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유인
게이트는 포식자가 차원의 균열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장치다. 작은 균열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다시 회복되는 걸 막고, 나아가 그 구멍을 키우는 장치.
‘비대한 마력을 가진 포식자와 그 일행들이 넘어올 수 있도록 구멍을 키울 때까지 던지는 장치라고 했지.’
엄마의 말대로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이상한 점이 있다.
‘왜 북한만 저렇게 된 거지?’
다른 곳은 그 말대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게이트가 열렸다. 빈도도 그렇게 잦지 않다. 그런데 왜 북한만 지옥이 된 걸까?
유추해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북한이 가장 약한 부분인가요?”
“맞아. 정확히는 막아둔 차원의 입구가 북한으로 연결된 거지. 본래 차원의 입구였으니까 당연히 저항력도 훨씬 약한 거고.”
“그 말은, 침략이 시작되면 북한을 통해서 넘어온다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그건 곤란하겠지?”
물론이다.
모든 준비는 이곳 금산마을에서 이뤄지고 있다. 북한은 이제 막 개척을 시작한 개척지. 준비한 인력도, 물자도, 보급로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장소로는 부적합해.’
역시 전장을 고르라면 금산면이 되어야 했다. 사비오와 헌터의 성지를 비롯한 준비된 시설들. 대한민국의 지리적 중심부에 위치한 보급 적인 이점 등 이점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바꿀 수 있는 겁니까?”
“원래는 어렵지만, 지금은 가능해. 여기 신농이 둘이나 있잖아?”
정인선은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묘하게 촉촉한 눈빛이 된 그녀의 눈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네 터전화로 기존의 입구랑 그 주변의 벽을 훨씬 단단하게 만들어. 그리고 금산 쪽은 일부러 약하게 풀어주는 거지. 난 그걸 좀 더 티 나게 조작할 거고.”
“간단하네요.”
“그렇진 않을 거야. 입구가 확실하게 티가 나려면 주변과 대비가 일어나야 해. 그러려면 한국 전체를 터전화 해야 해. 적어도 그들이 넘어오기 한 달 전이 5개월 안에.”
“괜찮아요. 그 정도는 도와줄 사람들이 충분하거든요.”
“다행이네. 역시 내 아들이야.”
정인선이 김서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30살 중반에 이런 대우라니.
‘민망하긴 한데, 나쁘지 않네.’
김서준은 속으로 피식 웃다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근데 지구 전체를 터전화 하면 완전히 막아버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어려워. 지구 전체를 터전화 하는 시간도 부족 하겠지만, 영원히 차원의 벽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울 테니까. 우리는 필멸자니까.”
필멸자(必滅者).
불쑥 튀어나온 생소한 단어가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에 가깝게 살아가는 그와 시간 싸움을 할 순 없어. 결국은 부딪혀 제압해야 해.”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정도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야.”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죠.”
김서준의 대답은 자신감과 확신이 넘쳤다. 정인선은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
대통령.
IW그룹의 회장.
두 사람은 둥그런 테이블 앞에 앉아 서로를 바라봤다. 자칫 정경유착의 오해를 부를 수도 있는 자리여서일까. 방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 회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허철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설마 농사 문제로 IW 그룹과 상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허철영의 농담 섞인 말에 두 사람은 ‘허허’하며 웃었다. 그러나 웃음에도 자리의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사태가 심각하니 농담은 이쯤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허철영의 진지한 모습. 정 회장은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대통령도 김서준을 믿기로 했군.’
얼마 전, 김서준이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제 곧 게이트를 넘어 북한의 사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가 넘어온다는 이야기.
‘...그로 인해 세계는 멸망을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했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 아니, 자기 아들이 말했어도 코웃음을 쳤을 만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김서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여태껏 상상을 뛰어넘는 수완과 능력을 보여줬다. 헌터로서도 사업가로서도. 그리고 사람으로서도.
‘그런 김서준이 어설픈 예언 따위를 믿었을 리 없어. 뭔가 근거가 있는 거겠지.’
그리고 아무래도 그런 사람은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얼마 전 김서준을 믿고 터전화에 대한 일을 세상에 공표한 허철영 역시 그런 게 확실했다.
“전국에 강제로 농사를 짓게 하면 되는 겁니까?”
허철영이 예의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저희가 가진 종자를 무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값은 사태가 정말 일어나고 해결됐을 때 받겠습니다. 그 종자를 가지고 말씀하신 대로 농사를 짓게 하면 됩니다.”
“터전화로 나라 전체를 막는 겁니까?”
“김서준의 말에 따르면 상대를 함정으로 끌어들인다고 하더군요.”
“함정이라···.”
허철영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설마 이 나라를 그 대적과의 전쟁터로 삶으려는 겁니까?”
허철영의 고뇌는 이해가 되었다. 그는 정치적 이해를 넘어 애국심이 넘치는 정치인. 그 애국심이 정치적 기반이 되었을 정도.
‘나라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있는 일은 막고 싶겠지.’
김서준이 여태껏 보여준 신뢰가 그의 내면에 강하게 자리 잡은 나라에 대한 걱정과 갈등을 일으키는 게 표정에도 드러났다.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터전화라는 건 게이트와 던전의 발생을 막는 조치이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반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크 흠···.”
“그리고 김서준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런 일을 사리사욕에 써먹진 않겠죠. 여태껏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바이올렛 호퍼 사태를 해결함에도. 정령 부대로 세계를 토벌할 때도. 북한 토벌을 지원할 때도 그는 오직 자신만의 이득이 아닌 모두가 최대한의 이득을 얻는 결과를 지향했지 않았던가.
‘그게 나와 주변 사람들이 김서준을 돕는 이유가 되었지.’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당신이 감화된 부분도 그 부분이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다시 한번 허철영의 머리에 상기시키면 이번 이야기는 쉽게 끝나리라고 정 회장은 생각했다.
“이런 일을 벌여 놓고는 본인은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북한으로 가버리다니. 누가 보면 김서준이 대통령인 줄 알겠습니다.”
“하하. 대통령은 아니지만, 그가 한 말이 정말이라면 영웅이 맞겠죠. 난세에는 영웅이 가장 으뜸이지 않겠습니까.”
허철영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따질 건 우리 영웅님이 오셔서 직접 따져 보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지금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농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일주일 내에 정상회담을 준비해달라고 하더군요. 온라인상이어도 좋다고 합니다.”
“정상회담을요?”
“분명 세계 정상이 모여야 할 일이 벌어질 거라고 합니다. 아마 이번에 호언장담한 일의 시발점이 될 일이겠죠.”
허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정도 규모라면 우리나라 혼자 감당할 일은 아니겠죠. 그 부분도 준비하죠.”
“저 역시 재계 회의를 소집하고 국가를 돕겠습니다.”
그리고 정 회장의 예상대로 한번 마음이 맞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르게 흘러갔다.
****
-위잉!
황금색 드론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대수는 약 100여 대. 김서준이 힘을 극한까지 짜낸 결과였다.
“노움! 리노! 아리아! 준비됐지?”
넷은 각자 머리에 이상한 장치를 쓰고 있었다. 흡사 VR 체험 기기처럼 생긴 장치는 드론을 조종하는 조종기였다. 저 안에서는 드론이 움직이는 화면이 보인다.
“움!”
“멍!”
“응!”
귀여운 꼬마가 둘. 몸만 큰 꼬마 하나가 활기차게 대답한다. 김서준은 절로 얼굴에 피어오르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시작합니다.”
[넵!]
이어폰 너머의 대답과 동시에 드론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론의 목표는 금산마을을 대표하는 크리스마스트리.
-위이잉!
일제히 움직이는 황금색 트리가 장관을 만들며 목적지로 향하던 시간.
-펑!
파란 빛줄기 하나가 트리로부터 날아왔다. 빛줄기는 정확하게 드론 하나를 추락시켰다.
“이, 이런!”
아리아의 드론이었나. 주먹을 불끈 쥔 아리아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오른쪽에 드론 무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본격적인 훈련의 시작이었다.
“물 한 방울도 트리에 닿지 않게 하는 겁니다.”
드론에 달린 물총을 보며 김서준이 말했다. 이어폰 너머에서는 다시 한번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진짜 많이 늘었네요.”
트리 위에 지쳐서 늘어진 방패와 막대를 든 마을 주민들을 보며 말했다. 주민들은 지친 와중에도 웃음으로 김서준의 말에 대답했다.
“다 서준 임의 훈련 덕이죠. 물론 장인님의 덕이기도 하고요.”
“벌써 감탄하면 곤란하지.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이라고.”
훈련을 참관하러 온 장인섭이 떵떵거리며 말했다. 장인섭은 시작 전 긴장한 모습은 전부 사라지고 흘러넘치는 자신감과 함께 잔뜩 기분이 고양된 게 보였다.
‘그럴 만도 해. 진짜 좋아졌어.’
공격을 담당하는 막대의 출력은 훨씬 더 좋아졌다. 헌터가 아니더라고 일정 수준의 마력을 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마나를 매개체 삼아 출력을 높였다는데,
‘그게 제대로 먹혔어.’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지난번보다 훨씬 정교한 조작이 가능해졌다. 위력도 엄청났다.
‘이제는 막대가 아니라 마나 라이플이라고 불러도 되겠어.’
개별 무기 성능이 좋아지니, 5명이 한 조를 이뤄 만든 마나 캐논의 위력은 배로 좋아졌다.
‘일순간 B급 상위 헌터의 출력은 되는 것 같았지.’
이정도면 충분히 포식자의 습격에서 맡은 역할을 할 수 있어 보였다.
“너무 실망하지 말고 힘내라고. 클클.”
스승인 드워프 삼 형제의 웃음을 자연스레 몸에 익힌 장인섭은 리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낑···.”
“아쉽다움···.”
“녀석들.”
장인섭의 위로에도 풀이 죽은 녀석들. 이럴 때는 특효약이 있지.
“괜찮아, 다음에는 이기자!”
아리아의 포옹과 위로가 쏟아지자 둘의 얼굴이 다시 밝아진다. 여기에 하나 더 얹자면···.
“그래. 이기는 거 보다 지는 게 더 좋은 훈련이었어. 진 게 오히려 좋은 거야. 잘했어.”
김서준 자신의 위로.
“멍!!!”
“그건 아니다움!!”
“맞아요. 그건 아니에요!”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클클클.”
장인섭이 웃으며 김서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훈련으로 장비의 성능 검증이 끝났으니 이제 다음 단계를 밟을 차례.
‘마린을 생산했으면 벙커를 지어야겠지.’
그리고 금산마을 최고의 장인이자 건축가들과 벙커에 대해 구상할 시간이었다.
“지금이면 와이너리에 있겠지.”
장비는 흔쾌히 제자를 받고 공방을 맡겼지만, 술만은 드워프들이 직접 관리했다. 그랬기에 최근에 드워프들을 보려면 공방이 아닌 와이너리를 찾는 게 빨랐다.
‘가는 김에 엘린도 같이 보는 게 좋겠다.’
김서준은 이제 식사를 마치고 트리 위에 늘어진 귀여운 둘, 아니 셋을 불렀다.
“이제 가자!”
“알겠습니다움!”
“멍!”
“응!”
대답하며 일어나는 그들, 그리고 뒤로 보이는 풍경. 김서준은 그 기분 좋은 장면을 꼭 지켜내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