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죽여주길 원하오?
프리즘 용병단이 저택을 떠나자마자 라이트는 곧장 켄트 자작을 호출했다.
“자작님께서도 보셨겠죠? 놈들이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물론 봤습니다. 이미 미행하도록 해 두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눈치 빠른 켄트의 대응에 라이트는 크게 만족했다.
그동안 두 사람은 붉은 대지에서 자신들에게 치욕을 주었던 두 도적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의 정체를 어떻게 밝힌단 말인가.
유일한 단서는 ‘지나가던 의적’이라는 타이틀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급조한 느낌이
팍팍 들었다.
결국 그들은 직접 도적들을 찾는 대신, 놈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행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프리즘 용병단.
도적들을 만나기 전 우연히 마주쳤던 용병단이다.
라이트와 켄트가 프리즘 용병단에게 촉각을 곤두세운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당시 그들 주변에 있던 무리는 오직 프리즘 용병단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라면 라이트와 기사들에게 앙심을 품을 만한 이유도 충분히 있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프리즘 용병단을 은밀히 찾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놈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줄이야.
“자작님께선 ‘지나가던 의적’이란 놈팽이들이 관연 어떤 놈일거라 생각하십니까?”
켄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당시 놈들은 갑옷으로 변장을 한데다 목소리까지 변조하여 정체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만?”
“요엔님의 정령술을 막았던 ‘지나가던 의적 비’라는 녀석의 목소리가 검은 장발
소년의 음성과 비슷한 듯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샤바’라는 그 소년과 용병단의
리더인 제이콥이라는 자가 꾸민 일이 아닐까 의심됩니다만.”
“흐음. 제 생각 역시 그렇습니다.”
라이트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을 단숨에 제압하던 ‘지나가던 의적 에이’라는 놈의 실력은 실로 대단했다.
기사만 무려 열 명이었다.
그중 켄트 자작은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런 기사들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적어도 소드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자라는 소리가 된다.
프리즘 용병단을 면밀히 살펴본 라이트는 흉수로 제이콥을 지목했다.
호젤은 여자고, 프리먼은 마법사다. 고든은 덩치가 너무 컸다.
병규는 비쩍 말라 보이는데다, 얼굴 역시 투쟁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아예
용의 선상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그렇게 일일이 따지고 보니 남는 것은 제이콥뿐이었다.
“흐흐. 하긴 주범이 누구건 상관없는 일이지. 모두 다 처리하면 그뿐이니까.”
라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음침하게 웃었다.
켄트의 낯빛이 조금 굳어졌다.
가끔이지만 라이트의 잔인함을 엿보게 될 때마다 섬뜩한 생각이 들곤 했다.
한편 라이트는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놈들을 어떻게 잡아 온다?’
기사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
너무 눈에 띄는데다, 만약 정말로 그 도적놈이 프리즘 용병단에 있다면 잡으러 갔다
오히려 당할 수도 있다.
믿었던 켄트와 정령술사인 요엔마저 깨끗이 당해 버렸으니 그가 가진 패는 모조리
소용없게 된 셈이다.
‘다른 게 필요해. 깔끔하고 뒤탈 없이 일을 처리해 줄 놈들이.’
잠시 생각하던 라이트는 손가락을 튕겼다.
“켄트 경.”
켄트가 가까이 다가오자 라이트는 그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전했다.
“허어!”
조금 놀라는 것 같던 켄트의 얼굴 위로 오만한 미소가 서렸다.
“어떤가요? 제 생각이.”
라이트의 물음에 켄트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확실히 그들이라면 놈들을 능히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보고 드리지요.”
켄트는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라이트는 입가에 퇴폐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떠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곧 그 천한 놈들이 내 발아래 뒹굴게 되겠군. 흐흐흐흐.”
갑옷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켄트 자작은 곧장 트라우마의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트라우마지만 그 뒷골목은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취한 비렁뱅이들이 쓰레기 더미 옆에서 뒹굴고 있었다. 비쩍 마른 개들이 하늘을
보며 캥캥 짓고, 거무튀튀한 땅바작엔 역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고여 있었다.
켄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골목 안으로 걸어갔다.
“밝고 활기찬 도시? 흥. 불과 한 발짝만 벗어나도 시궁창이 펼쳐지는군.”
트라우마는 붉은 대지를 끼고 있음에도 활기가 가득 찬 도시로 대륙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아마스 신성제국과 바호크 공국의 가교 역할을 하며 척박한 환경을 극복해 낸 위대한
도시.
자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경제도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어둠
또한 짙어지는 법.
범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쫓아 이리 떼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이리 떼들 중에는 어세신들도 있었다.
어세신.
청부를 받고 누군가를 죽이는 전문 암살자.
대륙에는 수많은 어세신 길드가 존재했고, 그중 제법 유명한 길드가 트라우마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블러드 콜렉터.
규모만으로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길드다. 그러나 길드에 속한 어세신
개개의 실력은 능히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뛰어났다.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켄트가 찾아간 곳은 간판도 없는 지하 술집이었다.
들어서자 맥주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술집은 겉보기와 달리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좁은 실내에는 덩치 큰 사내들이 가득했다. 켄트가 들어서자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방인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눈길들.
켄트는 느긋하게 바텐더 쪽으로 걸어갔다.
다소 불량스러워 보이는 바텐더의 귀를 당겨 몇 마디 속삭이자 조용해졌던 실내가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이쪽으로......”
바텐더는 켄트를 창고로 안내했다.
술통 몇 개를 두드리자 벽장이 스르르 열렸다. 그 안쪽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켄트가 들어가자 벽장이 다시 스르르 닫혔다.
암흑.
켄트를 맨 처음 맞은 것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암흑이었다. 불길함을 담은 어둠의 장막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뒤이어 소름 끼치는 침묵이 그의 전신을 사로잡았다.
술집위 내부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는데, 놀랍게도 뒷문 안쪽은 전율이 일 정도로 고요했다.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어두운 실내를 응시하던 켄트는 조용히 발을 옮겼다.
얼마쯤 걸었을까.
어둠의 장막 한곳이 출렁였다.
작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어둠 저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기운만으로도 켄트는 대략 상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키, 불편한 듯 보이는 움직임.
‘이런 곳에 아이가?’
후욱.
작은 소음과 함께 흐릿한 불빛이 떠올랐다.
저쪽 사람이 초를 켠 것이다.
“흐음.”
켄트는 침을성을 흘렸다.
암흑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아이가 아니었다.
세상에 이렇게 생긴 사람이 있다니.
회색으로 탈색된 지저분한 백발이 어깨 아래까지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은 송충이가 지나간 듯 징그러운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등은 아이라도 업은 것처럼 툭 불거져 나왔다.
난쟁이에 꼽추.
그의 키는 고작 켄트의 허리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가뜩이나 작은 키가 굽어진 그의 등 때문에 더욱 작달막해 보였다.
“흘흘흘.”
난쟁이 꼽추가 괴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군.”
“.......”
켄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너무도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다. 철판을 벅벅 긁어대는 것 같았다.
난쟁이 꼽추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뜩이나 일그러진 켄트의 인상이 더더욱 찌그러졌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켄트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아야만 했다.
“흘흘흘.”
켄트의 불쾌한 표정을 보지 못한 듯, 난쟁이는 흐릿한 초를 든채 연신 괴이한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너머로 난쟁이의 탁한 동공이 일렁거렸다.
두부 찌꺼기 같은 회색 멍울이 난쟁이의 눈동자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장님이군.’
켄트는 그의 눈이 멀었을 것이라 단정했다. 그만큼 겉으로 보기에도 난쟁이의 눈동자는 지독하게 망가져 있었다.
“흘흘. 손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난쟁이가 절뚝절뚝 걸어오며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켄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난쟁이는 머리숱이 듬성듬성한데다, 등은 꼽추요, 눈은 장님에, 얼굴은 추악하기 이를 데 없다.
응당 사람이라면 아무리 못생겼어도 어디 한 군데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눈앞의 꼽추는 그야말로 추악함으로 똘똘 뭉친 노인네가 아닌가.
혐오감이 치밀어 토악질이 날 지경이었다.
“험험.”
크게 헛기침을 한 켄트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기 위해 왔다.”
“흘흘. 절 따라오시지요.”
꼽추 노인은 작은 촛불을 흔들며 어둠 속을 헤치며 걸어갔다.
그의 손에 들린 등은 손님들을 위한 배려라고 봐야 했다. 봉사로 보이는 노인은 길을 찾기 위함인지 발을 질질 끌었기 때문이다.
우뚝.
노인의 뒤를 조용히 따르던 켄트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섰다.
느낌이 좋지 않다.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전신에 끈쩍끈쩍 달라붙었다. 그렇다고 실제로 무언가가 몸에 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을 예전에 몇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살기.
일류 검사인 그를 움츠러들게 할 만큼, 어둠 저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강렬했다.
처벅.
켄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살기가 한층 농밀해졌다.
목을 조여 오던 기운이 이젠 가슴 아래까지 지그시 압박해 온다.
한 곳이 아니다.
사방의 공간에서 동시에 몰려오고 있었다.
이제 상대의 의도는 확실해졌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접근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지그시 암흑 속을 노려보고 있던 켄트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찾아온 것 같군.”
그는 실망감이 덕지덕지 붙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주적거리며 걸어가던 꼽추 노인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흘흘. 무슨 소리이신지.”
기괴한 웃음이 어둠 속에서 왕왕 룽렸다.
켄트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은밀히 일을 처리해 줄 실력 좋은 어세신들을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여긴 그런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곳인 것 같군. 이렇게 대놓고 살기를 풀풀 날리는 걸 보면 말이야.”
켄트는 차갑게 비웃으며 뒤돌아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크게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등 뒤에 있어야 할 꼽추 노인이 어느새 그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
노인의 움직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그는 설마 노인이 이 정도나 되는 고수일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
만약 이곳이 피 튀기는 전장이었다면 그는 이미 죽은목숨이나 다름었었다.
켄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녀석들. 지금까지 날 시험하고 있었군.’
괘씸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안목을 속일 정도라면 충분히 일을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켄트는 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철렁.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났다.
꼽추 노인은 발을 끌며 가죽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상당한 양의 금화였다.
그런데 켄트가 던진 다음 말이 더 놀라웠다.
“지금 것은 의뢰비의 절반이다. 선금인 셈이지. 나머지 절반은 의뢰가 마무리되면 그때 지급하겠다.”
꼽추 노인의 퀭한 눈에 광채가 서렸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죽 주머니 안의 금화만으로도 상당한 액수였다. 그런데 이것이 고작 절반이라니.
“히히히. 냄새가 좋지 않군. 구린 냄새가 나.”
꼽추 노인은 으스스한 목소리로 웃었다.
귀신의 호곡성 같은 노인의 웃음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누굴 죽여주길 바라오?”
괴이하게 웃기만 하던 꼽추 노인이 추레한 음성으로 물었다.
켄트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간신히 대화할 준비가 된 것이다.
“버릇없는 용병단 하나를 손봐 주었으면 좋겠다.”
“......용병단의 이름은?”
“프리즘 용병단.”
“.......”
노인의 탁한 눈동자가 눈자위를 빙글 돌았다. 프리즘 용병단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프리즘 용병단.
다행히 들은 기억이 있었다.
소규모 용병단치곤 제법 명성이 자자한 녀석들이다.
특히 용병단의 리더는 요주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엄청난 의뢰비에 비하면 너무도 쉬운 상대였다.
그때 켄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들을 모두 생포해 주길 바란다.”
꼽추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언제 그랬나 싶게 곧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원래의 표정이라 해도 그다지 호감가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3일 후, 다시 이곳으로 오시오.”
켄트가 돌아간 후, 노인의 굽은 허리가 돌연 곧게 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으로 목 언저리를 뜯자 검버섯과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 피부마저 간단히 벗겨져 나갔다. 생피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에는 놀랍게도 근육 대신 새로운 피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백태가 낀 눈동자 또한 손으로 한 번 쓱 문대는 순간 섬뜩한 광기를 뿌려대는 적색 눈동자로 변했다.
그는 처음부터 노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후. 오랜만에 흥미로운 일거리가 생겼군.”
그의 이름은 이카루가.
어세신 길드, 블러드 콜렉터의 수장이었다.
라이트의 사주를 받은 켄트가 블러드 콜렉터와 접선하기 며칠 전, 이두라센 대륙의 동부에 위치한 바호크 공국의 외딴 저택에서도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불 꺼진 저택의 내부.
긴 은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한 청년이 굵은 기둥 사이에 묶여 있었다.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그의 전신은 굵은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발마저 쇠사슬로 포박당한 채로 청년은 아예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상태였다.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게다가 청년의 경우, 쇠사슬에 매달린 팔목에 전 체중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그 고통이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팔이 당겨지는 고통에 엉엉 울며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마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너무도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매달린 지 이미 열흘, 정말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사내가 매달려 있는 홀은 무도장을 열어도 될 만큼 넓었다. 그러나 그 넓은 홀을 차지하고 있는 가구는 고작 소파 몇 개가 전부였다.
그것이 어두운 실내와 더불어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소파 위에는 5인의 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더러는 반듯하게 앉아 있고, 더러는 편안하게 눕기도 했다.
이들 다섯은 하나같이 개성적인 외양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단 하나, 공통적인 점은 기둥 사이에 매달린 청년에게 비상한 관심을 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벌써 몇 시간째 허공에 매달린 청년과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카리오스. 아직도 길드를 떠날 생각인가?”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는 노인이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리오스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반듯이 세워 노인을 바라보았다.
“전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크리티컬.”
담담한 그의 대답에 유난히 키 작은 사내 하나가 언성을 높였다.
“바보같이. 넌 속은 거야. 네 검이 스치지도 못했다고? 분명 마법 같은 걸로 너의 오감을 마비시켰을 테지. 그렇지 않고서야......”
카리오스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내가 마나의 변동조차 눈치 cowl 못할 만큼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이나?”
키 작은 사내는 불만인 듯 입을 삐죽거렸지만 끝내 한마디도 안했다. 그 대신 붕대를 온몸에 감은 음침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크크. 그래서 떠난단 말인가? 고작 한 번 졌다는 이유로?”
“...... 때로는 한순간의 깨우침이 10년의 학업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던져 주기도 한다. 그분과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그 순간 난 영원의 시간을 얻은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
“크. 차갑기가 얼음장 같던 녀석이 갑자기 음유시인이 되어 버렸군.”
붕대를 감은 자는 포기한 듯 벌렁 누워 버렸다.
다시 노인이 물었다.
“카리오스. 넌 그가 정말로 어세신마스터라고 확신하는가?”
묵직한 음성만큼이나 무게감이 실린 질문이었다.
카리오스는 은발을 출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합니다.”
잠시의 주저함도 느낄 수 없는 확고한 태도였다.
질문을 던졌던 노인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가 알고 있는 카리오스는 지극히 냉소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의 태도는 마치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이 같지 않은가.
놀란 것은 노인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홀에 자리한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같이 눈동자에 기묘한 빛을 일렁이고 있었다.
다만 감정이 급변하는 와중에도 표정에 별 다른 변화가 없는 것은, 그들이 특별한 수련을 거쳤기 때문이다.
넓은 홀 안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정적이 둥지를 틀었다.
이 순간, 모두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카리오스의 결심이 이미 굳어 버렸다는 것을.
설사 영원히 이 기둥 사이에 매달려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 결심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군.”
한숨을 내쉰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장. 뭘 할 생각인 거요?”
키 작은 사내가 물었다.
“허. 철부지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로 그가 어세신마스터가 될 만한 그릇인지 말이다.”
“크크. 그거 재미있겠군.”
붕대를 칭칭 감은 사내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노인을 따라갈 생각인 것이다.
“그럼 심심한데 우리더 가볼까?”
키 작은 사내와 함께 나머지 두 사람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모두가 노인을 따르게 된 셈이다.
“허허. 인원이 좀 불었군. 하기야 동반자가 많으면 여행길이 심심하지도 않고 좋겠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노인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자 다른 네 사람도 소리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크리티컬.”
카리오스가 노인을 불렀다.
노인이 그쪽으로 돌아섰다. 은발의 청년은 잠시 노인을 보다 끓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마일드의 맹세를...... 잊지는 않았겠죠?”
카리오스의 말에 다섯 개의 그림자가 흠짓 떨렸다.
“물론.”
한참 만에 노인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맹세를 이룰 자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