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22화 (22/139)

22. 기특해 죽겠어.

고풍스러운 현대식 가옥의 뒤편. 꽤 넓게 펼쳐진 텃밭의 가운데에는 홀로 위치한 작은 독채 건물이 우뚝 솟아있었다.

임종철 부부는 텃밭을 가로질러 건물로 향했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오늘따라 유난히 가벼웠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드러났다.

“정말 서준 청년이 먼저 말했어요?”

“그렇다니까.”

“명신 아빠가 은근히 등 떠민 거 아니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대단한 생각을 했을까요?”

“그러니까 말이여.”

임종철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종 종자를 심기로 했다니. 참으로 기특혀.’

임종철은 농사에는 이제 여한이 없었다. 명인의 칭호와는 별개로 하고 싶었던 일은 대부분 이뤘다.

‘남은 숙원은 토종 종자뿐이지.’

임종철은 평생 농부였다. 많은 농부를 만났고 그중에는 열심히 하는 농부들도 많았다. 그 친구들이 잘 됐으면 했다.

이미 앞서 여러 가지를 이룬 선배의 마음이고, 한국의 농사 명인으로서 한국 농업을 위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

그 이유 중 큰 부분이 바로 종자였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은 외국의 종자다. 정확히는 외국에서 개량된 종자였다.

얼핏 보면 그게 무슨 문제냐 싶다. 하지만 실상은 심각하다.

‘일단 로열티가 문제지.’

외국 종자를 들여오는 가격은 절대 싸지 않다. 토마토와 파프리카 씨앗이 금보다 비싸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뿐일까. 갑질도 심허지.’

작물에 문제가 생겨도 종자의 문제라는 걸 입증받기 어렵다. 종자를 판 회사는 농부의 책임으로 떠넘겨버리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또한, 이렇게 사 온 종자는 한번 열매를 맺으면 모두 죽는다. 내년이 되면 또 종자를 사게 하기 위함이리라.

‘자급할 방법도 없는 거지.’

결국, 매년 막대한 로열티와 함께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래서 토종 종자를 지키고 상품성을 키우는 게 필요하건만.

‘아직은 많이 부족허지. 워낙 외국이랑 차이가 크게 나니까.’

외국은 대기업이 참전해 종자 전쟁을 하는 중이었다. 자금력도 인력도 기술력도 국내와는 수준을 달리했다.

그뿐일까.

익숙한 모양, 익숙한 색, 익숙한 향.

소비자는 익숙함을 선호한다. 몇몇 좋은 토종작물들이 외면받은 이유도 ‘익숙함’이라는 허들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공사례도 있긴 하지.’

임종철 역시 농촌 진흥청과 협력해 딸기나 포도 등 몇 가지에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실패로 끝났다.

그 아쉬움을 달래고 작게라도 토종 종자 보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만든 게 바로 지금 두 부부 앞에 있는 종자 창고였다.

“조금 키우기 어렵더라도 맛있는 작물을 키우고 싶어서 찾다 보니 토종 종자를 찾았다고 하더구먼. 겸사겸사 사라져가는 작물도 지키겠다고 하는 디, 아주 기특해 죽겠어.”

“능력도 좋고 마음씨도 착하고. 볼수록 참 좋은 청년이에요.”

“그러니까. 누가 데려갈는지. 아주 그 여자는 복 받았다니까.”

김향숙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누구랑 다르게.”

“이 사람이 뭐라는 겨.”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단으로 이뤄진 선반에는 씨앗이 잔뜩 채워진 병들이 진열되어 있다. 병마다 매직으로 적은 투박한 이름표는 두 사람이 직접 써서 마킹 해놓은 이름표였다.

“가만 보자. 내가 노랑 당근이랑 담배 상추 챙길 테니까. 임자는 개구리참외랑 삼동대파 좀 챙겨 보라고.”

“작물도 야무지게 좋은 것들로만 골랐네요. 근데 서준이는 이거 다 재배할 수 있데요? 다 재배 방법이 생소할 텐데.”

김향숙이 걱정된다는 듯 씨앗을 담으며 말했다. 그러자 임종철이 혀를 끌끌 찼다.

“걱정 말어. 그 접대 본 노움 있잖여? 그 작은 요정 같은 거 말여.”

“아, 그 꼬마 친구요. 네. 그 친구가 정령이라면서요?”

“맞아. 요정이 아니고 정령이랬지. 여하튼 그 녀석이 아주 야물딱져. 농사를 한두 번 져본 솜씨가 아니더구먼. 그 녀석이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구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명신 아빠가 잘 좀 챙겨줘요.”

“그려그려.”

임종철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내심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텃밭이 워낙 넓어서 씨앗이 부족하겠구먼. 몇 개는 진흥청에 좀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겸사겸사 서준이가 부탁한 일도 좀 빠르게 해달라고 말도 허구.”

“또 부탁한 게 있어요?”

“별건 아녀. 새로 품종 출원한다길래 내가 해준다고 했지. 한창 바쁘니까.”

“벌써 새로 품종 출원할 게 있어요?”

“그거 말이여. 송이버섯. 흠흠···.”

임종철은 대답하며 괜히 헛기침했다. 김향숙도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며 딴청을 피웠다.

****

“설마 어르신이 종자를 가지고 계셨다니. 역시 어르신이야.”

과연 명인답게 임종철은 이미 토종 종자를 재배하고 있었다. 거기에 종자 은행까지 있다 보니 종자를 찾고자 고생할 필요가 없어졌다.

김서준이 부탁한 다음 날 아침, 임종철은 곧장 씨앗을 가지고 밭에 나타났다.

“종류는 다 있는데, 수량이 좀 부족할 겨. 주문하긴 했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겨.”

“주문이요? 사는 거면 제게 시키시죠. 제가 해도 되는 데.”

“아녀. 난 자네가 토종 종자를 골라 준 것만도 고맙구먼.”

임종철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꼭 잘 키워주게.”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 도와줘도 되지?”

임종철이 적당히 앉을 자리를 찾으며 물었다.

“오늘도 구경하고 가시게요?”

“그럼. 보고 가야지. 저 쪼그마한 것들이 일하는 게 을마나 재밌는디.”

노움이 나타난 이후. 임종철은 일을 돕기보단 이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 구경하기를 즐겼다.

“여기서 봐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혀.”

“네. 감사합니다.”

‘어르신도 그렇고. 리노랑 노움 때문에 요즘은 밖에서 밥 먹는 일도 많고. 오두막이라도 하나 지을까?’

김서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밭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움!”

밭에 도착하자 노움이 인사한다. 미리 나와서 김서준을 기다리던 움들의 몸이 일제 김서준을 향한다.

“일동 차렷! 신농님 께 경례!”

“움!”

여느 때처럼 칼 각 잡힌 경례가 이어졌다. 옆에 있던 리노도 따라 함께 인사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김서준도 가볍게 손을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저 멀리 있는 임종철에게까지 인사를 마친 노움이 물었다.

“신농님이 들고 계신 게 오늘 심을 씨앗입니까움?”

“응. 세계수에게 받은 과제가 이 씨앗을 잘 키우는 거야. 노움만 믿으면 되겠지?”

김서준이 반쯤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물론입니다움!”

노움은 역시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김서준은 임종철에게 받은 씨앗이 담긴 병을 노움에게 건넸다.

은은한 초록빛으로 감싸진 병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노움은 그 병들에 담긴 씨앗 하나하나를 살폈다.

그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마치 호기심으로 빛나는···?’

순간 김서준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작물을 보는 노움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난다고?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설마?’

“노움, 너 혹시 이 씨앗들 뭔지 알아?”

“모, 모릅니다움!”

“그럼 재배하는 방법은 알아?”

“모릅니다움···.”

노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

둘 사이 정적이 흘렀다. 김서준이 난색을 보였다.

‘설마 노움이 모르는 작물이 있을 줄이야.’

농사의 전문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감자와 미트루트 역시 능숙하게 다뤘던 노움이었기에 김서준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긴 정령도 생명체인데,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지.’

그때, 노움이 다시 입을 뗐다.

“괜찮습니다움! 방법이 있습니다움!”

“방법?”

“씨앗의 소리를 들으면 됩니다움!”

“씨앗의 소리? 그게 뭐야?”

“노움은 씨앗하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움! 씨앗이 자신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다 알려줍니다움!”

김서준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 능력이 있었던 거였어?’

이제야 노움이 왜 농사의 스페셜 리스트인지 알 수 있었다. 작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작물인들 수월하게 키워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알아내는 재배 방법을 알아내는 거라면···.’

김서준이 생각을 이어가려 할 때, 뒤에서 임종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는가?”

“아, 아닙니다.”

인사를 마치고도 한참을 가만히 있는 걸 보고 걱정되어 온 듯했다. 김서준이 웃으며 대답하려는 데, 노움이 먼저 말했다.

“이 씨앗을 제가 처음 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려? 그럼 이 할애비가 좀 알려줄까?”

임종철이 온화한 표정으로 노움에게 물었다.

“아닙니다움! 제가 씨앗한테 물어봐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움!”

“씨앗한테 물어본다고? 우리 노움이는 그런 것도 할 수 있는겨?”

“그렇습니다움!”

“대단허네! 허허.”

마치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 같았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게 났겠어.’

김서준이 노움을 보고 물었다.

“노움, 씨앗에게 물어봐서 재배 방법을 알아내는 거지? 딱 정답이 떠오르는 게 아니고?”

“그렇습니다움!”

“그럼 씨앗이 생각하는 거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경우도 있겠네? 씨앗이 경험해보지 못한 방법이 있다면 말이야.”

“맞습니다움! 그럴 수도 있습니다움!”

“그럼 어쩔 수 없네.”

김서준이 죄송한 표정을 지은 채 임종철을 바라봤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괜찮으시면 이 씨앗을 재배하는 방법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노움이 김서준을 따라 말한다.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움!!”

임종철이 노움을 토닥이며 말했다.

“물론일세.”

일말의 고민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 임종철은 곧장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 방식은 실전 체험.

“기존 당근하고 심는 방법은 다를 게 없어. 다만···.”

임종철은 이론을 설명하면서 곧장 시범을 보여줬다. 그러면 김서준과 노움이 옆에 하나씩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이었다.

‘역시 실전은 다르구나.’

김서준이 토종 종자를 찾을 때, 재배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조사했다.

김서준은 아직 농사 초보. 혹시라도 너무 기이한 방법으로 재배하는 작물이 있다면 피하기 위해서였다.

‘조사하면서 자연스레 얻은 지식도 있고.’

그런데 임종철의 팁은 인터넷에서는 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몇 가지 토종작물 연구에도 참여하셨다고 하더니. 역시 일반 작물 말고 토종작물도 엄청 잘 아시는구나.’

김서준은 감탄과 함께 하나하나 임종철의 말을 새겼다.

“근데 노움아. 네 작은 친구들은 안 들어도 되는 거여? 그 친구들도 함께 일해야 하잖어.”

강의 시작과 함께 움들은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땅 밖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움! 저희는 텔레파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움!”

“그렇구먼. 그럼 다행이여. 갸들 다 가르치려면 날 새야 했을 텐디”

임종철이 ‘허허’ 소리 내며 웃는다. 그러자 노움도 따라 ‘움움’ 하며 웃는다.

김서준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강의는 그 뒤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잘 진행되었다.

“삼동대파는 삼단으로 자라서 삼층 파라고도 불려.”

“그렇습니까움?”

“나중에 요놈 자라면 위에 있는 거 따서 키워도 뎌.”

“알겠습니다움!”

김서준이 무안할 정도로 적극적인 노움과 덕분에 신이 난 임종철의 캐미는 실로 엄청났다.

강의가 끝난 후. 작업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됐다.

‘텔레파시라더니 엄청 편하네.’

움들은 마치 직접 배운 것 마냥, 별다른 지시사항 없이 척척 일을 처리했다.

해가 중천을 조금 넘어 그림자가 기울 때쯤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리노의 등에 탄 노움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재밌었어?”

“좋았습니다움! 할아버지의 수업 완전 재밌었습니다움!”

“그래?”

“씨앗도 모르는 내용도 있었습니다움! 씨앗도 막 놀라고 저도 막 놀랐습니다움!”

노움이 손짓하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하긴 나도 재밌었는데. 노움은 더 재밌었겠지.’

김서준은 그런 노움이 귀여워 모자 위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던 그때,

“음?”

휴대폰이 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