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5)
[성운 라이온즈 파죽의 3연승, KS 진출]
플레이오프 3차전까지 잡아낸 성운 라이온즈는 단숨에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ST위너스의 승리를 점쳤던 전문가들은 입장이 무안해졌고, KS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전망을 내놨다.
[이인영 플레이오프 MVP 수상, 상금 3백만 원 수령]
특히 야구팬들에게 이인영의 존재감은 무엇보다 크게 다가왔다.
준 플레이오프부터 신들린 선구안과 결정타로 팀에 승리를 선사한 슈퍼스타, 이인영 보유 팀이라는 것만으로도 많은 팬들이 성운 라이온즈의 우승을 점쳤다.
‘그렇게 쉽게 될까?’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은 게, 베어스에는 김재규, 페르난데스, 김환희, 오건무, 김동환 등 매서운 타자들이 즐비하다.
타선뿐만 아니라 투수력, 수비, 모든 부문에서 베어스가 앞서는 상황, 슈퍼스타는 한국시리즈에서도 팀의 승리를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여론의 관심은 미디어 데이에 집중됐다.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이성한 코치는 다소 긴장된 얼굴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1년 전만해도 베어스의 타격코치를 했던 입장,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온 건 네가 한 게 뭐냐는 팬들의 조롱뿐이었다.
먼 길을 돌아 적으로 만난 베어스, 우승까지 해버리면 이것보다 더 짜릿한 복수가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아마추어도 아니고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인영 선수, 최근 본인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네”
드디어 시작된 인터뷰, 기자는 초반부터 제법 센 질문을 던졌다.
이인영은 최근 ‘떼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 이번 가을야구 이전에도 심판에게 항의를 하거나 비디오 판독을 요구하는 장면이 자주 잡혔다.
논란에 결정타를 먹인 건 지난 포스트시즌 3차전, 이인영은 루킹 삼진을 당한 후 심판에게 이건 아니라고 거듭 항의를 했다.
이성한 코치가 말리지 않았다면 얼굴 붉힐 상황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하지만 마지막 공이 존에서 많이 벗어난 건 사실이었다.
정당한 항의를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못마땅한 건가.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야구선수라면 우기기와 떼쓰기는 기본으로 장착하는 거 아닌가요?”
“기본이라니요?”
“그 정도 승부욕과 끈기도 없는데 운동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저는 떼쟁이라는 별명 좋아합니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떼쓰기는 계속 될 테니까 지켜봐주십쇼.”
기자들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베이스 벤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인영은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을 때 유독 성공률이 높은 편이다. 그냥 떼쓰기가 아니라 이유가 있다는 뜻, 공만 잘 보는 게 아니라 상황 판단도 뛰어난 녀석이라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야구를 못하는 선수가 그러면 추해보이겠죠. 하지만 저는 야구를 잘 하니까 그런 짓을 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폭소하는 기자들, 이인영은 이 흐름에 결정타를 박아 넣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저희 감독님도 좀 더 떼를 쓰는 습관을 들이셔야 됩니다.”
저격을 당한 한승규 감독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건가? 순간 잘못 들었나 했지만 틀리지 않았다.
“저희 감독님은 다 좋은데 너무 얌전하십니다. 전에 있던 박한우 감독님은 심판하고 싸울 기세로 떼를 쓰셔서 든든했는데 한승규 감독님은 그런 점이 조금 부족하신 것 같습니다.”
이인영의 말대로 한승규 감독은 선수들을 보호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지난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도 선수가 주심과 말싸움을 벌일 때 누구보다 먼저 튀어나와야 할 사람이 감독 아닌가.
하지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건 이성한 코치, 한승규 감독도 뒤늦게 나와 주심과 말을 주고받았지만 적극적인 항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막말로 선수가 퇴장당하는 것 보다 감독이 퇴장당하는 게 낫지 않은가. 단장이 부리는 허수아비라도 감독이라면 그 정도 일은 해줘야겠지, 한승규 감독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 동안 질문은 계속됐다.
“준 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올라오셨는데요. 이번 한국시리즈 우승 장담하십니까?”
“그 험난한 길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내려가는 건 좀 그렇죠. 그러니까 베어스가 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배려 없는 말투도 여전, 보다 못한 베어스의 캡틴 임선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두 사람은 준 플레이오프 비디오 판독 사건으로 잠깐 부딪쳤던 관계, 사사로운 감정은 없지만 승부 앞에서는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성운 라이온즈가 좋은 경기를 펼치며 올라온 건 인정하지만 저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이인영 선수, 지금 답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좋은 승부 기대하겠습니다. 일단 임선우 선수가 선발로 나오길 바라야겠네요.”
이인영은 바로 임선우를 도발 했다.
임선우는 메이저리그에서 114승을 거둔 전설, 하지만 올 시즌 한국에서 보여준 활약은 명성과 거리가 멀었다.
이름값 덕분에 미디어 데이에 나왔지만 이번 시리즈에서 선발로 기용될지는 의문, 중간계투로 나올 가능성은 있지만 선발 기용은 어려웠다.
그걸 제대로 꼬집은 저격, 한방 먹은 임선우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인영 선수를 둘러싸고 너무 무례하다, 버릇없다는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선수들이 예의 차리고 얌전하게 굴면 야구가 즐거울까요? 저 같은 바보가 하나 있다고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무슨 질문을 던져도 바로 받아치는 재치, 어떤 공을 던져도 얻어맞는 투수의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대라는 걸 깨달았다.
“이인영 선수에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너무 저한테만 질문 하시는 거 아닌가요? 베어스 입장도 있으니까 이번엔 저쪽으로 하시죠.”
상대 팀 분량까지 걱정해주는 애송이, 하지만 기자는 볼 일은 당신에게 있다며 질문을 이어갔다.
“이인영 선수를 두고 많은 팬 여러분들이 KBO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는데, 본인도 동의하십니까?”
“글쎄요 … 최고냐 아니냐를 떠나서 좋은 선수라곤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믿는 편이죠.”
날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좋은 타격을 하겠나.
그래서 내가 치는 볼은 다 스트라이크고 거르건 볼이라고 생각하는 편, 그런데 지난 경기에서 주심은 그 영역을 부당하게 침범했다.
그래서 한 마디 했는데 건방지다 뭐라 한다면 선수가 뭘 할 수 있겠나. 심판의 권위는 존중했지만 어처구니없는 판정에 대들 수 있는 게 진짜 좋은 선수라고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많은 말이 오고갔지만, 이번 미디어 데이도 이인영의 독무대로 마무리, 팬들의 관심도 슈퍼스타의 활약에 집중됐다.
* * *
[해설 좀 맡아주실 수 있습니까?]
한국시리즈를 하루 앞두고 이인영의 아버지 이인호는 방송국 PD의 전화를 받았다.
박한우 위원과 짝을 이루던 이상명 위원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대타가 필요해 진 상황, 슈퍼스타의 양아들을 자처하고 있는 박한우 위원과 진짜 아버지인 이인호가 짝을 이루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편파해설 논란이 일겠지만 그런 건 예전에도 있었던 반응, PD는 기왕 편파로 갈 거면 아예 끝장을 보자며 이인호를 섭외했다.
“아니요. 사양하겠습니다.”
이인호는 PD의 제안을 거부했다.
괜히 내가 나가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아들이 욕을 먹는다. 잘 하고 있는 아들에게 피해를 줘서 좋을 게 없겠지, 하지만 뒤에서 남편을 지켜보던 아내가 출연을 권유했다.
“얼른 나가요.”
“왜?”
“다른 집 양반이 우리 아들보고 양아들이니 뭐니 하고 있는데, 친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거예요? 가서 정리하고 와요.”
이인영의 어머니는 박한우 위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꾸 양아들 양아들 하는데 누가 들으면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오해할 거 아닌가. 진짜 아버지가 가서 앉아 있으면 그 사람도 말조심 하겠지, 여기에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거냐는 잔소리가 따라붙었다.
“당신은 내가 집에 있는 게 싫어?”
“그게 아니라 나가서 뭐 좀 해요. 50도 안 된 양반이 집에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더는 집에 눌러있을 분위기가 아니지 않은가.
아들을 위해 가만히 있는 것뿐인데, 얼른 나가라고 닦달하는 아내, 결국 이인호는 임시 해설위원을 받아들였다.
친아버지의 등장에 박한우 위원은 잠시 당황, 하지만 같은 시대를 함께했던 사이라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걷혔다.
“어떻게 그렇게 아들을 잘 키웠어?”
“잘 자라준거지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이인호는 박한우보다 6살 어린 나이로 프로에 데뷔했다.
부상만 없었다면 2000안타를 돌파했겠지만 통산 1500안타만으로도 팬들 입에 오르내리기 충분한 거물, 임팩트가 없어서 그렇지 꾸준함은 다른 선수들 못지않았다.
한승규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인자로 활약한 건 박한우도 마찬가지, 경기를 앞두고 두 사람은 옛 추억에 젖어들었다.
“참 세월 빠르다. 그날부터 20 몇 년이 흐른 거냐?”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늙었지만 형님도 많이 늙으셨네요.”
“야, 그런 말은 왜 하냐?”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99년 4월 21일, 당시 프로 5년 차였던 박한우는 긴 2군 생활을 거치고 이제 막 주전자리를 잡은 신예였다.
그에 반해 이인호는 대학도 거치지 않고 프로무대에 진출, 당시만 해도 고교야구 선수의 프로 진출은 어려웠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고교 선수가 선발 출전했다는 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는 뜻, 그날 이인호는 4타수 2안타를 때려내며 화려하게 프로에 데뷔했다.
반면 박한우는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다음 경기에서 벤치 신세, 심지어 감독으로부터 넌 고등학생보다 못한 거냐는 비아냥거림을 당했다.
‘내가 고등학생보다 못하다고?’
속이 쓰렸지만 덕분에 이를 악물고 연습에 매진, 결국 2000안타를 넘기고 커리어를 마감하며 한국 야구의 전설에 올라섰다.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않았던 그날의 아픔, 이인호는 그게 정말이냐며 되물었다.
“그래, 그날 내가 깨달은 게 있어. 어지간하면 선수들 앞에서 비교질 하지 말자고, 그런데 감독을 하니까 눈에 밟히는 녀석들이 있더라.”
“제 아들도 처음부터 눈에 밟히셨나요?”
후배의 역습에 박한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엔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겪어보니 좀 건방져도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실력도 확실했던 녀석, 뭣보다 할 말을 하는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너 네 아들이 나한테 술 취해서 전화한 거 알고 있냐?”
“그랬어요?”
“그래, 다른 선수들한테는 집에 일찍 들어가라고 문자 넣었는데, 나는 왜 안 넣었냐며 막 소리를 지르더라. 그때, 아 ~ 이 녀석 보통이 아니구나 깨달았지. 역시 네 아들다웠다.”
“제가 뭐가 어때서요?”
“너 솔직히 현역시절엔 건방졌잖아? 선배들 야구 너무 못한다고 한 거 기억 안 나냐?”
그제야 이인호는 애써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박한우 위원 앞에서 한 말은 아닌데, 술자리에서 실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사건, 나는 잘 해주는데 동료들이 너무 못 따라와서 자기도 모르게 건방진 말을 해버렸다.
당시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 널리 퍼지진 않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던 실언 사건, 하지만 당시 이인호 동료들이 야구를 너무 못했던 건 사실이라 박한우 위원은 그 소식을 듣고 그러려니 넘겼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넌 운도 지지리 없었다. 동료들이 조금만 도와줬어도 … ”
“제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거죠.”
남들은 비운의 선수라고 하는데, 솔직히 이인호는 커리어를 거듭할수록 프로 무대의 한계에 부딪쳤다.
이렇다 할 성장이 없었던 게 그 증거, 1999년 데뷔 시즌에 커리어 하이를 찍고 그 이후 그만한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 운이 없는 선수라고 할 수 있겠나, 다만 아들은 그렇게 되질 않길 바랄 뿐, 자신감과 건방짐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정말 뛰어난 선수라면 건방짐도 자신감이 될 수 있는 프로세계, 두 사람은 그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