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검은 성배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 그 안에 공허하게 앉은 사내. 사내는 심연을 담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본다.
“헉.”
노인은 숨이 막히는 그 눈동자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몸은 하염없이 그 공포스러운 존재 앞에 덜덜 떨었다.
‘이건 꿈이야.’
알고 있다. 이건 자신의 능력이 보여주는 예지몽이라는 걸. 이성은 아는 데 머리와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그 이성이 고개 숙일 정도로 눈앞에 앉은 사내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아, 안 돼···!’
두려움에 사로잡힌 몸은 떠는 정도를 넘어 공포에 질렸는지 오한이 일었다. 오한은 이내 덜덜 떠는 몸에 경련과 고통을 일었다. 그건 자꾸만 식은땀과 신음을 토해내라고 노인을 자극했다.
‘절대 안 돼···!’
노인은 입술을 악물고 몸의 반응을 참았다. 그 작은 신음에 자신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공허이자 혼돈이자 공포의 존재가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아챌까 무서워 참았다.
‘아냐.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이렇게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머릿속의 외침은 의미 없는 외침일 뿐.
몸은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기를 쓰고 고통과 숨을 참는다.
“...기대했는데 말이야.”
그 순간, 흑발에 남자의 목소리가 귀로 들렸다. 흑발의 남자는 검은색 술잔을 바라봤다.
“이딴 허접한 술수에 속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자멸하다니. 어이가 없군.”
-콰직.
술잔이 부스러져 내렸다. 가루가 손 틈 사이로 흘러 떨어진다. 가루를 따라 시선을 내려보니 저 멀리 회색 행성이 보였다.
“세계수와 신농이 이토록 무능했을 줄이야.”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아름다웠던 행성은 한 줌의 생명조차 남지 않고 모두 죽었다는 걸 보여주듯 그 찬란한 색을 잃었다.
“진작 세계를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놨다면 이런 분열도 없었을 텐데. 평화에 쓸데없이 집착하다니.”
혀를 끌끌 찬 남자가 차가운 시선을 옮긴다. 순간 노인의 몸에 지독한 공포가 몰아쳤다.
“안 그런가?”
남자의 시선은 분명 노인을 향했다.
“안 돼!!!”
노인은 그 순간 이제껏 참았던 비명을 내질렀다.
“헉. 헉. 헉.”
라오친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바라봤다. 깔끔한 현대식 인테리어의 호텔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몸 위로는 포근한 이불, 엉덩이에는 최고급 침대의 푹신함이 느껴졌다.
“깨어났어···.”
잠옷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지만, 라오친은 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쾅! 쾅! 쾅!
“괜찮으십니까!”
호텔 밖에서 대기하던 경호원이 소리쳤다.
“괜찮네!”
경비원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대답했다. 근래 이런 일이 많았기에 경비원들은 곧장 대답과 함께 다시 경비로 돌아갔다.
“후···.”
심호흡한 라오친은 침대에서 나와 냉수를 따랐다. 벽 한쪽을 차지한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 위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달을 바라봤다.
조금씩 정신이 차분해지는 기분.
‘점점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건가.’
예지몽은 다른 헌터들의 스킬과는 달랐다. 원하는 걸 원하는 시점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문뜩 이런 식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미래를 보여주기도 했다.
‘미래의 가능성이지.’
하지만 시간이 다가올수록 꿈의 종류는 줄어들고 한가지 미래로 수렴한다. 그래서 저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지금의 시간은 심상치 않았다.
‘최근에는 이상한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어느 날은 반파된 지구에 살아남은 몇몇 존재가 저항하는 미래.
어떤 날은 10명도 되지 않는 인간이 거대한 나무 밑에서 문명을 다시 시작하는 미래.
또 어떤 날은 인간이 몬스터들의 노예가 된 세계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 가장 많이 꾸는 꿈은 이거지.’
끝을 모르는 공포를 자아내는 남자가 공허한 눈으로 지구를 보는 꿈. 그 남자가 흥미가 떨어진 지구를 부수는 꿈.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인류와 지구가 한 남자에게 멸망하는 꿈이었다.
‘희망적인 꿈은 하나뿐이었지.’
경치가 아름다운 산 정상. 돌로 만든 테이블에서 한국의 영웅이라는 남자가 하오위는 물론 많은 사람과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 미래를 만들기 위한 단서는 하나.’
즐겁게 고기를 굽던 남자와 하오위의 대화였다.
“그때, 하오위가 제게 와서 라오친 임하고 연결해주지 않았으면, 절대 이렇게 못 했을 거예요.”
“서준 씨가 대단한 덕분입니다.”
김서준과 하오위의 대화.
라오친은 그 길로 하오위에게 쪽지를 보냈다. 비상연락망과 함께.
“서둘러야 하네.”
하루하루 시간이 이토록 초조했던 게 얼마 만인가. 북한의 사건을 예지했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그 존재만은 꼭 막아야 해. 무지 갱 같은 심연을 눈에 담은 그 남자만은···.’
떠올리기만 했을 뿐인데 입술이 바짝 말라 버렸다. 라오친은 빈 물잔을 가지고 다시 주방으로 향하려고 뒤를 돌았다.
“이, 이건···!”
허공에서 번지는 스파크. 이건 분명 게이트가 나타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몬스터 특유의 어두운 마력이 아닌 밝고 포근한 마력이 느껴졌다.
“라오친 님!”
“하오위 님?”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건장한 사내. 익히 아는 중국의 영웅이었다. 어안이 벙벙할 틈도 없이, 하오위에 뒤에서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당신은···.”
그토록 기다렸던 사내. 예지 속 유일한 희망의 끈.
“드디어 오셨군요. 김서준 님.”
라오친은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김서준을 맞이했다.
*****
“대장은 도착한 건가?”
“언제 오는 거야?”
신이는 불평하는 길드원들을 이끌며 점점 북한 안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미 토벌하고 넘어온 자리에 새롭게 열린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 안에는 뭐가 더 있는지 몰라. 이러다 잘못하면···.’
불안한 생각을 억지로 떨쳐냈다. 대장은 온다. 하오위는 언제나 약속을 지키는 남자였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꼭 올 꺼야.’
-촥!
신이는 다시 한번 믿음을 다지며 따라오는 몬스터를 베어 넘겼다.
“모두 이상 없지?”
“이상은 없어. 없는데···.”
“배낭을 분실했습니다. 너무 급하게 오느라···.”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침울한 보고를 늘어놓는 조장들. 신이의 표정도 급격하게 굳었다.
“식량···. 얼마나 남았나요?”
“아공간에 있는 식량까지 당겨 쓰면 일주일 치 남았습니다.”
“그나마 많이 남았네요.”
사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이 임무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알려진 대로 일정 영토 이상의 수복.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였지.’
그리고 두 번째. 하오위와 일행들이 노렸던 두 번째 목표는 ‘검은 성배’를 찾는 일이었다.
‘그 어떤 마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해준다는 전설의 성물이지.’
검은 성배 안에 담긴 술을 마시면 일반인도 한 번에 S급 헌터가 된다는 소문은 고위급 헌터 사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듣는 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고대 진시황이 찾았다는 불사의 명약이 검은 성배에 담긴 술이라는 소문도 있을 정도.
‘하지만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 실체가 없다는 말이 많았지.’
그런데, 그 검은 성배가 북한에 있다고 중국 정부는 주장했다. 그들은 하오위와 일행들에게 그 성배를 찾아오라고 주문했다.
‘또 다른 희망 고문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하오위의 생각은 달랐다.
‘개마고원 안에 좌표까지 찍어서 알려줬어. 거기다 찾아오고 나서 다양한 보상을 내걸었다. 이건 분명 있다는 증거라고 했나.’
그래서 처음부터 이 일정은 한 달 안에 검은 성배를 찾는 게 목표였다. 그러니 식량이든 물자든 많을 리가 없었는데, 거기에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가방까지 잃어버렸다.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가 밤낮으로 몰려오는 시점에서 이미 망한 건가.’
희망은 하오위가 데려올 김서준의 지원뿐. 아니, 한 가지 더 있었다.
“....가족을 포기하자.”
흙먼지와 땀으로 찌들어 지친 동료 하나가 말했다. 차마 누구도 쉽게 꺼내지 못한 말이자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럼 귀화도 할 수 있잖아. 아냐, 저걸 뚫고 나가진 못하니까, 왕호 능력을 쓰자.”
“그, 그래! 왕호는 아무 데서나 생각만으로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잖아! 그걸로 전 세계에 알리자! 여기에 검은 성배가 있다고! 그러면 헌터들이 몰려들 테니까, 도움을 청하면···.”
“너, 이 새끼들 미쳤어? 가족을 버리자고? 네가 자식도 없다고 그딴 말을 함부로 지껄여?”
“부모님도 가족도 다 버리고 살아남자니! 정신 나간 새끼들!”
“그건 너희 사정이지! 난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어! 여자친구도 없고! 근데 왜 내가 너희랑 같이 죽어야 해?”
“이 미친 새끼! 아무리 목숨이 위험해진다지만 그딴 소리를! 저런 새끼를 동료라고 믿었다니!”
모닥불 주변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각자의 의견과 이해관계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극한의 상황에 빠져 서로 자기 살길을 모색하는 자연스러운 현상? 아니다.
‘하오위의 부재가 가져온 공포야.’
모두가 입 밖으로 말하지 않지만, 알고 있는 거다. 초고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하오위가 무려 4일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이 난장에서 신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욕을 토해내며 자신만이라도 하오위가 돌아오리라고 믿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그때였다.
“다들 뭐 하는 거야!”
하오위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 포털 앞에 그들이 그토록 기다린 하오위.
“...아무래도 사태가 심각한 거 같네요. 그쵸?”
그리고 그들의 유일안 동아줄, 김서준이었다.
*****
공간이동은 어려운 스킬이다. 모든 차원을 돌아도 쉽게 구사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이건 정인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인선에게는 꼼수가 있었다.
‘차원을 접어 달리는 거지.’
아예 세계에서 이탈했다가 다시 세계로 돌아오는 방식. 이렇게 차원을 접으면 공간이동이 가능했다.
그 능력 덕에 하오위와 라오친, 그리고 김서준이 순식간에 개성에 모였다.
“고맙습니다! 김서준 대협! 덕분에 나와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시다니. 과연 영웅이시군요.”
김서준과 한 식탁에 마주 앉은 중국인들은 김서준에게 감탄과 감사 인사를 보냈다.
‘역시 내 아들 대단하네.’
아직 신농의 힘을 전부 각성하지도 않았는데, 한국을 넘어 대국이라 떵떵거리는 중국인마저 영웅이라 부르다니.
‘과연 자랑스러운 천재, 아니 아들이라니까.’
능력과 신망까지 모두 갖춘 아들을 보고 있으니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세계수, 아리아의 말대로네. 이제 진짜 믿고 맡겨도 되겠다.’
정인선은 팔을 바라봤다. 순간 팔이 반투명해지더니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역시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나.’
순간,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곤란했다. 정인선은 고개를 흔들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렇군요. 하긴 라오친 님의 힘을 빌리면 사태 해결에 키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라오친 님의 그 꿈은 아무래도 이것과 연관이 있는 거 같네요.”
김서준의 계책에 두 사람은 완벽하게 협력적인 자세.
‘다행이야. 난 마지막까지 내가 할 일만 잘 하면 되겠어.’
정인선은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걸 위해 가야 할 곳이 있었고 그곳으로 가려 했다. 김서준과 더 있다간 마지막 할 일을 하지 못할 거 같아서.
그렇게 떠나려는 차.
“검은 성배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검은 성배의 술수에 빠져 인류가 자멸했다고 그랬습니다.”
라오친의 말에 하오위가 놀라 말했다.
“사실 제가 찾던 게 검은 성배였습니다! 어쩌면 이게 무슨 단서가···.”
“잠깐만. 검은 성배를 찾는 중이었다고?”
“아, 네. 사실 위치는 알았지만, 몬스터 때문에···.”
“위치도 안다고? 위치가 어딘데?”
“개마고원 쪽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신지···?”
“저희 어머니십니다. 아마도 한국 최강의 헌터 시구요.”
대충 정체를 둘러댄 김서준이 정인선을 보며 물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정인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김서준에게 말했다.
“찾았다.”
“네?”
“검은 성배. 그게 차원의 입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