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산양삼
신농의 힘이 강해지고 자연스레 스킬도 강해졌다. ‘케레스의 농기구’ 역시 강화되었다. 더 좋은 농기구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80톤 굴착기처럼.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지. 개수가 늘었다는 거지.’
일전에는 무조건 한 개밖에 소환하지 못했다. 하물며 작은 삽조차도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크기만 작다면 여러 개를 소환하는 일도 가능했다.
다시 말하면, 김서준의 이상한 신념. 뭐든 크고 강하고 굵은 게 좋다는 신념을 뺀다면 여러 대의 굴착기도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6W가 2개까지 소환했으니까. 한 체급 더 줄이면 3대도 가능하겠지?’
김서준은 평소에 6W라 부르는 중형 굴착기를 포기했다. 대신 공터, 공삼이라 불리는 6~7톤급, 주변에 가장 흔히 보이는 굴착기를 떠올렸다.
“잘 돼야 할 텐데···.”
김서준은 양손을 뻗고 눈을 감았다. 최대한 머릿속의 이미지에 집중했다.
‘케레스의 농기구. 굴착기 100대. 소환!’
소환될지 감이 안 왔기에 적당히 많은 숫자를 골라 스킬을 시전했다.
-위잉.
손에서부터 일렁거리기 시작한 황금빛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이내 빛이 조금씩 분열하며 하나하나 덩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몸 안에 힘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역시 여러 대를 소환하기 때문인가. 마나 소모가 심해.’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도 김서준은 머릿속 이미지에 집중했다. 마침내, 몸 안이 텅 빈 듯한 기분이었다.
“후···.”
김서준은 한숨을 뱉으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조심스레 눈을 떴다. 황금색 트랙터로 눈앞이 찬란했다. 하지만 살짝 아쉬웠다.
“역시 100대는 무리였나?”
100에서 0 하나가 빠진 10대가 나타났다.
‘하긴 뭐 10대도 감지덕지하지.’
이 정도 규모 작업에 10대면 누가 봐도 부러울 규모긴 했다.
‘자, 그럼 다음은 조종사를 불러 볼까?’
김서준이 쌩끗 웃으며 외쳤다.
“노움!!”
‘팟!’ 하며 허공에서 노움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움!!”
“노움 그 밀짚모자는 뭐야?”
“아, 오랜만에 감자 재배라 기분 좀 내 봤습니다움!”
그렇게 말한 노움이 헤헤거린다.
‘진짜 귀엽다니까.’
김서준이 웃으며 노움을 토닥거렸다.
“근데 무슨 일로 여기로 소환하신 겁니까움?”
“노움이 소원 들어주려고.”
“소원 말입니까움?”
고개를 갸웃했던 노움의 시선이 김서준의 뒤로 향한다. 그리곤 양 눈썹이 크게 들썩이며 입을 떡 벌렸다.
“서, 설마···.”
“그래. 그 설마야.”
노움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굴착기 운전이었다. 오죽하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중장비 장난감을 사줬을까.
김서준은 오늘 그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워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는 운전 방법을 모릅니다움...”
노움이 시무룩해했다. 하지만 김서준이 그 사실을 몰랐을까.
“새로 얻은 능력을 활용해보려고.”
“새로 얻은 능력이라면...”
“지식 공유 말이야.”
김서준과 노움은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는 스킬을 얻었다. 이로써 노움은 김서준에게 농사 지식을, 김서준은 노움에게 현대 상식에 대해 알려줄 수 있었다.
‘아니, 단순히 지식 공유 이상이었지. 바로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으니까.’
흡사 노움과 움이 소통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그럼 서, 설마 제게 운전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겁니까움!”
“그래. 대신 조건이 있어. 절대 장난치지 말고, 위험한 일도 해서는 안 돼. 알겠지?”
“무, 물론입니다움! 이 노움 절대 한번 말한 말은 어기지 않습니다움!”
늙은 기사 마냥 이야기하는 애늙은이를 보며 김서준이 피식 웃었다.
“그럼 바로 해볼까?”
김서준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공유!”
그러자 푸른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창안에는 김서준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 주르륵 리스트업 되었다.
[노움이 좋아하는 행동]
[사과로 술을 빚는 법]
[차돌 된장찌개 끓이는 법]
.
.
[리노가 좋아하는 음식]
각종 지식 사이 공유할 수 없는 지식은 리스트에 없거나 공유 불가라고 되어 있다. 예를 들며 최근 재밌게 본 ‘주꾸미 게임’의 줄거리는 공유 불가 처리가 되어 있다.
‘참 신기해. 노움의 동심을 지켜주는 건가.’
김서준이 피식 웃으며 리스트를 내렸다. 그러나 원하는 지식이 나타난다.
[트랙터 운전 법]
[굴착기 운전 법]
둘 다 공유할까 하다가, 굴착기만 일단 공유했다.
‘트랙터는 필요할 때 공유하자. 지식 공유하고도 교육도 해야 하니까.’
굴착기 운전법을 누르자 노움의 눈이 파랗게 변한다. 동시에 일순간 노움이 경직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감사합니다움! 열심히 하겠습니다움!”
노움이 인사했다. 김서준이 노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직 아니야. 배우고 나서 해야지.”
김서준은 노움을 굴착기에 태웠다. 역시나 노움의 몸은 너무 작아서 레버나 스틱을 손으로 쥐기에는 택도 없다.
“노움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어.”
“움!”
김서준이 노움을 태운 트랙터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노움의 자리를 보며 다시 한번 마나를 끌어 올렸다. 황금색 빛이 다시 트랙터를 휘감았다.
“오오!”
노움이 신기해서 탄성을 질렀다. 운전석이 점점 작아지며 노움의 몸에 맞게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되는구나.’
예상대로 케레스의 농기구는 상식의 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너무 좋은 데?’
김서준은 거침없이 운전석을 조정했다.
의자가 작아지고 엑셀이 노움의 발에 딱 맞게 위치했다. 옆으로 스틱도 미니어처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배치되었다.
‘앞 유리는 최대한 크게 해서 시야가 탁 트이게 해주고. 핸들도 저 작은 손에 맞춰줘야지.’
금세 운전석 조정이 끝났다. 김서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물었다.
“어때?”
“완전 편합니다움! 최고입니다움!”
“자, 그럼 시동 걸고 가볍게 움직여봐.”
“알겠습니다움!”
김서준은 대답과 함께 운전석에 문을 닫아주었다. 그리곤 외쳤다.
“자, 암(Arm) 돌려보고!”
“움!!”
“이번에는 반대쪽!”
“움!!”
‘잘하네. 기특하네.’
김서준이 속으로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다음 앞으로!”
-쿵!
순간 급발진한 굴착기가 앞에 있는 다른 굴착기에 부딪혔다.
“움···. 죄송합니다움!”
‘한번은 뭐 실수할 수도 있지.’
김서준은 별일 아니라며 천천히 뒤로 후진을 명령했다. 그리고 다시,
-쿵!
순간 김서준은 생각했다.
‘아닌가···?’
“서준, 이건 참으로 멋진 광경이오!”
부탁한 작업을 마치고 온 도스가 눈앞에 보이는 작업 현장을 보곤 감탄했다. 김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10대의 황금색 포크레인이 집게를 달고 나무를 제거해 나가는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진짜 다행이야. 노움과 움들이 잘 배워서.’
다행히도 초반의 실수는 말 그대로 실수였다. 노움은 금세 적응해 굴착기를 자기 팔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이후, 같이 나온 움들은 더 대단했는데, 그 작은 몸으로 조종 하나는 기가 막혔다.
‘다들 진짜 농사 관련된 건 다 잘하는구나.’
배수로 공사나 드워프의 집을 지을 때도 그랬지만, 움들은 정말 공사 현장에 대해서는 재능이 넘쳤다.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던 우노가 말했다.
“서준, 내게도 지식을 공유할 수는 없는 거요?”
그러자, 어느새 구경하러 와 김서준의 품에 꼭 안겨 있는 리노도 말했다.
“멍!”
김서준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식 공유는 노움과만 되더라고요. 제힘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그게 조건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멍···.”
“킁. 알겠소···.”
리노가 시무룩해한다. 하긴, 뭐든 리노와 노움은 경쟁하듯 함께 했던 일.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리노는 팔이 없잖아.’
김서준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키고 다른 말로 리노를 달랬다.
“대신 네게는 반달이와 일호 가족이 있잖아.”
“멍.”
김서준의 위로에도 리노의 대답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런데···.
그 뒤로 보이는 우노의 얼굴에도 만만치 않은 아쉬움이 드리웠다. 아니, 인제 보니 도스도 그런 모습이네.
‘다들 굴착기가 그렇게 운전해보고 싶었나?’
하긴 드워프는 처음부터 굴착기나 트랙터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아마 트레스라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관심이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래도 한번 단체로 중장비 운전 클래스라도 열어야겠네.’
그러다 문득, 김서준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
‘생각해보니 나 중장비 면허가 없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좀 따놓을까.’
김서준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도스가 김서준에게 말을 걸었다.
“서준, 근데 여기에는 무엇을 심을 거요? 여기는 신농의 땅이 아니지 않소. 세계수의 가호로 좋은 땅이 되었긴 하지만, 사과밭까지 만들면서 여기까지 농사를 지을 수 있겠소?”
도스의 말 대로였다. 사과밭이 완성되면 드워프 들의 보리밭을 조성해야 했다. 동시에 양조장도 건설할 계획이었다.
‘양조장은 이것저것 할 게 많아서, 재료도 필요하다고 했지?’
심지어 몇몇 재료는 오는 길에 썩어버려서 몬스터 사냥도 필요하다고 했다.
‘뭐, 몬스터 사체야 인터넷으로 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드워프들은 이제 더 바빠질 거야.’
곧 트레스가 하는 매표 일도 마을 주민들에게 부탁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움들의 수도 늘어났지만, 지금보다 더 넓은 구역을 커버하기는 힘들 거야.’
드워프의 보리농사, 사과 농사, 토종작물에 감자까지. 움들이 할 일은 여전히 태산처럼 쌓여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세계수의 말대로 터전의 안정성을 높이고 키우기 위해, 크리스마스트리 관리와 더불어 농원 계획도 새롭게 구상할 생각이었다.
‘마을을 더 활성화해야 하니까.’
토종작물 사업도 좀 더 적극적으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어르신들이 맘 편히 농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얼마 전과는 모든 게 달랐다.
‘아무리 세계수의 가호로 땅이 좋아졌다곤 하지만, 여기서 농사 규모를 더 키우는 건 좀 힘들 꺼야.’
하지만,
“일반 작물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키울 수 있는 작물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오?”
“산양삼이에요.”
“산양삼? 처음 들어보오.”
도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김서준을 바라봤다.
“이 세계에는 삼이라는 귀한 약초가 있거든요. 그 삼을 야생에서 자라게 하는 게 산양삼이에요.”
“야생에서 자라게 한다는 건···?”
“네, 맞아요. 씨만 뿌리고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산양삼(山養蔘). 사람의 손으로 하나부터 끝까지 재배하는 인삼과는 달리 씨를 뿌리기까지만 사람의 손을 타고, 야생에서 알아서 자라는 삼을 산양삼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종종 사드시곤 했지. 몸보신 하신다고.’
그때 아버지가 김서준에게도 하나 주면, 쓰다고 울면서 으적으적 뿌리 하나를 씹곤 했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아련한 추억은 영감이 되었다. 산양삼이라면 어르신들의 건강도 챙겨 드리고, 여차하면 송이버섯이나 감자와 같이 좋은 자금줄이 될 터였다.
“서준. 아주 이상하오. 그렇게 야생에 씨만 뿌렸는데 잘 자랄 수가 있소? 귀한 약초라는 건 그만큼 야생에서 잘 못 자라기 때문 아니오?”
김서준은 속으로 ‘역시 날카롭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다는 건 희소성. 식물의 희소성은 결국 발아율과 생존율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네, 맞습니다. 실제로 산양삼의 생존율은 3% 정도예요.”
“3%면 너무 적지 않소.”
“게다가 자라는 시간도 적잖이 오래 걸리죠. 제대로 약효를 만들어 내려면 최소 4년은 걸려요.”
그러자 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냥 편하게 재배할 수 있는 대신 큰 수확은 하지 않겠다는 소리로군.”
그러자 김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무슨 소리인가?”
“이 땅이 그냥 땅이던가요?”
이 산은 세계수에게서 가장 가까운 땅. 가장 많은 가호를 받는 땅이었다. 적절한 영양소와 수분은 물론 생명력이 넘쳤다.
“게다가 여기 아래랑 저기랑 한번 봐보실래요?”
우노와 도스가 바닥과 김서준이 가리킨 곳을 수차례 확인했다.
“저쪽은 낙엽이나 마른 가지가 즐비한데, 여긴 녹색이오.”
“이건 음지 식물들인가 보오. 그래서 이렇게 겨울에도 죽지 않고 버티나 보오.”
김서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역시. 도스님이세요. 맞아요. 그리고 이렇게 음지식물이 많은 곳은 산양삼을 키우기 가장 좋은 터죠. 가장 좋은 곳 안에서도 여기가 가장 좋은 자리라는 의미예요.”
“클클. 과연 신농이오. 계획이 다 있었구먼.”
우노가 클클 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노 말대로군. 미안하오. 신농을 의심하다니.”
“아니에요. 이런 의논은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도스 님 말대로 이렇게 잘 고민했어도 망할지도 모르는 게 산양삼이고요.”
김서준이 그렇게 말하며 인벤토리에서 씨앗 두 개를 소환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해야겠죠.”
김서준이 그 씨를 땅에 던진 후 발로 대충 묻었다. 그리곤 손을 뻗고 외쳤다.
“급속 성장!”
식물에서 빛이 일더니, 땅 위로 빠르게 새싹 하나가 튀어나왔다. 뒤이어 꽃이 피고 지더니 이파리가 점점 커졌다.
“이 정도면 되려나.”
김서준은 그 삼을 꺼내 들었다. 초록색 이파리와 연결된 긴 대의 끝에 손가락 두 개 만한 크기에 삼이 달려있었다.
“와, 생각보다 크네.”
“오호···.”
“대단하오.”
드워프 들이 감탄을 토해냈다.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다면 분명 성공하겠소.”
“그래야죠. 아, 이건 선물이요.”
김서준은 삼 두 개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두 드워프는 삼을 씹더니 감탄을 토해냈다.
“향이 엄청나군. 아주 건강한 향이오.”
“한 뿌리만 먹었는데 힘이 넘치는군! 고맙소!”
김서준이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상상했다.
이 일대가 전부 산양삼으로 가득 차는 상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