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사기단-86화 (86/147)

<-- <로그인>되돌리고 싶은 일 -->                               허리 높이 정도 오는 자그마한 신발장에는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신발이 가득하다.

“신발이 조금 많지……? 고등학교 때 만들었던 거야.”

“이걸 다 직접 만들었다고?”

“학교 진학할 때 포트폴리오로…….”

“와……. 진짜 퀄리티 좋은데? 파는 건 줄 알았어.”

이런 걸 직접 만들다니……. 솜씨가 수준급이다.

가까스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거실 한편 높은 테이블에 갖은 옷가지가 널려있는 게 보인다.

“미안……. 요즘 작업 중인 게 있어서 조금 어수선해……. 정리하고 나온 줄 알았는데 깜빡했나 봐. 잠깐 앉아있으면, 밀크티 끓여줄게.”

사실 저곳 말고는 지저분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없다.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바닥에 얼굴을 비비면서 자고 싶을 수준이니까.

작업대를 슬쩍 보니, 바늘로 무언가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옷도 직접 만들어……?”

“어? 아……. 응 패션디자인과니까.”

“모델 아니었어?”

“나, 그런 거 못 하는 거 알잖아……. 또 모델이라 해도 옷 만드는 거 좋아하는 애들도 있고…….”

세상에……. 옷걸이가 하도 좋다 보니 하연이를 당연히 모델로 생각했는데, 옷을 만드는 일만 하나 보다.

작업대 옆을 보니 작업 중인 노트가 보인다.

“하연아 나, 이거 책 좀 봐도 돼?”

“아……. 부끄러운데……. 응. 괜찮아.”

그동안 노력했던 작업물이 그 노트 하나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옷의 디자인부터 재질, 마감, 바느질, 선을 어떻게 만들 건지에 대한 방법 등. 하나하나 손으로 세심하게 그려져 있다.

휴학 중이라고 들었는데도 열심히 하는구나.

이걸 보니 하연이가 정말 멋있어 보인다. 일 조금 다니고 힘들다고 포기한 나 자신과 비교된다고 할까……?

가장 최근에 공부했던 페이지를 펴보니, 남자 정장 하나가 있다. 그런데…….

“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인데 이거……? 아닌가……? 착각하는 건가? 하연이가 밀크티를 내려놓으며 내가 보고 있던 페이지의 옷에 관해 설명한다.

“아, 그거 연습 겸 작업했던 건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서……. 나중에 오빠한테 선물해주려고 디자인 좀 손보고 있었어. 그동안, 오빠가 나 도와준 것도 있고 하니까…….”

“어, 그래……? 나야 너무 좋지.”

좋긴 하지만……. 내가 착각하는 걸까? 이 디자인 분명 익숙하다. 세부적인 부분은 다르긴 해도……. 그냥 비슷하다고 하기엔 전체적인 디자인은 같은 옷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 뭐, 내가 패션에 대해 모르니까……. 그냥 비슷해 보이는 것뿐인가……?

*

“크흠, 하연아……? 네 방 구경 좀 해도 되니……?”

“보, 볼 건 없는데…….”

간신히 허락받고 그녀의 방문을 여니, 은은히 감도는 방향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언제나 설레는 숙녀의 방. 비록 침대와 작은 화장대뿐이 없다고 해도 남심을 자극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요소들이 아닌가…….

그런데, 방안에 한걸음 내디디니 꽤나 익숙한 물건이 보인다…….

“어? 하연아 저거……?”

“아, 오빠도… 이거 알지 않아? 가상현실 접속기.”

모를 리가 없지, 요즘 내 생활이 되다시피 하는 게임기니까.

“이거 되게 신기해. 이거 있으면 옷 만들 때 재료비 안 들고 연습할 수 있다고 해서 몇 달 전부터 대여해서 쓰고 있는데, 진짜 유용해.”

“아……. 이걸로 옷도 만들어? 게임 말고 그런 프로그램도 있나 보구나.”

“아니야, 게임으로 하는데 거기에 그런 기능들이 있어. 거기서 옷 만들어서 팔면 실제 돈도 벌 수 있고 재밌어. 오빠도 같이하면 좋을 텐데…….”

“오. 그래?”

어쩐지 등록금 마련한다면서 알바 하는 것 같지는 않길래 어떻게 하나 싶더니 이걸로 돈을 버는 거였구나? 꽤 똑똑한 방법이다.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하기야 내가 하는 게임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아, 그리고 신기한 게 이걸로 남자 만나면 나 긴장되고 경직되는 증상 심하게 안 나타난다?”

“그럼 증상 호전에도 도움 많이 되겠는데? 아, 잠깐. 설마 괜찮다고 남자들 막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야……! 그래도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라서……. 아직은 말만 할 수 있는 정도야……. 그 말 하나 때문에 이상한 남자한테 걸려서 고생 중이긴 하지만…….”

“이상한 남자……? 어떤 김민철 같은 자식이 우리 하연이를 괴롭힌 거야?! 내가 같이하면서 하연이 지켜줘야겠네. 무슨 게임 하는데?”

나의 과장된 액션에 하연이가 맑게 웃어 보인다.

“오빠 꼭 내 수호천사 같아.”

“하면 되지 네 수호천사.”

부끄러운지 마주치던 시선을 급히 피하고는 가상현실 접속기를 켠다. 나 좀 느끼했나……?

“나, 게임……. 이거 하는데…….”

“어? 정말 이 게임 해?”

“응, 왜……?”

“아, 아니 유명한 거라서 들어 봤어.”

게임기 외부에 달린 화면으로 게임 아이콘을 보여주는데, 내가 하는 게임이랑 똑같다. 이런 인연이 있나……? 아이디만 알아가서 나중에 놀라게 해줘야겠다. 다른 대륙에 있는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나 근데 지금 게임 접속하면……. 이상한 일이 진행될 것 같아서 켜지는 못하겠어……. 나중에 오빠 가고 나면 하려고…….”

“안 켜도 괜찮아. 아이디가 뭐야? 나도 나중에 하게 되면 같이 하자.”

아이디가 뭐냐는 말.

나는 그 말을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게임에서 만난 인연들을 소중히 대했어야만 했다. 그것이 설령 날 경비원에게 넘긴 여인이었을 지라도 말이다.

체리같이 이쁜 그녀의 두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한마디.

“일레이나.”

“이……. 일레이나……?”

그 말에 나는 작두 위를 걷듯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잘못 들은 거야……. 잘 못 들었을 거야.

“아이디가 일레이나 맞아……?”

“응……. 왜? 잠깐만… 이 화면으로 내 캐릭터 볼 수 있나……?”

아이디……. 아이디만 같은 걸 수도 있지. 그래, 그럴 거야. 그러나 그녀가 가상현실 접속기에 몸을 싣자 곧 그녀의 캐릭터가 외부 화면으로 보인다.

-‘오빠 나 보여?’

캐릭터 로비 창에서 하연이가……. 아니, 일레이나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정말 하연이가 일레이나였다고……? 세상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내가 그동안 하연이한테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지금, 이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둘 되짚어 보지만 일레이나에게 잘 보였던 일이라고는 처음에 구해준 것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짓들뿐.

신이시여……. 나는 왜 진작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왜 게임 속 일레이나와 하연이의 분위기가 비슷했다는 걸 알지 못했을까요……? 왜 하연이의 노트 속 정장이 일레이나가 만들어준 게임 속 정장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더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저는 어찌하면 좋은 걸까요……?

신이시여 부디 응답해주소서…….

*

일레이나가 하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뒤로는 계속 멍해져서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내가 할 것은 단 하나. 게임기를 켜고 일레이나를……. 아니, 하연이를 되찾고 나에 대한 인식을 좋게 만들……. 크흑……. 가능할까……?

어차피 해야 될 일이니까 해야지…….

“형님 오셨네요?”

“노예 시장으로 가자!”

자세한 설명 없이 노예시장으로 즉시 향한다. 따로 전서구가 없던 걸로 보아 아직 하연이는 다른 사람에게 팔려나간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수수료를 물고서라도 되찾아야 한다.

*

“예? 돌려받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팔리려면 15일 정도 걸린다면서요?”

기껏해야 열흘을 조금 넘긴 시점인데, 경매에 올라갔다는 말인가? 믿을 수가 없다. 중개인은 골치 아픈 듯 머리를 벅벅 긁는다.

“팔린 게 아니야! 도망갔어! 굉장히 비싸게 팔렸는데, 네 물건이 다른 노예랑 같이 날랐다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매자한테 손해배상까지 하게 생겼어! 우리도 돌아버리겠다고 증말……!”

도망친 모양이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찾긴 해야겠지.

“어디로 갔어요? 알 방법은 있나요?”

“우리 애들이 쫓아가긴 했는데 어떻게 될진 모르겠어. 같이 도망간 녀석이 엄청 강해서 말이야.”

“위치 알려주세요.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그가 찍어준 위치를 따라 서둘러 일레이나의 뒤를 쫓는다. 대체 누구랑 탈출한 걸까? 남자는 아니겠지……? 아……. 이와 중에 질투하고 있냐 이 등신아…….

* * *

반쯤 타오르고 무너져 내린 건물들 사이로 일레이나와 미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을 쫓는 이는 없었지만,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하아……. 더는 못 뛰겠어…….”

너무도 오래 달린 탓에 일레이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게임을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래 뛴 날이었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폐부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그대로 재현됐다.

일레이나가 말했다.

“미실트, 너 혼자 도망가……. 난 그냥 근처에 숨을게. 숨을 곳 많으니까 괜찮을 거야.”

만에 하나 죽게 되면 자신은 탈출을 시작했던 지점으로 되돌아가서 잡히겠지만, 그렇다고 미실트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미실트는 혼자 달아나지 않았다.

“미실트. 일레이나 지켜……. 적. 죽음”

미실트의 몸은 일레이나를 지켜오면서 이미 만신창이였다. 뒤따라오는 추격자 중 히든 직업 보유자인 변형 술사가 있던 탓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도 미실트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일레이나의 옆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잠시 후 기척이 느껴졌다. 미실트는 적들이 오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아직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지만, 분명 그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곧 폐허의 돌더미 너머로 우올로 3척이 나타나더니 몇 사람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찾았다.”

노예시장에서 일레이나를 사들이기 위해 3억이라는 거금을 지급한 캘피언이었다. 그의 옆에는 7명의 하수인이 있었는데, 그 한 명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아니 어쩌면 한 마리라고 부르는 게 맞는 듯했다.

그는 두 발로 서있다 뿐이지 인간이라 부르기 어려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툼한 털이 엉켜있고, 검은 사자의 갈퀴는 목 주변에 빳빳이 뻗쳐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이빨에선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검붉은 액체가 똑똑 흘러내렸다. 생명체를 10분 이내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독액이었다.

변형술사 세파이어드. 그가 바로 미실트를 만신창이로 만든 주범이었다. 철창을 부술 정도로 강력한 발차기도, 많은 수의 적을 7초 만에 때려눕힌 화려한 몸놀림도 그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미실트로서도 이런 강력한 적을 상대해본 적은 희미한 기억 속에나 존재했다. 이미 한 번의 부딪힘 끝에 그의 독에 감염된 터라 전신이 스스로 떨리고 있었다.

“잡아들여.”

캘피언의 명령이 기폭제라도 된 듯 세파이어드는 폭발적인 속도로 달려들었다.

미실트는 일레이나를 뒤로 물리고 죽을 힘으로 굵직한 손톱을 맞받아쳤다.

콰아악-! 묵직한 발과 빠르고 위협적인 손톱. 어떠한 무기도 사용되지 않았건만, 두 대상이 맞부딪히며 나는 파열음은 그야말로 병기의 부딪힘이라 봐도 무방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미실트의 발이 두꺼운 털을 가로질러 세파이어드의 턱을 강하게 올려 찼다. 세파이어드는 공격을 그대로 맞으며 손톱을 위로 그었다. 미실트의 가슴에 커다란 손톱자국을 새겨졌다.

그러나 미실트 역시 고통에 익숙한 몸.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세파이어드의 관자놀이를 뒤꿈치로 가격했다.

“크으!!”

세파이어드는 뒷걸음질 치면서 미실트의 다리를 낚아채 강하게 던졌다. 벽에 부딪힌 미실트는 풀썩 쓰러져서는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독이 꽤 많이 퍼진 탓인지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주먹 쥔 손에는 두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실트는 고개를 털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비틀거렸다.

둘의 싸움이 지속할수록 불리한 쪽은 미실트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깊이 느끼고 있었기에 무리하면서까지 일어나 달려들었다.

쿠구궁-! 이미 무너져 내리는 폐허는 둘의 싸움으로 인해 더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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