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거짓말은 안 한다 (12)
‘미리 안타라고 적어놓을까.’
한편, 경기를 지켜보던 박한우 위원은 기록지 위에 뭔가를 적는 시늉을 했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겠지만, 가끔 승부의 결과를 미리 적어놓곤 하는데 맞아떨어질 때가 정말 많다.
볼 카운트 싸움에서 밀렸던 초반과 달리 승부를 잘 끌고 가고 있는 마이크 서튼, 잠깐 고민하던 박한우 위원은 기록지에 안타를 적어버렸다.
따악~!!
“와아아~!!”
마이크 서튼은 정말 안타를 때려버렸다.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득점, 박한우 위원은 복권이라도 맞은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뭐하세요?”
“그냥 장난 좀 치는 거야.”
“좀 진지하게 하세요. 월드시리즈잖아요.”
“이 사람아, 난 언제나 진지해.”
광고가 나가는 사이, 한국 중계진은 농담을 주고 받았다.
사람이 언제나 진지할 순 없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장난이라, 동료 위원이 지적에도 박한우 위원은 허풍을 멈추지 않았다.
“위원님은 타자가 안타를 칠지 못칠지 감이 오세요?”
“어느 정도는 감이 오지. 내가 선수 – 감독 - 해설위원까지 야구를 몇 년이나 봤는데”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농담이 오가는 사이, 광고 종료를 알리는 PD의 사인이 떨어졌다.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의 2회 초 공격, 이명한 캐스터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진지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자, 테드 반디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49 - 홈런 49개 – 122타점, 3년 연속 NL MVP 수상이 거의 확실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문제는 포스트 시즌에 너무 약하다는 거죠. 이인영 선수가 챔피언십 시리즈 MVP만 3개, 월드시리즈 MVP도 1차례 수상을 했거든요. 그에 비하면 너무 초라합니다.”
테드 반디는 포스트 시즌만 되면 약해지는 남자,
정규시즌 통산 OPS가 1(1.073)이 넘는 괴물이지만 포스트 시즌 OPS는 0.822까지 떨어진다.
타율로 따지면 정규시즌 타율은 0.332, 포스트 시즌은 0.262,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도 0.259로 부진하다.
그나마 이게 NLCS 활약으로 끌어올린 수준,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2할을 겨우 넘겼다. 월드시리즈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타석에 들어서는 반디는 자신의 실력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초구를 좀 더 쳐야 되나.’
테드 반디는 지금까지 지켜온 야구 신념에 금이 가는 치욕을 당했다.
팬 그래프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은 61%까지 늘어났다.
투수들의 구위가 좋아지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 하지만 반디는 초구를 잘 공략하지 않는 편이다.
3할이 훌쩍넘는 타율에 40홈런을 치는 타자를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질 투수가 몇 명이나 있겠나. 나는 그렇게 얕보일 타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야구를 해왔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 들어서는 이 작전이 통하질 않았다.
초구를 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새가슴이라는 비난을 퍼붓는 여론, 결과를 냈다면 모르겠는데 포스트 시즌 들어 OPS가 2할이나 떨어져 버렸다.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 이번 타석은 초구를 노리고 들어갔다.
“스윙!! 크게 휘두릅니다.”
“케이시 선수가 오늘도 구위가 좋네요. 이번 포스트 시즌 들어서 3경기 모두 6이닝 이상을 소화했고 평균자책점은 1.50에 불과합니다. 뉴욕이 이 선수에게 3억 달러를 투자한 결실을 드디어 맺는 건가요?”
케이시는 평균 97마일을 넘나드는 구위로 상대를 윽박질렀다.
올 시즌 31피 홈런을 허용했지만 초구를 잡아내면 피장타율이 0.253까지 떨어지는 투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케이시는 슬라이더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고 박한우 위원도 기록지에 미리 삼진을 적어버렸다.
“와아아아~!!!”
결과는 헛스윙 삼진, 체면을 구긴 테드 반디는 뉴욕 팬들의 환호성에 떠밀려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괜찮아. 나쁘지 않았다고”
세인트루이스의 존 월터 감독은 패잔병을 보듬었다.
초구는 절대 안 친다고 고집을 부리던 친구가 초구를 휘둘렀다. 이건 테드 반디가 승리를 위해 자존심을 꺾었다는 뜻, 삼진은 당했지만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고 발악하는 자세는 나쁘지 않았다.
변화와 기적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법, 존 월터 감독은 다음 타석은 뭔가 결과가 있을 거라 믿었다.
“자, 이제 뉴욕의 2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타자는 벤 자일스, 올 시즌 타율 0.263, 홈런 11개, 57타점을 기록했습니다.”
“포스트 시즌 들어서는 아직 안타가 없죠. 그래도 포수 치고 공격력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방심할 타자는 아닙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벤 자일스는 초구를 잡아당겨 큰 포물선을 그렸다.
우익수 테드 반디는 추격에 나섰고, 펜스 근처에서 타구를 처리하는 호수비를 보여줬다.
박수를 받을만한 플레이, 하지만 박한우 위원은 이렇게 잡을 타구는 아니었다며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올 시즌 테드 반디 선수는 리액션 마이너스 2.5를 기록했거든요. 공이 타격이 됐을 때 즉각적인 반응이 안 됐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빠른 발 덕분에 어떻게든 쫓아가긴 하는데, 이렇게 멋지게 잡을 타구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잡았어야 했어요.”
“그래도 외야수에게 빠른 발은 강점이 아닌가요?”
“좋은 거죠. 문제는 이 선수가 몸무게 100kg이 넘는 거구라는 겁니다. 이런 수비가 반복되면 몸에 무리가 오겠죠.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오늘 경기도 그래요. 아메리칸 리그 룰이 적용되는 경기에서 왜 우익수로 출전을 시켰는지 …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단장이었다면 가만 안 둘 텐데 말이죠.”
“하하~ 박한우 위원님은 지금이라도 감독으로 돌아가시죠?”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선수가 다치면 본인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체에 피해가 되는 일이죠.”
이인영은 필라델피아 시절, 우익수로 잠시 뛴 적이 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줬는데, 비결은 타구에 대한 반응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미리 가서 타구를 기다렸기 때문에 멋들어진 장면이 연출되지 않았을 뿐, 수비 효율성은 아주 높았다.
반면 떨어지는 반응 속도 때문에 한참을 달려가야 하는 테드 반디, 이런 식이라면 선수의 전성기는 앞으로 몇 년이나 계속 될까.
박한우 위원은 선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익수로 계속 놔둬선 안 된다는 뼈아픈 말을 남겼다.
어쨌든 경기는 그렇게 계속 흘러 5회 말 뉴욕의 공격, 이인영은 1사 주자 1루에서 세 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현재 스코어는 1대 0, 1회에 잠깐 흔들렸던 세인트루이스의 선발 스튜더스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한 점이 중요한 경기, 1루에 나간 몬테로는 짧은 안타에도 3루로 뛰겠다는 각오를 품었다.
[따악~!!]
“우측!! 파울입니다. 아~ 이인영 선수가 마음먹고 휘둘러 봤는데요.”
“그것보다 저는 몬테로 선수의 주루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이런 상황에서 망설이는 선수가 있는데, 3루까지 가겠다고 미리 생각을 해야 됩니다.”
몬테로가 공격적인 베이스 러닝을 보여주자 세인트루이스 진영은 경계심을 한껏 드높였다. 이런 경기에선 1점이 승패를 가르는 법, 테드 반디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따악~!!
“그렇지!!”
“달려!! 달려!! 3루까지 가!!”
우익수 쪽으로 날아가는 타구, 몬테로는 2루를 지나 3루로 향했다.
테드 반디는 어깨가 약한 편, 송구가 빠지면 홈까지 달리겠다고 마음속으로 예약까지 했다.
“뛰어!! 뛰어!!”
“뒤돌아보지 말고!!”
뒤로 빠진 송구, 동료들의 외침에 따라 몬테로는 홈으로 돌진했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 멋진 질주를 보여준 몬테로는 홈플레이트 주변을 돌며 관중들의 환호를 온 몸으로 받아냈다.
반면 형편없는 송구로 추가점을 내준 테드 반디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 타석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 친구는 글렀어.’
박한우 위원은 기록지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력은 있어도 팀 사정이 좋지 않아 포스트 시즌에 못 나가는 선수들도 많다. 그런데 테드 반디는 이게 벌써 5번 째 포스트 시즌, 월드시리즈도 이게 3번째다.
그런데도 이런 경기력을 보여준다는 건 운이 없는 게 아니라 본인이 기회를 못 살리는 것 뿐, 비운의 2인자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다.
어쨌든 추가점을 내면서 여유를 얻은 뉴욕, ALCS에서 매끄럽지 않은 투수 기용을 보여준 앤더슨 감독은 일찌감치 불펜을 가동했다.
몸을 푸는 선수는 존 비글리 – 에드워드 칼슨, 특별석에 앉은 플레어티 당장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교체 타이밍을 노렸다.
‘오늘은 느낌이 좋은데’
하지만 리차드 케이시는 마운드를 떠날 마음이 없었다.
6회까지 2피안타 탈삼진 9개, 조금 더 던져도 상관없지 않나. 일단 7회에도 마운드에 올랐고, 선두 타자 필립 햄버를 우익수 플라이로 돌려세웠다.
다음 타자는 테드 반디, 개릿 앤더슨 감독이 마운드로 향했다.
“자네는 여기까지야.”
“한 명만 더 잡고 내려갈게요.”
“단장이 결정한 일이야.”
“가끔은 당신의 주장도 내세우라고요. 감독인데 자존심도 없습니까?”
앤더슨 감독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하고 싶지만 ALCS에서 지은 죄가 있으니 따라야 하는 입장, 잠깐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케이시는 감독에게 공을 넘겨줬다.
포스트시즌 들어 에이스의 진가를 보여준 케이시, 뉴욕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내려가서 다행이다.’
한편, 이인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6회까지는 괜찮은 투구를 보여주지만 투구 수가 많아지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케이시, 그 장면을 1년 내내 지켜봤다.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은근 불안했는데 내려가 줬으니 다행, 마운드에 오르는 비글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자, 이제 테드 반디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2타수 무안타, 아직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보셨겠지만 비글리 선수는 빠른 볼이 주무기입니다. 특히 싱커처럼 가라앉는 투심을 잘 던지는데, 반디 선수가 낮은 공에 강점이 있거든요. 그래도 빠른 볼이 커터성을 띄기 때문에 우타자가 공략하기엔 쉽지 않을 겁니다.”
임선우 위원의 말대로 비글리는 바깥쪽으로 휘는 96마일 빠른 볼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ALCS의 활약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은 모습, 뉴욕 현지 해설위원들도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스윙!! 다시 헛칩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뉴욕이 새로운 수호신을 얻었네요. 테드가 전혀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스트라이크 존에서 멀어지는 궤적이거든요. 그런데 96마일입니다. 이런 공은 저도 치고 싶지 않을 거예요.”
3구도 빠른 볼, 테드 반디는 뛰쳐나가는 방망이를 겨우 붙잡았다.
판정은 노 스윙, 저런 눈치 없는 1루심이 있나. 뉴욕 팬들은 불만을 쏟아냈지만 비글리는 차분하게 다음 공을 준비했다.
낮은 공에 강점이 있는 테드 반디, 여기서 굳이 투심을 던져야 되나.
포수 사인은 빠른 볼, 벤 자일스 포수는 비글리의 구위라면 테드 반디를 잡아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