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일과 삶의 밸런스
-구구구구.
황금빛 트랙터가 갈색 땅을 갈며 유유히 움직였다. 밭을 가는 트랙터 안에 김서준은 흡사, 드라이브하듯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탈 때마다 놀랍다니까.’
사실 승차감에 눈앞에 형형색색에 수놓은 풍경만 생각하면 드라이브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리노, 힘들면 쉬어도 돼.”
“멍멍!”
김서준이 말하자 리노는 괜찮다는 감정을 보내왔다. 리노의 역할은 감자 종자 심기. 김서준이 시킨 건 아니었다.
‘돕고 싶어요!’
그런 감정을 뿜어대던 리노는 김서준을 관찰했다. 그리고는 앞발로 땅을 판 후 입으로 종자를 심기 시작했다.
‘기특한 녀석.’
한번 방법을 터득한 리노는 그 뒤로 종자 바구니를 물고 다니며 김서준을 도왔다. 짧은 다리로 바구니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이야. 힘내자!”
“멍!”
밭의 확장은 순조로웠다. 황금 트랙터는 아무리 거친 돌도 손쉽게 부숴버렸다. 리노만큼 든든한 임종철의 지원도 있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자신의 검은 트랙터로 맞은편 밭을 갈고 온 임종철이 물었다.
“네, 이제 밭은 다 갈았고 종자만 심으면 될 거 같습니다.”
“그려그려. 리노는 또 저러고 있는구먼. 아주 똑똑하고 기특혀.”
“그러게요.”
김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리노는 종자를 심느라 고개를 묻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얼른 저도 리노 도와야겠네요.”
“그러지 말고 잠깐 쉬지. 이제 점심시간이지 않나.”
김서준이 손목을 들어 올렸다. 바늘이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됐네요.”
“시간도 모르고 농사의 재미에 푹 빠졌구먼. 마누라가 오늘 차돌 된장찌개 끓인다고 하더구먼. 같이 가서 한 술 들게.”
“차돌 된장찌개요? 꼭 가야겠는데요?”
함박웃음을 지은 김서준이 소리쳤다.
“리노! 밥 먹고 하자!”
밥이라는 소리에 리노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열심히 일했으니까, 특식이야.”
김서준은 챙겨온 큼직한 도시락통 하나를 리노에게 내밀었다.
깍뚝 썰기 한 소고기와 미트루트를 섞은 특식. 리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맛있게 먹어.”
리노는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며 도시락통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본 임종철이 놀랍다는 듯 물었다.
“저 작은 녀석 어디에 저게 다 들어가는 겨.”
‘원래 덩치만큼 안 먹는 게 다행입니다.’
김서준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임종철이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리노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이런, 우리도 얼른 식사하세.”
“네. 어르신.”
임종철이 수저를 들자 김서준도 따라 수저를 들었다.
“음~”
김서준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여사님 차돌 된장찌개는 최고야.’
직접 만든 된장은 시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고 구수한 향을 자아낸다. 그 구수한 향과 맛 사이, 차돌의 기름지고 깊은 감칠맛이 입속에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역시 주인공은···.’
육수와 된장이 섞인 주황빛 국물 사이 김서준이 감자 하나를 떴다.
‘이거겠지?’
서준이 직접 캐서 선물한 감자는 된장 국물을 살짝 머금어 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합.”
국물과 함께 감자를 입안으로 넣었다. 짭조름한 맛이 입안에 퍼지며 포슬한 감자가 녹듯이 바스러졌다.
‘내가 키웠지만, 진짜 맛있어.’
원래 맛있는 찌개에 서준의 감자가 합쳐지니 명인이 끓인 찌개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다음에는 여사님께 레시피 받고, 내 농산물 써서 식당을 차려볼까?’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칠 정도였다.
“자네 감자는 정말 최고구먼. 이 부서지는 식감이나 전분, 향도 그렇고 내 감자보다 더 나은 거 같어.”
임종철 역시 엄지를 치켜들었다.
“과찬이십니다.”
그게 식탁에서 둘의 마지막 대화였다.
두 사람은 황홀한 찌개의 맛에 빠져 밥그릇을 비울 때까지 자신도 모르게 식사에 열중했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마침내 수저를 내려놨을 때, 임종철이 물었다.
“그래서 사업은 어떻게 할지 정했는가?”
엄민호와 거래를 튼 이후, 김서준과 거래하고 싶다며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엄민호 셰프가 새로 선정한 곳이라는 게 알려진 덕이었다.
‘덕분에 충남에 어지간한 식당은 다 왔던 거 같아.’
심지어는 몇몇 로컬 마트에서도 접촉해왔다. 김서준은 며칠을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네, 정했습니다.”
마지막 밥을 꿀떡 넘긴 김서준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지역 맛집이나 셰프가 운영하는 곳으로 딱 10곳만 추렸습니다. 엄민호 셰프님과는 계약을 끝냈고, 나머지와도 이번 주 내로 체결할 예정입니다.”
“의외구먼. 딱 10곳만 하기로 한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이유가 뭔가? 기왕 하는 거 크게 벌려도 됐을 텐데.”
시작부터 사람이 몰렸다. 농산물을 팔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이상 욕심을 안 부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지. 설마 정답을 짚어 낸 건가?’
임종철은 내심 대답을 기대하며 물었다. 김서준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제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량과 설비가 부족하고, 경험이 없습니다.”
모든 업체를 상대할 물량을 뽑는 건 불가능했다. 성장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수확하고 관리할 인력이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경험도 문제지. 문제 예측이나 대처가 힘드니까.’
“이 상태로 욕심을 부리는 건 과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스템을 만들고 품질을 관리하고 사업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포기하긴 기회가 아쉬웠습니다.”
‘정답을 잘 찾았어.’
임종철이 김서준의 대답에 만족했다. 욕심에 눈이 멀지 않은 아주 합리적인 대답이었다.
‘본인 능력은 탁월하니 천천히 시작하는 게 백번 옳지. 현혹되지 않고 잘했구먼.’
그러나 김서준의 대답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프리미엄 전략을 쓰기로 했습니다.”
“프리미엄이라?”
“가격이 높고 질이 좋은 대신 희소성이 큰 게 프리미엄의 특징입니다. 딱 제 농산물이 그렇죠. 어르신과 셰프님 덕분에요.”
김서준은 사업에 매몰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차고 넘치는 능력으로 만들어진 부산물을 염두에 둔 '가벼운' 사업으로 구상했다.
'지금의 한적하고 여유로운 삶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할 생각은 없지.'
다만 규모가 가볍다고 수익도 가벼울 필요는 없었다. 기왕 하는 거 최대한 이익을 얻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서준은 '프리미엄 전략'을 세웠다.
농산물의 질이야 자신 있었고 보증수표도 확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은 물량을 프리미엄 상품의 희소성으로 둔갑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러면 리스크도 거의 없습니다. 무리하게 농사를 확장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임종철은 적잖이 놀랐다.
‘자신의 부족함을 마케팅 전략으로 쓴 데다가 출구 전략에도 적용했군! 길드에서 부 길드 장을 했다더니 수완이 참 좋구먼!'
속으로 감탄이 터져 나왔지만, 임종철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유통하는 양이 너무 적지 않나? 수익이 날려면 어느 정도 규모는 있어야 할 텐데.”
“프리미엄 작물인 만큼 경매가 아닌 직거래 납품을 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중간에 낭비되는 비용을 줄일 겁니다.”
임종철이 김서준을 바라봤다. ‘그게 다냐’고 묻는 눈빛. 김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제 능력을 최대로 활용해서 수익을 극대화할 겁니다. 비료, 농약 등의 비용부터 인력도 더 쓰지 않을 겁니다. 물량은 짧은 수확 주기를 이용해서 맞추려고 합니다. 또한 저탄소 농작물, 유기농 등 가격을 올릴 수 있는 인증도 아무런 투자비용 없이 취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가격은 좀 더 높일 거구요.”
“요컨대 투자 비용 없이 수익만 극대화한다. 이건가?”
“맞습니다.”
임종철은 혀를 내둘렀다.
‘능력을 사업 전략에 끝까지 다 녹여냈구먼. 대단하군, 대단해.’
임종철은 명장으로서 수많은 기업과 거래했다. 기업의 규모에 상관없이 계약 테이블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도우려고 했는데, 이거 완전 노파심이었어.’
임종철은 이내 안심하며 농담을 던졌다.
“이거, 자네 능력으로 농사만 날로 짓는 줄 알았더니, 사업도 날로 먹겠구먼."
****
‘벌써 온 지 한 달이 넘었네.’
9월 말 가을에 접어들던 날에 왔건만 벌써 달력은 11월을 열고 있었다. 변한 건 달력의 숫자만이 아니었다. 매일 달리던 길의 풍경도 많이 변했다.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었던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낙엽이 가득했다.
‘변하지 않은 건 저기밖에 없네.’
김서준의 시선이 밭으로 향했다. 신농의 힘 덕분에 사시사철 최적의 기온을 유지하는 밭만이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또 납품 준비해야겠어.’
파릇파릇한 싹의 상태를 알려주듯 그 위에 90%라고 적힌 푸른색 고리가 잔뜩 했다.
‘땅 상태도 좋고. 작물도 잘 크고 있고. 내일이면 수확할 수 있겠어.’
계획했던 대로 모든 게 잘 굴러가고 있었다.
“문제는 다음 스텝인데···.”
종자 심고.
가끔 잡초 뽑고.
아주 가끔 물주고.
수확하기.
김서준이 할 일이 다른 농부들에 비해 훨씬 적은 건 맞았다. 규모를 키웠어도 이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계획대로. 다만 조금씩 조금씩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사업이라는 게 농사만 짓는 게 아니니까. 예상대로 혼자는 지금이 한계야.’
이대로면 점점 일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또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결국 투자를 더 해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농사가 ‘수확체감의 법칙’을 따른다는 점이었다.
‘어중간하게 투자해봐야 효용이 떨어질 텐데···.’
한참을 고민하던 김서준은 머리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냈다.
‘사귀지도 않았는데 신혼 차리는 상상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시작했는데 너무 앞서 나가네. 천천히 하자.'
대충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느끼며 김서준이 리노에게 말했다.
“리노, 좀 더 빨리 뛰어볼까?”
“멍!”
리노의 울음소리를 신호 삼아 김서준이 달렸다. 리노도 순간 땅을 박차며 뛰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올수록 몸에는 오히려 활력이 돋는다. 김서준은 그 기분 좋은 감각에 집중하며 고민을 떨쳐냈다.
앙상한 가지로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오솔길을 지나 언덕에 다다른다. 갑자기 펼쳐지는 푸른 잔디밭에 발을 디디는 순간, 두 사람의 경주가 끝났다.
“후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김서준은 풀밭에 대짜로 뻗었다. 리노도 그 옆에 김서준을 따라 나란히 누웠다.
“너 그 짧은 다리로 진짜 잘 뛴다.”
“멍!”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하는 리노가 갑자기 몸을 휙 일으켰다. 그리곤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어디가?”
김서준이 몸을 일으켰다. 리노가 향하는 곳은 세계수 옆 ‘축복받은 송이버섯의 터전’이었다.
“리노, 그거 아직 먹으면 안 돼. 덜 컸어!”
놀란 김서준이 소리쳤다. 그러나 리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버섯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이, 이건?’
순간 교감으로 리노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경계? 뭐가 있는 건가?’
김서준이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리노를 따라 뛰며 송이버섯의 터전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못 보던 꽃병만 한 초록색 버섯 같은 게 자라고 있었다.
“저게 뭐지? 혹시 몬스터인가?”
리노가 펄쩍 뛰었다. 그리고는 그 초록색 버섯을 물었다. 그 순간 버섯이 소리쳤다.
“놔라움!”
“버섯이 말을 해?”
“버섯이 아니다움!”
동시에 초록색 버섯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내 가려져 있던 몸이 드러났다. 김서준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난쟁이?”
“난쟁이도 아닙니다움! 전 노움입니다움!”
노움···?
땅의 정령, 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