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버지는 아니었다(2)
혼란스러웠다.
‘아버지가 신농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
신농의 땅이니. 케레스의 농기구니. 이런 대단한 것들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농의 힘을 가지고 고블린에게 죽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도 했고. 하지만 세계수까지 아니었단 말이야···?’
그럼 원래 있던 거대한 나무는 뭐지? 평범한 나무였던 건가? 왜 그 나무를 매일같이 찾아가셨던 거지? 아버지 묘 앞에서 나눴던 대화는? 그게 정말 내가 만든 환상이었던 건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숨겨야 할 비밀이 있어서 모른 척하는 건가?’
김서준이 세계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괜찮아?”
세계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봐도 세계수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아.’
앳된 외모 때문일까. 연기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도리어 진심이 뚝뚝 묻어나오는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 있자니, 순간 의심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래, 아버지가 신농이 아닌 게 뭐 대수라고. 지금은 신경 쓰지 말자.’
정말 중요한 건.
지금 자신은 진짜 신농이고 눈앞에는 세계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의문은 차차 생각해보자.’
김서준은 세계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긋 웃었다.
“미안. 잠깐 당황해서 그런 거야. 이름을 가지고 싶다고?”
“응. 리노처럼 나도 이름을 가지고 싶어. 서준이 지어준 이름.”
“이름이라. 그럼 아리아로 할까?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아리아? 아리아? 음 좋다. 마음에 들어.”
대답과 함께 일전의 빛 무리가 다시 한번 서준을 덮쳤다. 눈꺼풀 위로 광채가 사라졌다는 걸 느꼈을 즈음.
“신농님!”
노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서준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코앞까지 다가온 노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으십니까움?”
“응. 괜찮아.”
“갑자기 정신을 잃으셔서 놀랐습니다움!”
노움의 말을 들어보니 선 채로 기절한 모양이었다. 걱정하는 리노와 노움에게 김서준이 말했다.
“세계수를 만나고 왔어. 그리고 과제를 받았어.”
“과제를 말입니까?”
“응.”
김서준은 고이 쥐고 있던 왼손을 폈다. 안에는 좀 전에 받은 씨앗들이 있었다.
‘역시 환상이 아니었어. 이게 과제야.’
“그럼 이제 가자.”
김서준은 노움과 함께 울타리를 빠져나왔다. 다시 모든 보안 장치를 켠 김서준이 세계수를 보며 말했다.
“내일 보자. 아리아.”
김서준의 인사에 맞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 어렴풋이 '응.' 이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김서준이 텃밭에 심을 작물을 고르는 기준은 단 하나였다.
‘맛. 맛이 제일 중요해.’
팔아야 할 상품이라면 감자로 충분했다. 텃밭은 온전히 먹기 위한 작물을 키우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요리에 관심도 있고 나름 미식가인 김서준이기에 ‘맛’은 당연하게도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얼마나 키우기 힘든지는 상관없어.’
농작물 관리는 스페셜 리스트인 노움이.
자라는 환경은 신농의 땅이 있지 않던가.
반쯤 날로 먹는 농사를 짓는 김서준에게 작물 재배의 난이도는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두 번 정도는 실패해도 상관없어.’
물론 애써 키운 작물이 흉작을 겪는다면 마음은 아프리라.
하나, 팔 작물은 아니기에 누가 피해 볼 일은 없었다. 손해를 물어줄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농사 순환도 현격히 빠르니, 흉작이라면 빠르게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면 됐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맛있고 자주 먹을 수 있는 작물로 고르자.’
그렇게 찾고 찾다 보니 눈에 들어온 게 토착 작물이자 토종 종자들이었다.
‘이름도 생긴 모양도 신기한 작물들이었지.’
토종 종자는 생소한 모양이나, 노력 대비 생산량이 부족해 상품성이 떨어졌다. 특히 키우기 쉽고 맛도 적당한 개량종이 많이 나오면서 그 입지가 줄어들었다.
‘맛이 아무리 좋아야 상품성이 낮으면 농사에서는 꽝이니까.’
뒤집으면 상품성은 필요 없는 김서준에게는 최고의 작물이라는 의미였다. 텃밭을 개간하면서 김서준은 토종 종자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종자 구매만을 앞둔 상황에서 아리아, 그러니까 세계수의 자격시험을 부여받았다.
“정말 운이 좋았어.”
이 말 말고 달리 지금 상황을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어차피 하려던 일이 과제로 내려온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서준은 컵에 담아놓은 작은 씨앗들을 확인했다.
개구리참외, 노랑 당근, 삼동파, 담배 상추.
각각의 씨앗 옆으로 하나씩 이름이 나타난다.
‘역시 전부 토종종자야.’
그것도 김서준이 관심 있던 종자들이었다. 단 한 개를 제외하고.
‘이건 뭐지?’
‘사비오’라는 생소한 이름을 가진 씨앗이 하나가 함께 들어있었다. 바다와 색이 비슷한 묘한 파란색 씨앗은 완벽히 처음 보는 씨앗이었다.
김서준이 씨앗을 꺼내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이상하네.’
식물이 아니라, 장식에 쓰일법한 비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김서준은 온 집중을 씨앗으로 모았다.
그러자 새로운 안내 창이 쑥 튀어나왔다.
[사비오]
현자들이 살던 나무로 알려진 전설의 콩나무.
‘라이너스 대륙’에서 자라던 작물이지만, 이제는 멸종되고 딱 한 개의 씨앗만이 남아있다. 푸른색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생으로는 먹으면 독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차로 끓여내면 머리를 맑게 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재배 방법>
- 열매에 들어있는 푸른색 콩(종자)을 땅에 심는다.
<용도>
-차로 우려내어 섭취.
-심신안정. 집중력 향상 등에 효과.
“이건 토종작물이 아니잖아? 심지어 이 세계의 작물인데?”
이상했다. 아리아가 이야기한 것과는 다른 부류의 작물이었다.
[이름을 준 보답으로 선물을 보냈어.]
[분명 잘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럼 다음에 또 봐!]
김서준의 의구심에 대답이라도 하듯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편지처럼 메시지가 끊긴 걸 보니 마지막 힘을 다해 남긴 편지와 비슷한 듯했다.
‘선물이었구나! 고마워. 아리아.’
김서준이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흠..."
설명만 봤을 때는 딱히 대단해 보이는 건 없었다. 가지고 있는 효과도 당장 김서준에게 필요한 효과는 아니었다.
‘그래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면 뭔가 의미가 있겠지. 아니면, 효과가 말도 안 되게 엄청 난다든가.’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컵 속에 씨앗을 집어넣었다.
‘작물은 다 정했으니까. 얼른 텃밭 농사도 시작하자.’
김서준은 기분 좋게 웃으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
“소민 언니!”
“소민 씨,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언니 너무 멋있어요!”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인파들. 갈색 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여자는 손을 흔들며 밴 위에 올랐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곧장 밴의 문을 닫고 운전대로 향했다.
-쿵.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전소민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이건 아니에요.”
언제나 온화했던 전소민의 얼굴에 기어코 짜증이 들어섰다.
“제가 무슨 연예인이에요? 무슨 온종일 광고 찍고 티비만 나가고! 차는 또 이게 뭐야!”
전소민의 말에 운전대를 잡은 남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김서준이 나간 이후 수익률이 떨어졌다. 엄청난 속도로. 그러자 MP사는 길드의 운영 안건에 다음 조항을 올렸다.
‘전소민 길드장의 대외활동을 통한 수익 개선.’
그리고,
놀랍게도 이 안건은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물론 결과는 좋았지.’
전소민의 방송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특히 탁월한 외모는 순식간에 그녀를 광고 섭외 1순위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헌터 일과는 멀어지고 있었기에. 마음은 점점 더 괴로웠다.
“그래도 다들 좋아하지 않습니까.”
“저는요? 다 좋으면 저는 안 좋아도 되는 거예요? 전 이러려고 헌터가 된 게 아니라고요!”
“하지만 길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다들...”
“한 비서님.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전소민이 순간 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죄송해요. 한 비서님 잘못도 아닌데. 제가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나 봐요.”
“괜찮습니다.”
한 비서의 입안이 씁쓸했다. 한 비서 역시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태는 누가 봐도 의도적이었다. MP사가 제대로 했다면 다시 내실을 다지고 길드 구성을 점검했으리라. 아니, 애초에 이런 재정난을 겪지도 않았어야 했다.
‘자신들의 이미지 메이킹에 길드장님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었겠지. 전 부길드장님이 있으셨다면 여기까지는 안 왔을 텐데···.’
어쩌면 간악한 MP사는 이 사실을 알고 부 길드장을 내치는 걸 계약 조건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쯤 되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하나.’
마치 생각을 읽은 듯, 전소민도 넋두리를 뱉었다.
“하···.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전소민이라고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김서준만큼 할 수는 없었다. MP사에서 온 경영진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서준이는 여태 이런 걸 다 이겨내면서 했겠지. 이렇게 힘들었으면서 내색도 안 하고···. 내가 더 챙겼어야 했어.’
이래저래 마음이 온통 후회로 뒤덮였다.
“서준이가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지금이라도 다시 데려오고 싶어···.”
자기도 모르게 전소민의 입에서 본심이 튀어나왔다. 스스로 놀란 전소민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내가 무슨 염치로 이제 와서 돌아와 달라고 하겠어···.’
그때였다.
“어...”
전소민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며 전소민이 당황했다.
“이게 뭐야...”
전소민은 서둘러 티슈로 코를 막았다.
‘S급 헌터가 코피라니.’’
극한의 스트레스로 몸이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그래. 자업자득이지.’
전소민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문득 떠오르는 그리움에 눈물이 살짝 차올랐다.
백미러로 보고 있던 한 비서가 말했다.
“길드장님. 전 부길드장님 께 조언이라도 구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단짝 친구로서 말입니다.”
순간 전소민의 눈이 번뜩였다.
“그, 그쵸? 친구로서 상담 정도는 해도 괜찮겠죠?”
“저라면 그럴 거 같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힘들다는데 당연히 도와주고 싶을 테니까요.”
가장 친한 단짝 친구. 고민 상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된 거 겸사겸사 휴가도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휴가요? 지금 한창 바쁠 텐데...”
“어이쿠 이런. 바쁜 시기에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네요. S급 헌터가 코피라니 말입니다. 꽤 심각한 거 같은데요. 주치의라면 아마 원인은 스트레스고 맑은 공기 쐬며 요양하라고 할 거 같습니다만...”
범상치 않은 연기력으로 한 비서가 말했다.
“그,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심상치 않은 거 같았어요!”
전소민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더 많은 활동을 위해 건강을 좀 챙길 시기네요.”
“마 ,맞아요!!”
전소민이 웃으며 한 비서를 바라봤다. 한 비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일주일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감사해요! 한 비서님!”
-쾅!
‘그렇게 좋으실까.’
달리는 밴의 문을 박차고 튀어 나가는 전소민을 보며 한 비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