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5권) (34/102)

  오늘 뒤집어쓴 코피가 더 많소이다

  오늘따라 바람이 유난히도 거칠었다.

  바람에 섞여 붉은 모래가 휘날렸다.

  잔잔하게 흩날리는 붉은 모래는 펄떡펄떡 뛰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 보라를 

연상시켰다.

  흉포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저주받은 땅.

  그곳에서 일어난 핏빛 폭풍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불길한 상상만 던져 주었으리라.

  그런 이유로 이 지방 사람들은 이 바람을 가리켜 붉은 저주라 불렀다.

  “오늘도 소식이 없는가 보군.”

  10년 넘게 트라우마의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던 알타가 문득 동료인 스웨인에게

물었다.

  성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을 검문하고 있던 스웨인은 친구의 물음에 무심코 붉은 모래 바람 너머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어째 한 명도 돌아오지 않누. 쯧쯧.”

  스웨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최근 성 주위에 오크 무리가 출몰하여 트라우마를 출입하는 상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성주는 용병 길드한테 오크 마을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했다.

  용병 길드에서 선발된 세 용병단이 성을 떠난 지 오늘로 열흘째. 의뢰를 맡은 용병단 중 어느 한 팀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음?”

  답답한 심정으로 폭풍 너머를 응시하고 있던 스웨인의 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잡혔다.

  “저, 저 사람들 혹시...”

  폭풍 속을 뚫고 달려온 이들은 상인들처럼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성주의 의뢰를 받은 용병단이오.”

  선두의 사내가 앞을 제지하는 병사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그가 건넨 누런 종이에는 확실히 성주의 서명이 있었다.

  서류를 확인한 스웨인은 용병들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하려다 말았다. 용병들의 모습이 너무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모래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을 보니 그동안의 고생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유독 검은 머리의 두 젊은이만은 표정이 밝았는데,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서 들어가 쉬시게.”

  스웨인의 배려에 젊은 용병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들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여관으로 가서 쉬고 있어, 난 길드에 잠시 들렀다 가겠다.”

  제이콥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당 대장을 따라가야 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당장 머릿속에는 침대 생각만 간절할 뿐이다.

  그런 사정은 제이콥 역시 다르지 않았지만, 그는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용병 길드에는 애꾸눈 홉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왔군.”

  다소 건조한 목소리로 홉이 그를 맞았다.

  “일은 어떻게 되었나?”

  “그럭저럭.”

  “다행이군.”

  제이콥은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탁자 위에 펼친 지도에는 트라우마와 붉은 대지의 지형이 대략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는 붉은 대지의 한 지역을 손가락질 했다.

  “이곳이네.”

  “흠. 상인들이 이용하는 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군.”

  “그래서 습격이 잦았던 것일세.”

  “오크들은 몇 마리 정도 있던가?”

  5백 마리 정도였네.“

  “뭣?”

  제이콥의 말에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던 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크들이 5백 마리나 한데 뭉쳐 있더라고? 믿기 힘든 말이군.”

  “나도 직접 보기 전까진 상상도 못 했었네.”

  이어 제이콥은 오크 마을의 규모와 정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나갔다.

  홉은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특히 울프들을 길들이고 있다는 말에 고개까지 좌우로 흔들 정도였다.

  오우거와 트롤의 성지로 알려진 붉은 대지에 자리를 틀고 앉을 정도라면 오크치고는 꽤 대단한 녀석들일 거란 짐작은 했지만, 설마 울프까지 길들이고 있을 줄이야.

  임무와 관련된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고, 제이콥은 홉에게 문득 질문을 던졌다.

  “같은 임무로 파견된 용병들 중에 돌아온 자가 있는가?”

  홉은 고개를 저었다.

  “없네. 자네가 처음이야.”

  “역시 그렇군.”

  제이콥은 홉에게 작은 쇠뭉치 하나를 던져 주었다.

  작은 동패였다.

  “이게 뭔가?”

  “도중에 주었네. 이번 의뢰와 관련된 사람들의 것으로 보여 챙겨 왔네.”

  동패를 잠시 살펴보던 홉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커리스 용병단의 것이군. 자네와 같은 임무로 파견된 용병단 이었네.”

  오크 마을 수색은 프리즘 용병단을 비롯하여 총 세 개의 용병단이 의뢰를 맡았다. 그런데

임무가 시작된 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돌아온 것은 프리즘 용병단 하나밖에 없었다.

  홉은 커리스 용병단의 용병패를 가만히 응시했다.

  남의 손을 거쳐서 돌아온 용병패. 이 용병패의 주인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용병단 역시 좋지 못한 일을 당한 게 거의 확실했다.

  “여기.”

  홉은 불룩한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고생했군. 좀 쉬게.”

  잔금을 넘겨주며 홉은 한마디 위로를 건넸다.

  출발할 때만 해도 깔끔했던 제이콥의 옷은 누더기가 다 되어 있었다.

  “옷도 좀 갈아입고 그러게. 장가도 안 간 사람이 모양새가 그게 뭔가?”

  홉의 말에 제이콥은 그저 씩 하고 웃을 뿐이었다.

  ‘트라우마의 새벽’으로 돌아온 제이콥은 쓰러지듯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피곤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그런데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그는 침대에 엎어진 채로 새로 용병단에 들인 두 아이의 정체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얼마쯤 생각에 빠져 있었을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사가 귀찮아진 제이콥은 과감히 무시해 버렸다.

  ‘누군지 몰라도 반응이 없으면 그냥 가겠지.’

  지금 상태로는 말을 섞는 것조차 성가셨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 달리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집요했다.

  쿵쿵쿵!

  문짝이 부서질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렸다. 하는 수 없이 제이콥은 문을 열었다.

  “누구야...? 아니, 너희들.”

  문 앞에는 호젤과 고든, 그리고 프리먼이 서 있었다.

  “안 자고 있었지?”

  호젤이 마치 보기라도 한 것처럼 웃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제이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을 방으로 들였다.

  “피곤할 텐데. 잠은 안 자고 무슨 일이야?”

  “잠이 안 와서 말이야.”

  “왜? 설마 내가 의뢰비를 떼먹기라도 할까 봐서?”

  제이콥은 탁자 위를 손가락질했다. 홉에게서 받은 가죽 주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호젤은 돈주머니는 흘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것 때문에 온 게 아니야.”

  “그럼?”

  “아마도 제이콥과 같은 이유일걸?”

  “...”

  호젤이 침대 위에 앉자 나머지 사람들도 갖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길 

기다린 호젤은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대장. 대장은 카피와 샤바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해?”

  흐음.“

  제이콥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결국 이들도 그 두 사람 때문에 피곤을 무릅쓰고 

그의 방을 찾은 것이다.

  “절대로......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건 당연한 대답이고. 정확하게 정체가 무엇일 것 같냐고 묻는 거야.”

  “글세.”

  제이콥이 말끝을 흐리자 호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머리를 풀어놓았다.

  “사실 제이콥이 길드에 간 사이 우리끼리 모여서 이 문제에 관해서 대화를 좀 

해 봤어.”

  “대충 결론을 내린 모양이군.”

  제이콥의 말에 호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카피와 샤바가 보인 행동은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독특했어. 특히 샤바는 몬스터를 먹으려고 했지. 그것도 여러 번. 알다시피 

몬스터를 먹는 인간은 없어. 적어도 여기 이드라센의 대륙에서는 말이야.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야.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은 이곳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았을 때 우리들은 그 둘이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폴리모트 한 드래곤 아니면 마족. 카피는 몰라도 새바는 이 두가지 중에 하나가 

확실하다고 생각해. 이건 내 개인적인 견해인데, 새바는 아마도 드래곤인 것 같아.그것도 

성년식을 막 치른 어린 드래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마족치곤 너무 순진해. 나이 많은 고룡이라고 하기엔 또 이곳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인간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디딘 드래곤이 아닐까?”

  “흠. 일리 있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단정부터 내리기에는 성급한 감이 있어.”

  증거는 의외로 많아. 일단 샤바의 얼굴 생김새를 봐. 그게 어디 사람의 얼굴이야? 

인간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완벽할 순 없다고.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는.......“

  빠른 말로 견해를 밝힌 호젤은 프리먼에게 시선을 던졌다. 커험 헛기침을 한 

프리먼은 느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샤바의 학습 능력은 정말 가공할 만한 수준이네. 뭐든 한 번만 들으면 

이해하고 외워 버리지. 인정하긴 싫지만...... 그는 인간의 은력을 확실히 넘어섰네.“

  말을 마친 프리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답답한 마음이 주름 진 그의 얼굴 위로 파도치듯 번졌다.

  프리먼은 유달리 샤바를 아꼈다.

  스승은 항상 제자가 뛰어나길 바란다.

  그런 면으로 보면 샤바는 모든 스승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제자라고 할 수 있었다.

  말 잘 듣고, 게다가 천제적인 머리까지 지녔으니 말이다.

  하지만 너무 뒤어나다는 것이 문제였다. 괴롭지만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제이콥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우린 너무도 터무니없는 단원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그의 말에 모두들 피식하고 웃었다.

  “지금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단순한 유희일지 모르지만 그들과 함께 다녀야 할 우리들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샤바가 드래곤이든 마족이든 간에 눈썹만 까딱거려도 

우리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릴 거야.”

  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트라우마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지.”

  프리먼의 조용한 음성에 모두의 마음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에효. 내 신세야. 내가 어쩌다 이런 일에 말려들었나 몰라.”

  호젤은 침대 위로 털썩 드러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에효 내 신세야.”

  제이콥과 그 일행들이 토의하고 있는 방에서 세 칸 건넌방. 유난히 밝은 귀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던 병규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명하라면 못 할 것도 없다.

  부당한 오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세계에서 넘어왔다는 얘기부터 

꺼내야 할 텐데, 과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줄까?“어쩌죠?”

  병규는 침대 위를 뒹굴고 있는 호랭이에게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이 망할 

신선님께선 배를 벅벅 긁으며 심드렁한 모습이다.

  “뭘 어쩌긴 어째. 맘대로 생각하라고 그래. 지들이 오해를 하든 말든. 이번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샤바가 인간이 아닌 것도 사실인데 뭐?”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 들어 병규는 깜빡 잊곤 하지만 샤바는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난 존재도 아니지만 말이다.

  “에고. 저 녀석을 보고 어떻게 드래곤이나 마족을 떠올릴 수 있을까?”

  병규는 맞은편 침상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샤바는 호랭이의 뒹굴거리는 포즈를 진지하게 다라하고 있었다.

  샤바의 천진난만한 행동을 응시하던 병규는 저도 모르게 씩 미소를 지었다.

  “뭐, 어떻게 되겠지.”

  프리즘 용병단이 ‘트라우마의 새벽’으로 돌아온 다음 날, 길드에서 연락이 왔다. 전혀 

의외의 서식이라 제이콥은 일단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성주가 우리들을 초대했다고?”

  “그래.”

  “무슨 이유로?”

  호젤의 물음에 제이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들 아나? 홉이 전하기를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더군.”

  “이상한 일이네.”

  “누가 아니래?”

  지금까지 적지 않은 의뢰를 수행해 봤지만 귀족의 초대를 받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병규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제이콥에게 물었다.

  잘하면 귀족가의 대저택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다. 병규야 당연히 가보고 싶었다.

  ‘아, 압박이다.’

  병규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본 제이콥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들의 정체를 대략 

짐작하고 있는 그로서는, 말없는 병규의 시선이 서슬 퍼런 협박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아하하. 거, 거절할 명분도 없고. 나쁜 일로 부르는 것도 아니니 일단 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하하하하.”

  결국 제이콥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성주를 만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새삼 이렇게 보니 트라우마 성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겠는걸.”

  여관을 나선 병규는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성 내부에 큰 시장과 몇 채의 저택, 그리고 다수의 민가를 포함하고서도 빈 공터가 

꽤 된다. 트라우마 성은 비단 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성벽은 또 얼마나 높은지, 성 

밖의 풍경을 완전히 가려 버릴 지경이다.

  성주의 저택은 트라우마 성의 북서쪽에 위치했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곳이라 한적했다.

  성주의 저택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2층 석조 구조물이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단출한 모양새였다.

  “멈추시오.”

병규와 일행들은 저택의 입구에서 간단한 제지를 받았지만, 성주에게 받은 초대장을 

내미는 것만으로 간단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몸수색은 안 하나요?”

  그래도 성주쯤이나 되는 사람의 저택이라면 훨씬 엄밀한 경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경비가 너무 허술했다. 심지어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몸수색조차 하지 않았다.

  제이콥은 빙그레 웃었다.

  “이 저택의 주인쯤 되는 실력자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

  병규가 고개를 갸웃하자 고든이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의 주인은 아이린 왕국에 셋밖에 없는 소드마스터다.”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란 말 그대로 검술이 절대의 경지에 이른 검사를 뜻한다.

  병규 역시 들은 풍월이 있는지라, 소드마스터에 대해 대략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소드마스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반 기사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다고 하던데.’

  병규는 얼마 전 이곳의 기사들과 실력을 겨뤄 본 적이 있었다. 라이트라는 귀족 

나부랭이를 수행하고 있던 일단의 기사들과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대결해 본 기사들의 실력은, 솔직히 시시했다. 물론 이것은 그의 관점에서였을 

뿐이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그들이 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병규가 

터무니없이 강했을 뿐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드마스터와 실력을 겨뤄 봐야겠다.’

  물론 어디까지나 순수한 대련의 의미에서 말이다.

  실제로 가까이서 본 저택은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수수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수학여행 때 둘러보는 고적지 같아 기분이 좀 묘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서는 순간 병규는 실망감을 어느 정도 떨쳐 낼 수 있었다.

  사람 냄새가 풍긴다고 할까.

  석재와 목재가 적절히 섞인 실내는 화려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아늑해 보였다.

  촛불이 은은한 분위기를 풍겨 따뜻한 기분마저 들었다.

  영화에서 보던 귀족가의 대저택처럼 화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외려 포근한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군.”

  호랭이의 중얼거림에 병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일행은 곧장 

성주의 개인 서재로 안내되었다.

  부관에게 업무 보고를 받고 있던 성주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들을 맞았다.

  “글로리라고 하네. 어서 오게.”

  후작은 일일이 일행들과 악수를 나누며 환영을 표했다.

  아이린 왕국의 3대 실력가 중 하나로 알려진 글로리 후작.

  소탈하게 기른 턱수염이 특징적인 그는 예상외로 편안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리즘 용병단의 제이콥이라고 합니다.”

  제이콥이 한쪽 무릎을 꿇으려 하자 글로리 후작이 손을 들어 막았다.

  “됐네. 쓸데없는 겉치레는 생략하도록 하지. 그나저나 괜히 바쁜 사람들을 불러낸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오히려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하하. 농담이라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그런데 다들 밥은 먹었는가? 난 업무가 

바빠 점심도 아직 못 했네. 자자, 기완이면 우리 식사나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을 듯하군. 어떤가?”

  일행이 후작과 함께 식당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이미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요한 분위기의 귀부인과 갈색 머리의 젊은 청년이었다.

  귀부인은 물론 글로리 후작의 안사람이었다.

  반면 젊은 청년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라이트.”

  일행들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한 청년. 그는 붉은 대지에서 만났던 모리스 

공작가의 장남, 라이트였다.

  “너희들은.......”

  당장 그의 매끈한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프리즘 용병단이 그와의 만남을 원치 

않았듯, 그 역시 프리즘 용병단과 마주친 게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하하. 아무래도 서로 안면이 있는 모양이군.”

  라이트와 제이콥 일행의 기색을 살핀 글로리 후작이 과장되게 껄껄 웃었다. 덕분에 

그들 사이에 흐르던 싸늘한 냉기가 다소 누그러들 수 있었다.

  “자, 앉지.”

  후작이 자리를 권하자 굳어 있던 일행들도 하나 둘씩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앉다 보니 병규가 라이트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흐음. 얼굴을 보니 별 탈 없이 잘 온 것 같군. 그때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면상이더니 말이야.”

  라이트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비위 상하는 미소를 지었다. 대뜸 병규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더불어 주인과 일심동체인 샤바의 안상마저 찡그러졌다.

  “헉.”

  불안한 심정으로 샤바의 눈치만 살피던 제이콥 들은 거의 동시에 헛바람을 토해 냈다.

  ‘저, 저 미친놈이......’

  ‘누가 쟤 좀 말려 줘라.’

  그들이 알고 있는 샤바의 정체는 마족 아니면 풀리모프 한 드래곤이다. 신경 거슬리면 

이 저택 하나쯤은 입 바람만으로도 날려 버릴 수 있는 그런 엄청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저 망할 귀족 나부랭이 녀석이 남의 속 타는 심정도 모르고, 위험한 분의 

심기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쿡쿡 쑤셔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연 제이콥과 일행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엉덩이만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후작이 헛기침을 했다.

  “험험. 이상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았군.”

  조용히 읊조린 음성이었지만 웅혼한 힘이 느껴졌다.

  흠칫.

  라이트를 노려보고 있던 병규의 고개가 번쩍 후작에게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어깨에서 졸고 있던 호랭이 역시 벌떡 고개를 쳐들었으며, 샤바 또한 머리카락이 

더듬이처럼 삐죽 솟구쳤다.

  헛기침과 함께 흘러나온 후작의 힘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전혀 티도 나지 않았지만 방금 은근히 보인 힘은 병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막강했다.

  손등을 바라보니 닭살이 잔뜩 돋아 있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제이콥만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을 뿐이다.

  ‘셋.’

  글로리 후작의 눈에 섬광이 스쳤다.

  ‘설마 은밀히 흘린 마나를 감지해 낼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무려 셋이나.’

  다소 의외로 생각되었던 것은 리더로 보이는 청년보다 어려 보이는 검은 머리의 

소년들이 자신의 기운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재미있군.’글로리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보석들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가 말한 셋이란 제이콥, 병규, 그리고 샤바 이렇게 세 명이었다. 호랭이도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후작의 관점에서는 논의의 대상이었다.

  후작이 병규와 샤바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을 때, 하녀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식사 시간 동안의 스타는 단연코 샤바였다.

  샤바는 그 화사한 미모로 모든 여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하녀들은 

물론이고, 후작 부인마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호호. 소싯적 남편을 따라 적지 않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당신처럼 잘생긴 청년은 

처음이군요.”

  후작 부인의 극찬처럼 샤바는 자칫 여자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웠다.

  가지런히 흘러내린 검고 긴 머리.

  고요한 호수를 닮은 고운 두 눈.

  백설 위에 떨어진 붉은 핏방울 같은 선명한 입술.

  그리고 묻어날 것 같은 하얀 피부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외모였다.

  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걸작이 있다면 바로 샤바의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환상적인 샤바의 미모는 급기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고를 초래하고야 말았으니.

  식사를 나르는 하녀들은 누구나 샤바의 얼굴을 보고는 얼이 빠졌다. 특히 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하녀들은 가슴이 콩닥거려 손마저 떨릴 지경이었다.

  덕분에 접시를 엎지르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나마 실수로 여길 만한 사건의 전개였다. 적어도 먹는 데 지장은 없었으니 말이다.

  글로리 후작은 대범한 성격이라 그 정도의 실수는 눈감아 주었다.

  문제는 메인 디쉬가 나올 때였다.

  오늘의 요리는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찜 요리. 요리를 나르는 하인은 상당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었다.

  후작 자리에서부터 차례로 음식을 내려놓다 보니 어느새 샤바의 순서가 되었다.

  맛있는 냄새를 가득 풍기는 요리를 보자 샤바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원래 샤바는 본능적으로 식탐이 강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난생 처음 보는 여자가 군침 도는 음식을 무상으로 마구 안겨 주는 것이 아닌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방긋 웃어 주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 게요. 샤바.”

  그저 눈을 빤짝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단순한 행동이 문제를 불러일으킬 줄이야.

  살포시 미소 띤 샤바의 얼굴. 그것은 여인들에게 너무도 치명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아!”

  홀린 듯 그의 미소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녀가 돌연 추르륵 코피를 쏟았다. 그녀의 턱 아래로 찔찔찔 흐르는 코피를 본 샤바가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주었다.

  “괜찮아요. 샤바?”

  그 순간. 퍼억! 촤아아아악.

  그녀의 코에서 폭포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한 혈액은 분수처럼 사방으로 뿌려지며 하얀 식탁보를 벌겋게 물들이고 말았던 것.

  식탁에 앉은 사람들도 느닷없이 시작된 코피의 재앙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불행하게도 절묘한 각도에 앉아 있었던 글로리 후작은 정통으로 재앙과도 같은 피 세례를 받아야 했다.

  소드마스터인 그였지만,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뭐, 뭐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출혈 양만 본다면 돼지 일개 사단을 도축한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설마 이런 막대한 양의 피가 단순히 코피라니.

  좀 과하게 말하자면 좌중은 폭포수처럼 쏟아진 코피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빈혈로 쓰러지는 하녀의 몽롱한 음성은 그들을 다시 한번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놓고 말았으니.

  “아아. 달링~. 이젠 죽어도 좋아요.”

  “...!”

그 후로도 이런 일은 세 번이나 더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성주는 코피를 뒤집어써야 했다. 

  즐거운 저녁 만찬은 결 피비린내를 물씬 풍기는 대출혈의 만찬으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면 글로리 후작이 찝찝한 코피로 목욕을 하고서도 소탈하게 웃었다는 것이?.

  “허허. 어떻게 된 게 전장에서 몸에 묻힌 피보다 오늘 뒤집어쓴 코피의 양이 더 많은 것 같소.”

  그의 말에 사람들은 웃을까 말까 한참 동안 고민해야 했다. 

  ‘천한 것들.’

  라이트는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식으로 수건으로 입가를 가린 채 식사도 하는 end 마는 둥 했다. 이따금씩 샤바에게 보내는 그의 시선이 결코 곱지 않았다.

  “허,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식사에 열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을 깜빡 잊었군.”

  글로리 후작은 손으로 이마를 탁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용병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것이다. 

  사실 그가 정신이 없었건 게 아니라 그럴 틈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후작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코피 세례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한번 진지하게 토의를 해 보세.”

  후작은 부관을 불러 지도를 준비하게 했다.

  테이블이 치워지고, 거대한 지도가 그 위에 펼쳐졌다.

  대화가 시작될 찰나, 라이트가 굳은 얼굴로 후작에게 양해를 구해왔다.

  “전 마무리 못 한 일이 있어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더 이상 프리즘 용병단과 자리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흠. 그런가? 할 일이 있다니 어쩔 수 없지.”

  가겠다는 말에 후작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라이트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오로지 공작가에 대한 예의 때문이지, 결코 라이트 개인에 대한 호감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품행이 좋지 못한 라이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내가 자네들을 부른 이유부터 설명하는게 좋을 것 같군.”

  라이트가 사라지자 후작은 다소 무거운 음성으로 서두를 꺼냈다.

  “대충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명하기 편하겠군. 실은 어제 용병 길드에서 보고를 받고, 난 깜짝 놀랐다네. 오크 마을의 규모가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 대단하더군.”

  제이콥은 글로리 후작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이어 제이콥은 당시 정찰했었던 오크 마을의 규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글로리 후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실제로 용병 길드로부터 보고받은 것보다 오크들의 규모가 훨씬 더 대단했기 때문이다.

  “흐음. 놀랍군. 한낟 몬스터들이 그 정도까지 세력을 키울 줄이야.”

  5백이 넘은 오크들.

  가히 군대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만한 숫자였다. 이 정도라면 단순히 몬스터 토벌로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오크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와 휘하 장수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고생했네. 많은 도움이 되었어.”

  후작은 프리즘 용병단의 노고를 치하하고, 포상을 금화 열 개를 주었다. 그리고 따로 

샤바에겐 특별히 금화 몇 개를 선물로 주었다. 덕분에 즐거웠다는 뜻이었다.

  프리즘 용병단은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글로리 후작과의 첫 만남은 대체로 만족스럽게 끝이 났다. 라이트와의 껄끄러운 재회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후작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하녀들이 모두 혼수상태니 이를 어쩌지?”

  저택의 하녀들은 하나같이 출혈 과다로 인사불성이었다. 청소는 물론이거니와 당장 

내일 아침 끼니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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