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88화 (87/147)

<-- 그녀를 구하라 -->                               그들이 싸우는 동안 일레이나는 쓰러진 미실트를 돌보고 있었다. 이 기회를 노린다면 혼자서 도망갈 수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한 미실트가 마음에 걸려 그냥 갈 순 없었다.

이미 독이 온몸에 퍼져 시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미실트의 안색은 파리했다. 조금 전까지 미약하게 느껴지던 숨조차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미실트……. 미안해…….”

안타까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레이나가 따듯한 손길로 자신을 돌보는 동안 미실트는 꿈을 꾸었다.

오래된 꿈이었다.

온몸은 찢어지고 멍든 상처로 가득했다. 너무나 아파서 슬피 울었다. 더 이상 맞고 싶지 않다며 누군가에게 울면서 떼를 썼다. 그러자 이내 신성한 존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교황님이었다. 그는 울고 있는 자신의 자그마한 머리에 손을 얹고 말을 건넸다.

-‘미실트, 너는 사람들을 지키는 일을 하는 거란다. 네가 지금 고통받는 것은 흉악한 적으로부터 너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작은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약해지지 마라! 울지도 쓰러지지 마라. 미실트! 투레스탄이 언제나 너를 돌보실지니!’

교황의 목소리는 거부할 수 없는 신의 명령이 되어 복종을 맹세하게 했다. 그의 앞에 무릎 꿇는 순간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며 슬펐던 감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슬픔도, 기쁨도. 남은 건 오로지 인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주신 투레스탄’의 사도로서 지켜야 할 자신의 유일한 책무였다.

‘나 미실트. 교황의 명에 따라 주신 투레스탄의 의지를 받겠습니다.’

-‘투레스탄의 은총이 발휘되었습니다.”

-‘투레스탄의 13번째 사도로 각성합니다.’

-‘일레이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미……. 미실트……?”

일레이나는 미실트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놀란 눈을 떴다. 그녀의 혈색이 돌아오며 몸에서는 이윽고 광채가 뻗어나기 시작했다.

“으읏……!”

너무 눈이 부셔서 일레이나는 눈을 감았다.

“일레이나…….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널 지켜주마.”

미실트의 목소리라 생각되는 음성이 귓가에 스치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디 갔지……?’

일레이나가 두리번거리며 미실트를 찾고 있던 때, 한 곳에서 커다란 굉음과 동시에 캘피언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세파이어드!!!”

“헉…….”

뭘은 자신에 앞에서 환하게 빛나는 존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세파이어드의 공격력이 4000까지 치솟고 곧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신의 광채를 뿜어대는 존재가 나타나더니 세파이어드를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다.

‘뭐, 뭐지? 여신인가?’

자신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여신이라도 강림한 것 같은 존재감이 공간을 뒤덮었다. 그녀는 세파이어드를 날려버릴 때 사용한 다리를 천천히 내리더니 뭘을 내려봤다.

그녀가 내뿜는 성스러운 중압감에 뭘은 경직된 모습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크으윽…….”

세파이어드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변신은 완전히 풀려 인간으로 돌아왔다. 뭘은 생각했다.

‘차라리 짐승의 모습이 더 낫겠는데…….’

짐승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괴상한 몰골로 걸어 나오던 세파이어드는 주머니에서 체력 포션과 마력 포션 두 병을 꺼내 마셨다. 만신창이던 그의 신체는 금세 회복되었다.

값비싼 포션 세 병을 한 모금에 비워 낸 세파이어드는 땅에 무릎을 꿇었다.

땅이 우르륵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온갖 돌무더기가 세파이어드의 신체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끄으아아아아아!!!”

피부가 터져 나가고 피부가 돌덩이로 바뀌는 듯한 통증에 세파이어드는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데도 눈앞의 존재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라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세파이어드! 이번 일만 끝나면 보상 후하게 쳐줄게!”

캘피언의 목소리였다. 지금껏 세파이어드의 밥줄이 되어주는 인간답게 보상으로 사기를 북돋웠다.

“끄으으으으!!!”

시간이 지날수록 세파이어드의 몸집이 점점 커졌다. 돌덩이가 온몸에 다닥다닥 붙어 흡사 골렘처럼 보였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마을 하나쯤 폐허로 만들 수 있는 궁극의 기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후웅-! 촤아악-!! 섬광이 일었다. 그와 함께 허리춤에 찌릿한 느낌이 강도를 키우며 점차 강하게 느껴졌다.

“커허어어억…….”

세파이어드는 가로로 깔끔하게 양단 난 자신의 몸뚱이를 허망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내 하반신이 뒤로 넘어지며 상반신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미실트의 쭉 뻗은 발끝에선 태양처럼 밝은 빛무리가 이글거렸다.

‘자비 없네……. 변신하는 와중에 공격이라니…….’

뭘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경외감이 들었다. 아무리 변신 중이었다고 한들 그 단단해 보이던 신체가 파편 하나 튀지 않고 깔끔하게 잘린 것은, 그만큼 그녀의 공격이 위력적이라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저 여자,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광채에 휩싸인 그녀를 보고 있으니 어딘가 낯이 익었다. 뭘이 그녀를 보며 기억을 떠올리는 도중 미실트는 캘피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우, 우리 말로 할…….”

그걸로 끝이었다. 미실트가 멀찍이서 발을 휘두르자 캘피언은 하고 싶은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공중에서 떨어진 빛줄기에 온몸이 산화되어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뭘은 때마침 그녀가 누군지 떠올렸다.

* * *

저 여자……. 막스핀의 배에서 봤던 그 여자잖아?!

몇 달 전 막스핀의 배에서 만났던 여인……. 몸 한 번 만진 죄로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올 것 같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능숙한 발차기. 잘빠진 몸매. 빛나는 광채만 제한다면 그녀가 틀림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옷을 아직도 입고 있네.

부랑자 시절 건넸던 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다. 대부분 찢어져서 걸레 쪼가리라고 봐도 무방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내가 입고 있던 옷이 맞다.

그녀가 노려본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그때보다도 훨씬 강력해 보이는 그녀가 작정하고 공격해온다면, 손도 못 쓰고 죽을 판이다.

‘죽일 거라면 진작 죽였겠지.’

그렇게 판단하고 숨을 죽인다. 그러나 잠시 후…….

후욱-! 그녀가 제자리에서 사라지더니 단숨에 눈앞에 나타난다.

“엇?!”

화려한 빛무리를 감싼 그녀의 다리가 얼굴을 향해 휘둘러진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 두꺼운 얼음벽이 생성되며 발차기를 코앞에서 막아낸다.

파자작-!

‘얼음?!’

“아이! 아이!”

“아이즈!”

아이즈! 요 귀여운 녀석! 날 살렸구나. 그러나 안심할 때가 아니다. 이어지는 공격으로 얼음벽이 아작난다. 그녀가 아이즈를 향해 발을 휘두르자 아이즈는 눈가루로 변해 공중으로 흩날린다.

“안 돼!!”

-‘아이즈의 신체가 소멸하였습니다. 회복 상태에 들어갑니다.’

하아……! 회복 상태에 들어간다는 거 보니 다행히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다. 심장이 철렁했다. 그녀가 나를 향해 다리를 들어 올린다.

젠장…….

“일레이나는 너를 두려워하고 있다. 사라져라.”

그녀의 다리가 내 머리를 뭉개놓을 기세로 내리쳐진다. 부디 아이셀로 버틸 수 있는 피해였으면 좋으련만……!

그때, 연주 소리와 함께 셀리안이 우올로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더는 뭘 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나를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안 돼, 셀리안! 위험해요! 안으로 들어가!

아니나 다를까 연주 소리에 멈춰 있던 그녀가 발을 휘두르자, 위협적인 빛 뭉치가 셀리안을 향해 뻗어 나간다.

“꺄악!”

그녀가 쏘아 올린 빛무리는 우올로의 베리어마저 꿰뚫고 선체 난간을 박살 냈다. 셀리안은 부서진 선체 파편에 머리를 맞고 의식을 잃은 것 같다.

셀리안의 연주도 먹히지 않는 존재라니……. 나는 드웍프에게 귓속말로 우올로를 멀리 떨어뜨릴 것을 지시하면서 그녀를 경계한다.

“죽어라.”

“안 돼! 미실트……!”

그녀의 다리가 나를 향해 뻗어지고 일레이나가 그녀를 멈춰 세우려 했다. 그러나 너무 늦게 막은 탓에 공격을 멈추기는 어려워 보인다. 나는 아이셀을 이용해 그녀의 발차기를 막아낸다.

그녀에게서 뻗어 나온 빛이 아이셀과 부딪히는 순간 빅뱅이 터지듯 빛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4130의 신성 피해를 흡수했습니다.’

-‘57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힘을 풀었음에도 어마어마한 공격력은 아이셀의 피해 흡수량을 넘어 내 체력에 그대로 피해를 줬다. 심지어 가해지는 힘에 밀려나기까지 했다. 세파이어드의 공격도 제자리에서 버텨냈건만 그녀의 발차기는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공격을 날린 그녀는 광채가 사라진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 보석……. 그레이아 님의 힘인가……. 이해할 수 없군…….”

다시 한번 그녀의 다리에 빛무리가 일자 일레이나가 미실트의 팔을 붙잡는다.

“이제 그만해도 돼, 미실트. 나 괜찮으니까…….”

“너를 지킬 의무가 사라지면 이 힘도 사라진다. 후회 안 하겠나…….”

하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곧 그녀의 몸에서 광채가 희미하게 흩어지며……. 의식을 잃고 바닥에 풀썩 쓰러진다.

“미실트!”

빛이 사라지고 나니 그녀의 몸 상태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몸 상태로 그런 강력한 힘을 보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나는 일단 하연이와 미실트라는 여인을 내 우올로로 데려가 치료하기로 했다.

*

우올로 한편에 마련된 방에 들어서니 하연이가 미실트를 치료하고 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천천히 접근하자 하연이가 벌떡 일어나서 거리를 벌리고는 소리친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붕대……. 가져왔어요.”

내 손에 들린 붕대를 보고는 민망한 얼굴로 다시 앉는다.

“음…….”

내 작은 행동 하나에도 하연이는 적진에 홀로 떨어진 사람처럼 잔뜩 경계 중이다. 그 정도로 미움 살 짓을 많이 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단순 변명으로 넘어갈 행동들은 아니었으니까.

각인은 다행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형태만 간신히 유지할 뿐 복종도는 4%뿐이다. 호감도는 현재 3. 원래 0이었는데 이번에 도와준 걸로 그나마 오른 게 이 정도다.

하아……. 정말 일레이나가 하연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제 와서 보니 키랑 체형도 비슷하네.

“저 쳐다보지 마세요…….”

-‘일레이나의 호감이 1 하락했습니다. (현재 2)’

“아, 미안해요.”

이젠 쳐다만 봐도 떨어진다. 정말 미안하다. 하연아,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크흑…….

조용히 방을 나선다. 앞으로 하연이 얼굴을 어떻게 본담……? 어떻게든 이 악연을 풀긴 풀어야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그녀의 화를 풀어야 할까?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떠오르는 건 역시 그 방법뿐인데……. 게임에서 틀어진 건 게임으로 푸는 방법 말이다.

현재 하연이의 굴복은 14.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 굴복을 100 찍고 나면 호감도는 잘 오르는 편이다. 그렇다면 하연이를 먼저 굴복시키고 호감도를 뒤늦게 올려서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문제는 좋아하는 여자한테 이런 짓을 하는 게 도덕적으로 괜찮냐는 거지……. 이런 방법밖에 떠올릴 수 없는 나도 참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괜히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는…….

“후우…….”

그래……. 잠깐 스쳐 간 에르에니 누님의 말마따나 이건 게임이니까……. 난 강기단이 아니라 뭘이니까 한다.

대신 적당히 해야겠다. 너무 심하게 하는 건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복도에서 멍하니 생각하던 와중 페로렌이 내 허리를 쿡 찌른다.

“뭘, 좀 비켜줄래?”

“아가씨. 왜 그쪽에서 와요?”

저 방향이라면 굳이 페로렌이 볼일이 없는 장소다.

“셀리안, 걱정돼서 보고 왔어.

“아가씨가 병문안을요?”

“왜? 나는 그러면 안 돼?”

“아뇨 그건 아니지만…….”

평소 남 일에는 잘 신경 쓰지 않는 그녀가 셀리안의 상태를 보고 왔다기에 놀랐을 뿐이다.

“셀리안 상태는요? 괜찮아요? 아직도 못 깨어났어요?”

“지금 깨어났어. 물 마시고 싶다기에 물만 갔다 주고 쉬라고 나왔어.”

“아가씨가 물을요……?”

“아까부터 자꾸 기분 나쁘게 굴래?”

페로렌이 다른 사람의 수발을 든다고……? 이건 무슨 심경의 변화지? 좋은 쪽으로 변하니까 좋긴 하다만 갑자기 적응 안 되는데……?

일단, 셀리안한테 좀 가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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