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를 위한 투쟁 --> 그녀는 마차가 집 근처에 다 와 가서야 겨우 진정했다. 어찌나 후련하게 울었던지 그녀가 얼굴을 묻고 있던 크라바트는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이 흠뻑 젖었다.
그녀는 지금 눈과 코가 시뻘겋게 변한 채 멍하니 앞만 보고 있다. 그렇게 울어댔으니 머리가 띵하겠지.
마차가 도착하고 나서 내리려는데 그녀가 독백하듯 말을 꺼낸다.
“사실 듣고 있었어…….”
“네?”
“아까 화장실 갔을 때 영애들이 내 얘기 한 거…….”
역시 예상대로 듣고 있었나 보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 죽겠는데, 틀린 말이 아니니까…….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서 남자들한테는 눈길도 못 받고, 부모님이랑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작위 계승도 못 받은 주제 귀족 행세나 하려고 영애들 모임에 껴있는 것까지 전부 맞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참으려고 했는데…….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녀가 어린아이 취급을 싫어하는 이유. 곁에 사람을 두려 하지 않는 이유. 일부러 고압적인 행동을 취하는 이유. 모두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숨기기 위한 연막일지도 모른다.
“결투,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건 내가 너무 억지 부렸어. 뒷수습은 내가 할 테니까 싸우기 싫으면…….”
“아니요. 할 겁니다. 결투.”
그녀가 뒷수습한다고 해봤자 결과는 그거다. 자신을 욕보인 영애들 앞에 정식으로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 그런 치욕을 겪은 뒤 사교 모임에서 퇴출당하는 것.
그녀가 어떻게 되든 솔직히 나야 상관없다지만, 결투 대상이 날 거지라고 무시했던 금발의 수행이라면 내 마음을 동하기엔 충분하다.
날 부랑자라고 욕하는 건 참아도, 거지라고 부르는 건 못 참는다고! 그놈도 혼내주고 페로렌도 지켜주고 겸사겸사다.
그러나 페로렌은 내가 못 미더운 눈치다.
“정말 하겠다고? 상대는 기사단 출신이야. 너 목 날아갈 수도 있어. ”
“목만 날아가는 정도면 할 만하네요. 대신 제가 이기면 소원 하나 들어주십시오.”
“소원……? 뭐……. 어렵지 않은 거라면야.”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이기면 소원 들어주기 약속한 겁니다?”
“알았다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좋았어. 거래는 성립됐고, 이제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럼 이왕 싸우기로 한 거 반드시 이겨. 만약 지면, 잠자는 시간 1시간 단축시킬 줄 알아.”
그 성격 어디 안 갔구나. 다 울고 나니 살아나는 건 또 금방이네. 안 그래도 생존을 위한 최소 숙면 시간만 간신히 주고 있으면서 그걸로 압박을 가하는 건 진짜 너무하잖아?
잠이야 어차피 평소에도 조금씩 자니까 문제없다손 쳐도. 그만큼 정신노동 시간이 늘어난다는 의미니까……. 혹시라도 내가 지게 되면……. 아니, 지는 건 생각하지 말자.
결투는 앞으로 2주 후. 그동안은 기사단을 상대로 이길 방법이나 생각해야겠다.
*
2주 후.
도를렌 백작가 저택 뒤편엔 넓은 검술 훈련장이 있다. 훈련장 둘레엔 검흔이 잔뜩 새겨진 나뭇더미 5개가 박혀 있고, 그 중앙엔 대련을 펼칠 수 있는 원형의 대련장도 있다. 그리고 그 대련장엔 곧 이 몸의 모가지를 뎅겅 썰어버릴 전직 기사단도 존재하지…….
확실히 국교 기사단이라는 화려한 전적답게 검을 잡고 서 있는 자세가 여느 똥폼만 잡는 머저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견고하고 빈틈없다.
이제 곧 저놈과 맞붙겠구나…….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서 더 긴장되네.
뭐니 뭐니 해도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 그 말을 증명해 보이듯 페로렌의 수행원인 나와 미엘로나 수행원인 금발 청년의 결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있다. 주로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영애나 이 집의 하수인들이다.
백작은 바빠서 오지 못했지만 그를 대신해 그의 보좌관이 이번 결투의 심판을 보기로 했다.
결투에 앞서 지난 시간 나는 테드에게 훈련받았다. 사실 그가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훈련 시켜준다고 할 때는 의심을 품었다.
‘과연 전직 국교기사단을 무찌를 정도로 강할까?’, ‘그보다 약하면 내가 훈련을 받는 의미가 있나?’ 하지만 결국 이런 걱정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훈련에만 열중했다.
그의 훈련법이 먹히든 안 먹히든 내가 직접 느낀 강함으로 따졌을 때, 혼자 준비해서 싸우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리고 테드의 그 자신감. ‘국교 기사단이 뭐 어쨌다는 말이지?’라는 패기 넘치는 말 하나로 그에게 신뢰가 확 가더라.
그래서 나는 지금 그에게 배운 대로 나무를 깎아 만든 T자형 지팡이를 들고 서 있다. 물론 장검 든 기사단을 상대로 말이다.
“곧 시작할 텐데……. 막대기로만 손 푸는 건 너무 가볍지 않나?”
“그러게 말이야.”
사람들은 대련에 앞서 내가 손목을 풀기 위해 이걸 들고 있는 줄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진짜 제 무기라고요.
[나무를 깎아 만든 신사 지팡이(하급)]
공격력: 13 (10~15)
내구력: 5/5
요구 레벨 1 / *요구 힘 1
희소성: 일반
〈내용〉
부랑자 뭘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막대기를 편의에 맞게 깎아 만든 1m 남짓의 나무지팡이다. 성능은 기대할 수 없다.
장검을 상대로 고작 이 정도의 나무지팡이라니……. 내가 봐도 터무니없다. 하지만 손에 안 맞는 무기보다는 이게 차라리 낫긴 하다. 장검은 힘이 부족해서 능력치도 많이 깎이니까 말이다.
“할 수 있어.”
스스로 최면을 건다. 나만 잘 싸우면 돼. 지팡이로도 충분히 가능해.
테드가 말하기를 사람이 어느 경지에 오르면 무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내 수준이 뛰어나다면 상대방이 몸집만 한 대검을 들고 있어도 젓가락 수준의 얇은 막대기 하나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단다.
그래서 강아지풀을 쥐여주면서 싸우자고 했더니, 강아지풀을 들고 주먹으로 날 패더라. 무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에 신뢰가 확가는 순간이었다.
[발로그 지팡이술]
히든 기술. 게오르테드 발로그가 창시한 지팡이를 이용한 싸움법입니다. 살상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민첩한 공격과 반격으로 상대를 무력화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빠르고 화려한 것이 특징입니다. 지팡이를 이용한 전투가 능숙해집니다.
해당 기술은 현재 카리스마와 민첩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자질〉1단계 개화 중
-적 대상에게 주는 관절 피해가 30% 상승합니다.
〈시너지〉
-지팡이술의 기본 공격속도가 20% 상승합니다. (‘기본 검술’과 시너지)
〈파생〉
공격권
이것이 테드에게 새로 배운 기술이다. 배우면서 〈시너지〉라는 새로운 효과가 나타났는데, 이는 현재 가지고 있는 기술들이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특별한 능력이 추가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파생〉은 말 그대로 가진 기술에서 파생된 기술이다. 파생은 주로 히든 기술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제 테드에게 배운 이 지팡이술을 이용해 적을 상대해야 한다.
“결투자 위치로!”
드디어 결투의 시간이다. 도를렌 백작 보좌관의 지시 아래 미엘로나의 수행원과 마주 선다. 승리 조건은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거나, 상대를 행동 불능으로 만드는 것.
실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보니, 싸우다 죽을 수도 있는 결투다.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이게 목숨을 지켜줄 거란 보장도 없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내 아까운 목숨을 여기서 낭비할 생각도 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결투임에도 상대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정말 그런 무기로 싸울 거냐? 아니면 단순한 눈속임이냐?”
그의 물음에 대답할 의무는 없다. 나는 그저 이 상황을 극복해 나갈 움직임만 머릿속으로 되뇔 뿐이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이 고조된다.
“결투 준비!”
준비 신호에 따라 자세를 잡고…….
“결투 시작!”
시작 신호와 동시에 제자리에서 빠르게 지팡이를 내지른다. 막대기의 끄트머리가 허공에 점 하나를 달랑 찍는다. 그와의 거리는 3m로 닿을 리 없다.
“흥, 뭐하자는 거지?”
내 지팡이가 허공을 찌르자 그는 비웃음을 흘리더니 곧장 달려든다. 그가 칼을 사선으로 내리긋는다. 나를 노린 공격이 아닌 내 무기를 잘라버릴 심산인 듯하다.
그렇지만, 네놈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조금 전 내 행동은 공격이 아니라, 지팡이술의 파생기인 ‘공격권’을 만들어 놓은 행위란 사실.
[공격권]
파생 기술. 무기로 허공에 점을 찍어 무기 길이만큼의 원형의 공격권을 생성합니다. 공격권 안의 대상에게 반격 피해가 50% 증가합니다. 치명타 확률이 10% 증가합니다. 치명타 피해가 50% 증가합니다.
해당 기술은 현재 민첩과 힘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자질〉1단계 개화 중
-공격권안의 대상에게 주는 관절 피해가 20% 상승합니다.
그의 장검이 내 지팡이를 내려치는 순간, 지팡이를 잽싸게 뻗어 무기를 쥔 그의 손을 빠르게 치고 빠진다. 딱-! 뼈 때리는 소리는 언제나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그는 멈춤 없이 연속으로 공격을 퍼붓는다. 뼈를 제대로 때려서 아플 텐데도 아직은 가벼운 듯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그대로 맞받는다.
차악-!
서늘한 칼날이 내 목을 노리고 그어진다. 지팡이로 그의 검날을 비스듬히 빗겨낸다. 그가 칼을 회수할 때 한 차례 손목을 때린다.
그는 바로 이어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감행한다. 나는 지팡이를 양 끝을 감아쥐고 검을 밀쳐낸 후, 그의 손목을 재차 가격한다. 딱-!
세 차례 같은 부위 집중 공격.
“큿!”
집요하게 파고드는 같은 공격에 처음으로 아픈 듯한 음색을 흘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나무 막대기라지만 있는 힘껏 쳤는데, 인간이라면 아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팡이술과 공격권의 자질 개화로 인해 관절에 받는 피해는 더욱 클 것.
특히나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손 부위만 공격하기에 방어력을 일부 무시하는 효과도 있다. 공격권 시전 후에 일정 공간을 벗어나면 풀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효과만큼은 발군이다.
“뭐야? 기사단 출신이 영 빈약한데……?”
그가 공격을 잠시 멈추자 도발을 시도한다. 사실상 녀석이 먼저 들어오지 않으면 공격권은 무용지물이다. 그럴 땐 최선을 다해 도발하는 것이 이번 결투에서 내 입이 맡은 임무다.
“흥. 나를 뭘로 보고 유치한 도발에 놀아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칼을 휘둘러 온다. 후후, 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몸은 제법 솔직하지 않은가?
“그래 들어와!”
일곱 차례 연격이 순차적으로 그어진다. 생각 외로 날렵한 공격 탓에 스태미너 소모가 크다. 그렇지만 전혀 못 피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공격권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의 공격을 조금씩 피해낸다.
“흐읍!
연속으로 이어지는 공격에 반격 타이밍이 영 잡히지 않는다. 지팡이로 막고 쳐내자니 내구도가 걸리고 계속 피하기만 하자니 공격할 틈이 없고. 이럴 땐 방법이 있지.
“하압!”
그의 공격이 연달아 이어지는 와중에 나는 억지로 공격을 찔러넣는다. 자세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내지른 공격이다 보니 엉성하기 짝이 없다. 상대도 그걸 느꼈는지 가볍게 쳐내려 한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그의 검이 지팡이를 쳐내기 직전, 나는 순간적으로 지팡이를 내려서 거꾸로 돌려 잡는다. 그리고 T자형 지팡이의 손잡이를 이용해 그의 다리를 걸고 재빨리 낚아챈다.
휙-! 그가 발라당 넘어진다.
“큭!”
그가 손잡이에 걸려 넘어지자. 발로 그의 가슴을 밟고 지팡이 끝으로 그의 목젖을 겨냥한다.
훗, 어떠냐? 이것이 바로 내가 테드에게 수차례나 걸려 나자빠진 기술이지. 대부분의 사람은 연속 공격을 할 때 보폭이 어수선해지기 마련이다. 그 취약점을 간파에 상대의 자세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기술.
그것은 전직 기사단이 상대라 해도 예외 없이 걸려든다.
“패배를 인정하시지? 아니면 평생 죽만 먹게 해줄 수도 있어.”
그의 목젖을 보다 위협적으로 짓누른다.
“크윽…….”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뒤쪽에선 페로렌이 쾌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하하, 미엘로나 영애. 제 수행원이 댁의 수행원을 무참히 짓밟고 있네요. 이미 승부는 벌써 난 것 같은데요?”
“우훗, 페로렌 영애. 아직 결과도 안 났는데 설레발이라니 꼴사납네요.”
그러나 미엘로나의 태연한 말투와 달리 내 상대는 결국 검을 손에서 놓는다. 그 말인즉슨.
“좋아 이겨……!”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그가 몸을 비틀어 두 다리를 하늘로 차올린다. 본능적 위협에 몸을 급히 물러서 보지만, 이미 두 다리가 내 턱을 노리고 바로 아래까지 밀어친 상황이다.
“크억!”
-‘15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태이상 ‘일시기절’에 걸렸습니다.
그는 곧바로 내려놓은 검을 주워 내 복부를 수평으로 갈긴다. 그러나 상태이상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탓에 피할 수가 없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