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최고의 칭찬
드워프의 기술력을 이전받아 헌터 장비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장인섭 혼자의 노력으로는 힘들었다.
‘함께 할 동료는 필수지.’
장인섭 사단을 데려오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가장 함께 손발을 맞춰온 장인섭의 동료였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재능있는 장인들의 합류도 환영이지.’
하지만 김서준이 MP사를 뛰어넘는 조건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축복받은 송이버섯이 불티나게 팔리고, 직접 키워낸 토종 작물과 종자 사업이 대박인 데다, 금호 영농조합이 어지간한 중견기업 수준으로 올라서려 하는 순간이긴 하지만, 대기업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런 장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일까? 복지일까?
아니다.
장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기술력이었다. 일정 반열 이상에 올라서면 돈은 따라오는 부산물로 보는 장인이 많았다.
‘오히려 억만금을 들여서 연구에 투자하는 사람도 많지.’
김서준이 박람회에 참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무려 드워프와 엘프의 기술이 합쳐진 합작품. 이걸 보고 장인이 혹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장인섭 어르신의 사단뿐 아니라 전국, 어쩌면 전 세계에서 장인들이 모여들지도 모르지.’
김서준은 웃으며 할당받은 부스에 들어섰다. 장인섭의 이름으로 만든 금호 길드는 이제 만들어진 신생 길드. 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부스를 할당받았다.
“사람이 많군. 클클.”
함께 온 트레스가 웃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올해도 박람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군. 다들 어떤 걸 준비했으려나.”
장인섭 역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놀이동산에 온 아이 같은 모습. 김서준은 미소를 지었다.
‘하긴 치매로 쉬는 동안 어떻게 세상이 변했나 궁금하시겠지.’
흡사 죽었다 살아난 것과 같으니 장인섭의 반응은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우리 것보다 대단한 게 있을 리 만무하지만. 안 그렇습니까, 스승님.”
장인섭은 드워프들에게 꼬박 스승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나이만 보면 200살이 넘게 차이 나지만 겉으로는 별반 다르지 않다 보니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특히 워낙 강인했던 어르신이라 더더욱.’
“클클. 물론이지.”
물론 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트레스는 자연스레 장인섭에게 말했다.
“아공간에 챙겨온 사이다 좀 꺼내보게.”
“알겠습니다. 서준, 자네도 마실 건가?”
“아, 네. 감사합니다.”
장인섭은 아공간에서 멋스러운 장식이 들어간 사이다 3캔을 꺼냈다. 이제 슬슬 유통 시작을 앞둔 드워프 족의 사이다, ‘해머(Hammer)’의 시제품이었다.
“고맙네.”
자연스럽게 캔에 담김 사과 사이다를 받은 트레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편리한 용기야.”
트레스가 그렇게 말하며 캔을 땄다. ‘칙’소리와 함께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자, 옆에 있던 장인섭도 함께 사이다를 열었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풍겼다.
“스승님의 사이다는 정말 최고군요.”
“클클.”
웃음으로 답한 트레스는 잠시 박람회장을 돌아보겠다며 부스를 떠났다. 김서준은 장인섭과 함께 전시를 준비했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뭐가?”
“어, 그···.”
스승님으로 모시면서 이렇게 시중드는 거요.
라고 묻기에는 뭔가 어색하다. 그렇다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장인섭이 호탕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렇게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데 이보다 더 깍듯이 못 모실까. 좋은 스승을 소개해줘서 고맙다. 도대체 여태 어디에 계셨는지.”
장인섭은 김서준의 어깨를 툭툭 치곤 다시 자리 정리를 이어갔다. 김서준은 뭔가 그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이네요.”
한참 정리하는 데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배너를 세운 김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하얀 피부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
“서 이사님이 직접 오셨나 보네요.”
청룡 길드를 집어 삼킨 후 박살을 낸 장본인이 김서준에게 말했다.
“오늘은 저희에게도 중요한 날이라서요.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그렇네요. 근데 무슨 일로 오셨죠?”
“아, 그냥 인사차 왔습니다. 반가워서요.”
‘반갑다’라.
별 같잖은 핑계다.
‘역시 시비를 걸러 왔나.’
이 남자는 처음부터 그랬다. 청룡 길드의 협상 테이블에 처음 김서준이 앉았던 날. 그는 대놓고 김서준이 부 길드장과는 급이 안 맞는다며 난리를 쳤다.
‘뉴스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개차반이었지.’
뉴스에서는 사고는 좀 쳤어도 합리적이고 젊은 사업가의 이미지로 나름 잘 포장되어 있었다만 속은 역시나 재벌가 망나니의 표본이었다.
“티비에서 봤습니다. 농부로 전직하셨다면서요?”
“네. 운이 좋았죠.”
“하하. 맞습니다. 그 부 길드 장보다 훨씬 잘 어울리더라고요. 제대로 싸움도 못 하는 데 길드는 역시 좀 그렇잖아요?”
장인섭 역시 치매 전 마지막 기억을 길드의 몰락으로 기억했다. 그래서일까. 장인섭은 아예 서 이사를 무시하곤 정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큰일 나겠네.’
그 손에 핏줄이 불끈하는 게 보였다. 스승을 모실 때는 깍듯했지만, 불청객에게는 언제든 망치를 휘두르길 마다하지 않았던 아저씨였다.
김서준은 사달이 나기 전 먼저 나섰다.
“맞습니다. 농사만 지었더니 영웅도 되고 돈도 절로 들어오더라고요. 진작 이렇게 살 걸 그랬습니다. 서 이사님도 농사 좀 지어보시죠? 그럼 클럽 같은 데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김서준의 말에 서 이사의 눈썹이 꿈틀했다. 얼마 전 클럽에서 난동을 부려 사과했던 건 역시 진심이 아니었나 보다.
“하하. 고민해보자.”
서 이사는 오히려 과하게 웃더니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뭐하러 오셨습니까? 농기구라도 팔러 오셨나?”
서 이사가 웃으며 부스를 바라봤다. 부스 위에는 접이식 쇠 막대기 몇 개가 올라와 있었다.
“요즘 농기구는 신기하게 생겼네요?”
서 이사가 코웃음을 쳤다.
“이딴 거로 뭐 좀 되겠어요? 괜히 박람회 질 떨어지는 거 아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가 듣기에 충분하게 떠드는 서 이사.
결국, 장인섭이 고개를 들었다. 운동으로 잔뜩 벌크업 된 장인섭이 험상궂은 표정을 짓자 서 이사는 움찔했다.
‘이러다 어르신 뚜껑 열리겠네.’
김서준은 서 이사를 보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바빠서요.”
“아, 그래요. 그 막대기들 책상 위에 올려놓으려면 바쁘겠죠. 혹시 오늘 발표할 상품도 이건가 본데, 조심하세요.”
서 이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덧붙였다.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한번 낙인찍히면 답도 없어요.”
그는 가증스러운 미소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서 이사가 멀어지자마자 장인섭이 말했다.
“이걸 참아? 너도 참 여전하구나. 저런 놈은 아가리에 망치를 먹여줘야 하는데.”
“하하하.”
물론 어르신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오늘 이 자리 최고의 적. 기 싸움부터 눌러주는 것도 좋겠지만, 김서준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말싸움에서 이겨봐야 뭐하겠어요? 한 번 정도는 져주죠. 뭐. 그리고 본론은 저 위에서 하면 되죠.”
김서준은 부스들의 가운데 준비된 무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심할 때, 저 위에서 밟히면 표정이 어떨지 벌써 궁금하네요.”
김서준은 아까 서 이사 못지않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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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장비와 하급 장비의 격차는 너무나 큽니다.”
MP사는 이번 박람회를 통해 헌터 장비 사업에 진출하는 걸 넘어,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포부를 일찍이 밝힌 바 있었다.
‘새로 만든 기술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고 했지.’
덕분에 한껏 기대감이 부푼 청중과 심사위원, 거래처들은 모두 무대 위 남자의 말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D등급 C등급이 제대로 못 하니 어떻게 됩니까?”
서 이사는 어렸을 때부터 사업가로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내답게 멋지게 발표를 이어갔다.
‘톤도 좋네. 시선 처리도 좋고.’
깔끔한 PPT는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최신 트렌드에 맞게 잘 만들었다. 과연 MP사다웠다.
“....덕분에 B등급 A등급 헌터들이 하위 던전이나 게이트 토벌에도 나서야 하는 경우도 있죠. 우리 MP사는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포인터를 누르자 넘어가는 화면.
뒤에는 다양한 헌터들이 어깨동무를 한 사진이 보였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제대로 활동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바로 저희가 만든 장비로 말이죠!”
자신들의 기술에 적절한 명분을 만들고 포장하는 기술까지. 전형적인 기업의 사업 발표다운 모습이었다.
“...최고의 연금술사들이 고안한 특수한 불꽃입니다. 여기에 저희가 특수 배합한 쇠와 마정석을 녹이면 일전에는 보지 못한 마나 전도율이···.”
발표를 보던 트레스가 혀를 끌끌 찼다.
“왜 그러십니까?”
“서준, 이 세계는 아직 멀었구먼. 불에 마법의 특성을 담는 게 이제 시작이라니. 우리 불꽃은 이미 위에 올라오는 대상을 강화하는 각종 스킬이 걸려 있는 데 말이야. 안 그런가?”
김서준이 트레스의 말에 깜짝 놀랐다.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드워프의 기술이 뛰어난 건 당연하잖아?’
김서준이 놀란 건 ‘이 세계’라는 단어였다. 김서준이 장인섭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장인섭이 말했다.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이 이런 기술을 가졌을 리 없잖아? 그리고 상관없어. 스승님은 스승님일 뿐이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니 걱정하지 말아라.”
눈을 발표에 고정한 채 장인섭이 말했다.
‘역시 그랬나.’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하루종일 붙어 있으면, 당연히 티가 났을 테니까.
‘그래도 참 아저씨 답네. 물어보지도 않은 걸 넘어 아예 내색도 안 하시고.’
원래도 무기 제작 말고는 큰 관심이 없으셨던 분이긴 했지만 역시나 놀라웠다.
“이로써 저희 장비를 사용하면 D등급 헌터도 C등급 수준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정석은 적게 드니 지금 사용하는 기술의 반값이면 충분하죠!”
이제 막 바지에 이른 발표. 서 이사는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저 이제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시오. 클클.”
“부셔놓고 와라.”
김서준이 오만한 표정을 지은 서 이사를 보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이제 저희 MP사가 하급 헌터들의 생명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세상의 안보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여 놓도록 하겠습니다!!”
“와!!!”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내구성을 포기하고 장비의 성능을 극대화했군.”
“질이 낮은 마정석을 최대한 살려서 비용도 절감하고. 양산형 장비 시장을 열겠다고 이를 갈았다더니 진짜였나.”
“미리 투자해 놓길 잘했군.”
관객석에 있는 거래처들 사이 감탄 섞인 감상평이 들렸다. 심사위원들도 한결같이 놀라운 얼굴. 앞서 나온 하잘것없는 기술은 전부 머리에서 사라진 듯한 반응.
‘끝났네. 크크’
서 이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 하려고 시간이랑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 연금술사와 대장장이들을 여기저기서 다 데려왔다. 소속감을 부수기 위해 청룡 길드처럼 와해시킨 길드도 많았다.
‘개고생했지.’
그리고 이제 열매를 따 먹을 시간만 남았다. 눈앞에 돈을 든 돼지들을 사무실로 불러 본전을 뽑는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이셨나 보군요. 이거 어쩌나. 우리 뒤에 하면 다 묻힐 텐데.”
서 이사가 킥킥거렸다.
“부담은 없어서 좋겠네. 잘해보세요.”
서 이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김서준은 그 뒷모습을 보며 함께 비웃어 준 뒤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김서준이 인사하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연예인을 보는 듯한 눈. 이미 MP사의 발표에 매료된 그들에게는 딱 그 정도.
“어쩌겠어. 결국, 농부인걸.”
서 이사는 혀를 끌끌 차며 배정된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무대 위에 선 김서준의 표정이 너무나 여유로웠다.
“아무래도 말로 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여드리는 게 더 확실하겠죠. 저희는 이미 완성했거든요.”
그렇게 말한 김서준이 아나운서를 무대 위로 불렀다. 정장 치마를 입은 아나운서는 살짝 당황해하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김서준은 그런 아나운서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여기 계신 윤수연 아나운서님은 완전한 일반인입니다. 맞죠?”
“네. 맞습니다.”
“자, 그럼 이거 받아주세요.”
서 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봤던 접이식 막대기였다.
“정말 저거였네?”
서 이사는 코웃음을 쳤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장인섭이 깨어난 건 최근. 고작 한 달 동안 대단한 기술을 만들었을 리가 없었다.
“저거로 뭘 하려나.”
김서준은 아나운서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하고 말했다.
“여러분, 헌터의 장비를 일반인이 쓸 수 있나요? 없죠. 마나가 없으면 마정석이 반응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김서준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황금색 삽 한 자루가 나타났다.
“그런데, 일반인도 쓸 수 있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그 순간. 김서준이 돌연 삽자루를 위로 들어 강하게 휘둘렀다.
“꺅!”
아나운서가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무언가 하기도 전에 김서준의 삽이 들이닥쳤다.
“저런, 미친 새끼···.”
서 이사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건 아나운서 때문이 아니었다.
-징!
반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삽은 주저앉은 아나운서의 머리 위에 멈춰있었다.
“저희가 만들었습니다. 재료는 아무 마정석이나 상관없습니다. 이 지팡이는 D급 마정석으로 만들었습니다.”
“...”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서 이사의 얼굴은 급격하게 구겨졌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부들거리던 서 이사는 결국 분을 못 이기고 소리쳤다.
“이 미친 새끼!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사기를 쳐?”
그 말을 들은 김서준이 씽긋 웃었다.
‘최고의 칭찬이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