레벨 플레이어가 됐을 때, 보다 좋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발판 개념으로.
솔직히 저쪽 입장에선 그리 부담스러운 투자도 아니었고.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군.’
뭐, 그래도 당장은 도움이 되니 일단 받아둘까.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민규원은 약속을 지켰다.
안태환과 계약한 플레이어들과 정도현이 특수형 던전에 함께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도현입니다.”
“파티장, 박성원이라고 합니다.”
파티의 대표, ‘박성원’이 웃으며 정도현과 악수를 나눴다.
그러자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파티원들이 정도현을 애물단지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들어갈 던전의 적정 레벨은 43.
39레벨에 경력도 짧은 정도현이 들어가기엔 여러모로 불안했다.
저들 입장에선 혹을 하나 달고 들어가는 셈이니 불편할 수밖에.
게다가 이들은 정도현이 검은 뱀을 이겼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피의 맹약서로 임무와 관련된 내용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어서였다.
그건 민규원과 안태환도 마찬가지.
그래서 민규원은 저들에게 정도현의 진가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를 무시하거나, 무례한 언행을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는 게 최선이었다.
“바로 출발하죠.”
박성원은 불만 가득한 파티원들을 다독이며 던전에 입장했다.
게이트를 지나자 거대한 토굴이 보였다.
특수형 던전답게 통과했던 게이트가 닫히고,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 1시간 안에 던전 내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세요.
- 토벌 기여도에 따라 순위를 매깁니다.
- 순위가 높을수록 더 좋은 보상을 획득합니다.
- 단, 꼴등은 벌칙으로 사망합니다.
- 단, 퀘스트 클리어 전에 사망자가 발생할 시 벌칙은 소멸합니다.
“뭐?”
“주, 죽는다고?”
던전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한 명은 반드시 죽는단 거니까.
저들끼리 웅성대던 파티원들이 동시에 누군가를 쳐다봤다. 정도현이었다.
그를 본 파티원들이 속으로 안도했다.
적어도 자신들이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뭐···. 어쩔 수 없잖아? 퀘스트가 이 모양인 걸 어떡해. 그래도 시체는 우리가 잘 수습해줄게.”
파티원 한 명이 정도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조롱하듯 말했다.
그의 행동에 파티장, 박성원이 무슨 짓거리냐며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다른 파티원들은 내심 같은 생각인지 입도 뻥긋 안 했다.
박성원은 몰상식한 파티원들 대신 머리 숙여 사과했다.
“도현 씨,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정도현은 화를 내긴커녕 오히려 빙긋 웃었다. 그러자 파티원들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정도현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전 혼자 사냥할게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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