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농원 만들기
1월의 어느 날.
뼛속까지 시릴법한 한파에도 김서준은 여지없이 아침 산책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엘린이 준 옷의 온도 조절 기능도 있고, 금산마을의 상쾌한 아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세계수의 가호가 내려진 후, 더 상쾌해졌기도 하고.’
계단을 내려가자 엘린이 김서준을 맞이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엘린은 오늘도 레깅스 위에 롱 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최근 광고에 나오는 여자 연예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예뻐서요.”
물론, 그 광고 속 연예인보다 엘린이 더 예쁘다. 엘프의 미모는 인간의 범주를 넘었다.
“서준 씨 은근히 그런 말 잘하네요. 서준 씨도 드라마 봐요?”
“설마요. 그냥 사실을 이야기하는 건 어려울 게 없으니까요.”
엘린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김서준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정수기로 가 물 한잔을 따라 마셨다.
“그럼 갈까요?”
엘린은 전형적인 아침형 엘프. 김서준의 조깅 시간에 맞춰 연구실에 갔다가, 일찍 들어와 밤에는 취미를 즐겼다.
“멍!”
“리노님!”
문을 열고 나오자 여지없이 김서준을 반기는 리노. 리노는 하얀색 후드에 귀여운 파란색 귀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엘린이 그런 리노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진짜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
스마트폰을 사준 뒤로, 엘린은 종종 인별그램을 보곤 했다. 리노의 옷도 인별그램에서 보고 따라 만든 옷이었다.
“잘 어울려요.”
김서준이 리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진짜 이 세계 사람들의 패션 센스는 대단하다니까요. 다음에는 뭐로 해보지?”
참고로 엘린도 인별그램을 한다. 들어가면 온갖 약초와 풀 사진이 있었다. 아이디부터가 엘스가든(El'sGarden)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움!”
노움까지 불러 리노의 등 뒤에 태운 김서준은 현관을 나섰다.
여지없이 아침부터 운동 중인 드워프와 인사한 후 김서준은 마을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어, 서준이 왔어!”
“오늘도 운동하는 겨?”
마을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터전으로 선포되고 난 후 그 대단한 메시지는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퍼졌다.
‘반응이 대단했지.’
아쥴부터 세계수의 가호까지 수없이 쏟아진 메시지창에 마을 어르신들을 당황했다. 그런 어르신들 앞에 임종철이 나섰다.
그리고 당황은 곧 환호로 바뀌었다.
“이거 완전 대박 아녀!”
“다시 농사를 시작해야겠구먼!”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가호 덕에 임종철이 연구 중인 작물들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땅이 엄청난 마나를 머금게 된 게 중요했지.’
사비오의 영향에 세계수의 힘으로 마나가 풍부해지니 저주가 강해졌다. 덕분에 100일은 걸릴 작물이 50일 만에 결실을 보았다.
‘예상 못 한 효과였어.’
거기에 실험까지 대성공이었다. 종자에 제대로 저주가 옮겨붙었다. 엘린의 감정에 따르면 효과 손실이 1도 없다고 했다.
임종철은 이 사실을 고스란히, 어르신들에게 전했다.
“....내년에는 서준이랑 저 믿고 농사 한 번 크게 지어봐유. 다 대박 날꺼유!”
덕분에 1월. 혹한까지 덮친 농한기에도 어르신들이 나와 다음 농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안 추우세요?”
“추워도 해야지. 땅이 오래 쉬어서 준비를 잘 해둬야 혀.”
“비료는 안 치셔도 되는 거 아시죠?”
“걱정 말어. 임씨가 와서 다 설명하고 봐주고 갔으니께.”
“하하,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밭에 나온 어르신들과 일일이 인사하며 김서준은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최 씨 할아버지의 가게에는 커다란 트럭이 와 있었다.
“어, 서준이 아녀! 예쁜 처자랑 애기들도 같이 왔구먼! 이리 와서 까까 좀 가져가.”
“오! 고맙습니다움!”
“멍멍!!”
김서준이 뭐라 하기도 전에 리노와 노움이 달려간다. 그러자 엘린도 눈을 찡끗하더니 그 뒤를 따른다.
“이거 참···. 죄송합니다.”
“뭘 죄송혀, 이게 다 자네덕인디. 자네 그 트리 아니었으면, 이렇게 사둘 필요도 없었을 겨.”
최 씨 할아버지의 말에 김서준이 멋쩍어했다.
‘신기하긴 해.’
처음에는 마을 주민들의 자식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올린 사진은 SNS에서 꽤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엘린도 간간이 인별그램에서 봤다고 했다.
‘그렇다고 진짜 찾아올 줄이야.’
금산마을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금천면 역시 관광이랑은 아주 먼 도시. 그 흔한 방송에 나오거나, 이름난 맛집도 없었다.
소위 ‘깡촌’인 셈.
그런데도 매일 트리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말에는 꽤 많은 사람이 왔었다.
‘하긴 멋지긴 하지.’
압도적인 외관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밤에도 절경인 데다가, 한 번씩 정자 지붕이라도 열리면 반응이 엄청났다.
마을 명물을 넘어 금천면의 명물이 될 기세였다.
‘이 기세면 두 번째 자격시험까지도 금방이겠어.’
두 번째 자격시험을 위해서는 세계수가 김서준에게 요구한 만큼 터전의 안정도를 올리고 키우는 것이었다.
즉, 마을의 활성화가 중요했는데, 트리는 거기에 적잖이 기여하는 셈이었다.
“거기에 농사도 자네 덕에 다시 시작할 준비 중이고. 정말 고마우이.”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간식도 챙겨주고 감사하죠. 제 추억도 지키고요.”
김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구석에 둔 ‘쫀드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산책을 마친 김서준은 노움에게 토종 작물 재배를 맡기고 산에 올랐다.
“크, 산 공기가 상쾌하군!”
우노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이 일대가 전부 신농의 대지가 돼서, 그런가 생명력이 넘치오. 어서 농사를 지어 술을 만들어 보고 싶소. 클클클.”
드워프 중엔 꽤 차분한 편인 도스도 설렘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은 농원 만들기의 첫 단계, 나무를 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사과라니. 참 좋은 과일을 골랐소. 아주 맛있는 술이 만들어지겠군. 클클클!”
드워프들은 술을 가리지 않는다. 포도주던, 사과주던, 맥주던 술이라면 뭔들 나쁠까만, 선호도의 차이는 있었다.
‘포도주를 가장 싫어했지.’
엘프가 가장 선호하는 술이어서일까. 포도주를 너무 고상한 척하는 술이라고 평가했다.
의외였던 건, 부동의 1위인 보리로 만들 술만큼이나 사과로 만든 술을 선호한다는 점이었다.
‘독한 술이 아니라 향긋한 술이 마시고 싶을 땐 그만한 게 없다나.’
김서준은 사과주 경험이 없어 그 맛이 궁금했다.
‘신농의 땅에서 자란 사과를, 최고의 전문가인 노움과 도스가 관리해서, 트레스가 만든 양조장에서 술로 빚는 다라.’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지 않는가?
하지만,
사과를 고른 이유가 드워프를 위한 건 아니었다. 신농의 힘이 세지면서 그들에게 줄 보리밭은 이미 김서준의 밭 옆에 1000평 규모로 구해 놨다.
‘리노가 조사한 자료 덕이지.’
리노와 반달이, 일호 가족은 조사 끝에, 이 산에 사과나무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산 일대가 신농의 땅이 되었다곤 하지만, 원래 생각대로 산에 많은 나무로 키우는 게 좋겠지. 그게 산과도 잘 어울릴 테니까.’
덕분에 드워프는 가장 좋아하는 술 두 가지를 동시에 기르게 될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
“근데 트레스는 또 트리 갔어요??”
“서준. 트레스, 이 녀석 요즘 아주 신났네.”
노르웨이에서 온 헌터라는 컨셉에 완벽하게 적응한 탓이었다.
“매일 컴퓨터라는 거로 쇼핑하는 데 푹 빠져버렸어.”
드워프가 인터넷 쇼핑이라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긴, 그래서 일거리를 준거긴 하지.’
김서준은 트리에 들어가는 데, 마을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기로 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일종의 관리비이자 드워프 들에게 수익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돈을 줄 핑계가 필요했으니까.’
운동기구부터, 막대한 양의 술까지. 드워프는 살 게 많았다. 특히 트레스는 재료비로 엄청난 돈을 소모하고 있었다.
문제는 드워프의 자존심이 김서준에게 손을 벌리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
“노동력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받겠네!”
우노, 도스, 트레스 세 사람 모두 그렇게 선언했다. 덕분에 이런저런 핑계로 일거리를 주고 임금을 지불 해야 했다.
트리 관리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트리를 직접 만든 트레스가 가장 적임자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무슨 검을 사겠다는데, 무기 연구라도 할 모양이오. 클클클.”
“뭘 만들지 기대가 되네요.”
김서준도 함께 웃었다. 산의 중턱쯤. 김서준이 표시해둔 팻말이 보였다.
“여기서 시작하죠.”
김서준의 말에 우노와 도스는 웃통을 벗었다. 울퉁불퉁한 근육이 밖으로 드러났다.
“나무부터 일단 전부 치워주세요. 부러뜨리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다 옮겨 심을 거니까요.”
“서준. 걱정하지 말게.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자연을 소중히 한다네.”
“우노, 자극하지 마라. 난 엘프보다 더 자연을 소중히 여긴다.”
“클클. 미안하군.”
두 사람은 대화와 함께, 주변에 있던 나무로 다가갔다. 각각 한그루씩 나무를 양손으로 부둥켜안더니 힘을 주기 시작했다.
“흡!”
기합과 함께 근육이 팽창했다. 이내 흙이 일어나며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순식간에 나무 두 그루가 뽑혔다.
“후아!”
둘은 허리를 휙 돌려 나무를 내팽개쳤다. 옆에 있던 공터로 날아간 나무가 한쪽에 툭툭 쌓인다.
‘진짜 대단하네. S급 헌터랑 비교해도 근력은 절대 안 밀리겠다.’
“우노, 요즘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냐? 거기 지방이 좀 보이는 데?”
“도스, 근육이 너무 크면 그렇게 착각할 수 있지. 그러는 너야말로 좀 느린 거 같군! 근력 부족이야. 클클!”
“오호. 오랜만에 경쟁 한 번 해야겠군.”
도스가 근육을 꿀렁이며 소리쳤다. 그러자 우노도 물러서지 않고 근육을 뽐냈다.
‘얼굴은 어르신이랑 동갑인데 이게 무슨···.’
하긴, 드워프 나이 때고 130대는 한참 혈기왕성한 시기라고 했으니 당연한가. 그래도 저 외모와 행동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는 그러면, 다른 일 좀 하고 올게요.”
“맡겨 주시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오!”
김서준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곤 이번엔 산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
세계수의 언덕 주변은 신농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 안에 생기가 넘친다.
신농의 땅을 벗어나면 그 정도의 활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생명력의 정도가 확연하게 달랐다.
‘세계수의 가호가 있다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네.’
거기다 산의 반대편이라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김서준은 만들어둔 농원의 설계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역시 이대로 가는 게 맞겠어.”
휴대폰으로 설계도를 확인한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거침없이 손을 들었다.
‘케레스의 농기구, 굴착기. 80톤.’
김서준은 80톤 굴착기를 떠올렸다. 석산에서 땅을 팔 때 쓴다는 어마어마한 굴착기. 소환이 가능할 모르지만, 되기만 한다면 대박이었다.
‘그 힘으로 나무 뽑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밑져야 본전. 김서준은 마침내 입 밖으로 외쳤다.
“소환. 굴착기!”
황금빛이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하늘이 아닌 바닥으로 모여들었다. 빛은 점점 커지더니 일대를 환하게 물들였다.
“대박···.”
마침내 그 모습이 나타났다. 김서준은 스스로도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탱크라 해도 믿을 만한 무한궤도형 바퀴 위로 컨테이너에 필적하는 규모의, 몸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가장 대단한 건···.
“지, 진짜 길고 굵네.”
길고 굵게 뻗은 암(Arm)과 그 끝에 달린 집게였다. 이번에는 땅을 파는 게 아니라 나무를 뽑으려 했기에 집게로 소환했다.
“내가 소환했지만, 진짜 너무 멋있다.”
김서준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서둘러 조종석에 몸을 실었다. 이 거대한 몸체가 빠르고 유려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너무 크네?”
산 중턱에서 쓰기엔 너무 컸다. 함부로 쓰다 가지가 부서지는 건 물론, 너무 무겁다 보니 땅이 무너질 염려도 들었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도 훨씬 크네. 너무 욕심이 과했다. 80톤은.’
김서준은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며 조종석에서 내렸다. 소환을 해제하고, 다시 작은 굴착기를 소환하려던 그때.
“음? 잠깐만 혹시 이거 되는 거 아닌가?”
머리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