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르미스의 망치 -->
몇 주 뒤. 어느 정도 몸 상태가 호전된 나는 캐릭터가 복구됐을 거란 김성열의 말에 게임에 접속했다. 몸 상태가 호전되자마자 게임 접속이라니 이거 폐인이 따로 없구만…….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냐……?
막상 게임에 접속하긴 했는데 왜 난 이런 곳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마치 고대 이집트를 보는 듯한 풍경이다. 지도를 켜보니 ‘아르멜데인 왕국’이란다. 여기가 어디쯤 위치한 왕국이야……?
내가 있는 위치가 어딘지 확인 좀 해보려는 찰나 김성열에게 귓속말이 온다. 난 귓속말 아이템도 없는데 말이다.
-‘기단 씨. 캐릭터 잘 복구됐나요?’
‘아, 예 복구는 잘 됐는데, 이상한 곳에 와있네요……?’
-‘그게 아마, 캐릭터가 복구됐다기보단 이전 캐릭터 정보가 복사된 거라 위치는 랜덤하게 떨어졌을 거라고 하네요. 아마 이쪽으로 오시려면 직접 찾아오셔야 할 거예요.”
“아,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전, 기단씨 오는 동안 놈들에 대해서 좀 더 캐고 있겠습니다.’
기왕이면 가까운 대로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위치를 찾아보니 내가 기존에 머무르던 발데린 공화국에서 우올로로 약 한 달 정도 거리에 떨어진…….
“하, 한 달?!!”
지금 보니. 대륙 건너잖아? 하필이면 이런 곳에 떨어지게 될 줄이야…….
하아……. 이걸 무슨 수로 다시 가지……? 민성이는 지금 접속해 있으려나?
내 캐릭터를 복구해주면서 민성이도 같이 복구를 부탁했다. 곤란한 부탁이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흔쾌히 승낙했다. 근데 게임사 측 직원이 이런 짓 하면 잘리는 거 아닌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어이 송민성.’
-‘형님! 부르셨습니까!”
‘목소리 폈네? 숨통 좀 트이나 봐?’
-‘그럼요. 형님! 형님 덕분에 요즘 살 것 같습니다. 누나도 집에 돌아오고 너무 좋습니다.”
그날 이후로 민성이의 누나 민선 씨는 정신 차리고 김민철과 완전히 연을 끊은 모양이다. 어차피 김민철은 감옥에서 썩을 테니 부디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길 바랄 뿐이다.
‘송민성, 그럼 이제 나한테 빚 갚아야지.’
-‘예? 무슨 빚이요?!”
‘이야 이놈 보게. 5억에 우올로까지 해서 총 6억 셀이라는 거금을 갖고 날랐으면서 모르쇠냐?’
-‘그거 봐주시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게임 그만하고 학교 다니라니까? 그럼 빚 없던 걸로 해줄게. 너희 누나가 너 걱정하더라, 게임만 한다고.”
민성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였지만, 공부가 싫어서 자퇴하고 게임으로 돈 벌겠다고 이러고 있단다.
학교에 다니라는 말에 송민성은 침묵한다. 다시 생각해도 역시 공부는 싫었는지 곧 힘차게 대답한다.
-‘돈 갚겠습니다! 제가 지은 벌 받는다 생각하고 형님께 봉사하겠습니다!”
얘도 진짜 공부 어지간히 싫어하는구나.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학교 졸업은 했는데 말이다……. 그래 뭐, 본인이 그러겠다고 하니, 더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나는 드웍프에게 위치를 물어 같이 합류하기로 했다. 다행히 드웍프도 이 근방에 떨어져서 금방 만나긴 할 것 같다.
이제 동료들과 합류를 위해 페로렌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는 받자마자 왜 한동안 연락이 없었냐며 나를 타박했다. 이후에 내가 있는 위치를 묻더니 지금 갈 테니 꼼짝 말고 기다리라면서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왜 대륙 너머에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나 보다. 우올로라도 사서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뭐 일단 와 준다니 나야 좋지…….
드웍프를 찾으러 다니면서 장비 상태를 점검하니 지팡이의 내구도가 거의 바닥을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수리도 없이 계속 쓰고 있었구나. 내구도가 바닥난다고 해서 부러지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무기 능력치가 대폭 감소한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수리해둬야지.
나는 대장간을 찾아 몸을 움직인다.
지나다니면서 느끼건대 이 도시 상당히 멋있다. 저 멀리 중앙 궁전 같은 게 하나 보이는데, 진짜 황금인지 뭔지 외벽이 눈부시게 빛난다. 여기가 현실로 따지면 석유 국가 같은 곳인가……?
지나다니는 여자들도 엄청 귀티나게 생겼다. 윤기 나는 구릿빛 피부에 이목구비도 또렷해서 꼭 남미 쪽 모델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실트도 이런 분위기였는데, 혹시 이쪽 대륙 출신인가?
*
“어서 옵쇼!”
주변을 둘러보며 대장간에 들어서니 호걸 같은 분위기의 대장장이가 나를 반긴다.
“이 무기를 수리하고 싶은데요.”
“아, 이리 주십시오. 어라? 지팡이를 무기로 사용하십니까? 특이하군요.”
그는 내가 내민 지팡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음 뭐, 이 정도면 상태가 많이 안 좋긴 하지만 수리는 할 수 있습니다. 수리비는 원래 50만 셀 정도 나오지만, 손님께서 인상이 워낙 좋으셔서 특별히 30만 셀로 깎아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럼, 감사하죠. 고쳐주세요.”
이게 바로 매력 능력치의 위엄 아니겠는가? 대부분 모든 가게에서 할인해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는 지팡이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곧이어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리를 기다리는 동안 벽에 걸린 무기들을 쭉 살펴봤다. 검부터 활, 망치, 사람 키보다 큰 대검까지. 저런 걸 휘두를 사람이 있긴 한 건가……? 파괴력 하나는 끝내주겠다.
그때 벽에 걸린 망치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른 무기와 다르게 케이스에 보관되어 걸려있는데 굉장히 익숙하게 생겼다.
“수리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근데 저 망치는 뭐예요?”
금방 수리가 끝난 대장장이에게 망치에 관해 묻는다.
“아 저거 말입니까?”
그는 눈을 빛내며 망치 앞으로 다가가더니 자랑스럽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비르미스의 망치라는 물건인데, 지구상 모든 대장장이의 로망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죠. 비르미스라는 대장장이의 신이 다른 신들의 장비를 제련할 때 사용했다고 하는 망치인데, 사실 이건 모양만 따서 만든 가품입니다. 진품은 이 세계 어딘가에 떠돌고 있다고 하는데, 이 세계가 워낙 넓어야 찾을 엄두라도 내죠.”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케이스에 앉은 먼지를 털어낸다.
비르미스의 망치……. 저거 드웍프가 사용하는 무기잖아? 신들의 장비를 제련할 때 사용한 망치라면 필시 엄청난 가치를 지녔을 터. 드웍프가 가진 게 만약 진짜라면…….
*
드웍프가 이곳을 찾아오고 나서는 대장장이에게 드웍프의 무기를 보여줬다.
“이 영롱하지 않은 빛, 낡아빠진 몸체. 이로 보나 저로 보나 가품이로군요.”
설마 진품이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지 대충 훑어본다.
“그러지 말고 좀 자세히 좀 봐주세요. 이 문양이나 그런 건 어때요?”
그는 망치 한 곳에 새겨진 의문의 문양을 조금 유심히 살펴본다.
“확실히 이 문양은……. 특별해 보이긴 하는데……. 사실 저도 비르미스의 망치를 실물로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니 실망스럽다. 이래서는 가품인지 여부도 잘 모르겠네.
“대신 제가 알 것 같은 사람을 소개해 드릴 순 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벨라프라는 괴짜 드워프가 대장간을 운영하는데, 거기 한 번 가보세요. 아 혹시나 그가 물어보면 제가 말해줬단 말은 절대! 하지 마시고요!”
*
그가 신신당부하며 알려준 드웍프가 사는 곳을 찾아가니 웬 땅굴이 하나 나온다. 주변은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곳인데 여긴데 여긴 땅을 파서 내려가는 식으로 가게가 차려져 있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강철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히히……. 좋아. 좋았어……. 아리아 너도 흥분되는 거지? 그렇지?”
깡-! 소리가 한 번 나면, 변태 같은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온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서는 때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다니……. 그래……. 넌 그런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야. 아리아……!”
까앙-!
“하아! 너의 그 아리따운 신음이 날 너무 미치게 만들어!”
깡-! 깡-! 깡-! 깡-!
“그래……! 울부짖으라고! 더! 더! 더!”
가게 분위기도 음침한데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정상은 아니다.
가게를 잘못 찾아왔거나 온 타이밍이 안 좋거나 둘 중 하나인데, 살짝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안쪽에서 드워프가 혼자 망치질을 하고 있다.
“형님……. 저거 살짝 또라이 아닙니까……?
드웍프의 말에 나도 공감하는 바다. 말하는 소리와 하는 행동이 도저히 매치가 안 되는데……. 도대체 뭐 하는 건가 싶어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이쪽을 쳐다본다.
“뭐야?! 누구야! 누가 아리아와 나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거야?”
그는 손에 들린 망치와 담금질하던 검 하나를 내려놓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드웍프 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드워프다.
“아……. 저 안녕하세요……?
“뭐야, 인간인가……. 하여간 인간이란 것들은 도대체가 예의라는 게 없지. 그래서 무슨 일로 내 시간을 방해하는 거야?”
“아, 그게 물건 하나를 봐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망치 꺼내 봐.”
드웍프가 비르미스의 망치를 꺼내서 카운터 위에 올려둔다. 그런데 대장장이 벨라프는 비르미스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히려 망치를 꺼낸 드웍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러더니 말까지 더듬으며 입을 연다..
“이, 이럴 수가……. 대장장이의 신님을 이, 이곳에서 영접하다니……!”
벨라프는 드웍프의 앞에 오더니 존경하는 인물을 만났다는 듯이 급히 무릎을 꿇는다.
“비르미스께서 드디어 내 부름에 응답해주셨어…….”
“예……?”
응? 비르미스? 이게 뭔 소리지? 드웍프가 비르미스라고? 그는 분명 드웍프를 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비르미스가 대장장이들의 신이라면서 조금의 관련도 없는 드웍프를 왜 저렇게 부르는 거지……?
“이럴 게 아니라 안에 들어와서 앉으시지요! 당신을 영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을 이 굴속에서 보냈는지 모릅니다!”
드웍프는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벨라프가 부담스러웠는지 팔을 빼낸다. 그러나 드워프라는 종족 특성상 힘이 워낙 좋아서 외모만 비슷한 드웍프가 이겨낼 도리가 없다.
“저기 아저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전 비르미스인지 뭔지 그런 게 아니에요!”
“뭐?! 비르미스가 아니라고?!”
그는 다시 드웍프의 얼굴을 보면서도 긴가민가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하지만……. 비르미스 님과 생김새가 똑같은데……. 이걸 보라고……!”
벨라프가 비르미스라며 보여준 그림은 정말 드웍프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민성아 너 혹시 저런 거 보고 캐릭터 만들었냐?”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냥 수치를 극단적으로 만들다 보니 비슷하게 나온 것뿐인데요……?”
근데, 어쩜 이렇게 비슷하게 생겼냐…….
“거기다, 그 망치. 분명 비르미스님의 망치인데……. 정말 아닌 게 확실하십니까……?”
드웍프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비르미스의 초상화를 한 곳에 내팽개친다.
“이런 빌어먹을! 좋다 말았구먼……. 근데 어떻게 인간이 비르미스님의 망치를 들고 있는 거지?”
“이거 비르미스 망치가 확실한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그런 건 망치에 비르비스님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일반 제련품에 저 문양을 함부로 새겨 넣었다간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제련품이 폭발하거든? 잠깐 그 망치 좀 볼 수 있을까?”
그는 망치를 아기 다루듯 소중히 받아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그러더니 아련한 연인을 보듯 애틋한 눈으로 망치를 끌어안는다.
“어쩌다가 빛을 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빛을 잃어도 여전히 아름답군……. 정말… 온몸을 핥아주고 싶을 정도로…….”
그러더니 혓바닥을 얍삽한 뱀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한다. 드웍프는 몸서리치며 망치를 당장 빼앗는다.
“아악!! 뭐 하는 거예요? 제 망치에?!!”
“아, 이런…….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확실히 벨라프는 정신이 나간 것 같다. 장비에 성욕을 느끼는 이상 성애자일 줄이야…….
드웍프도 소름이 끼치는지 내 팔을 잡고 입구로 끌어당긴다.
“형님, 우리 빨리 나갑시다. 여기 더 이상 못 있겠어요.”
결국 드웍프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나가기 직전. 뒤에서 들려오는 벨라프의 한 마디가 내 발걸음을 곧장 멈춰 세운다
“그 망치의 빛을 살리고 싶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