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52 >
“페널티킥을 준비하는 선수는 벨기에의 주장, 주성배입니다. 오늘 경기, 두 골을 기록하고 있는 주가 해트트릭을 완성하기 위해 페널티킥을 준비합니다.”
시즌 두 자릿수 골에 두 자릿수 어시스트는 이제 기본으로 올려주는 성배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다.
대회 첫 번째 골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것뿐으로 평소 심심하면 한 개씩 추가해주던 어시스트마저 한 개도 없었다.
“물론, 주는 언제나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번 대회 최고의 수비수라 할 만했지만, 평소보다 득점력은 좀 약했거든요? 그런데 마지막 경기, 결승전 단 한 경기에 모든 힘을 쏟아부으려고 그랬던 거네요.”
성배 본인은 자신의 공격력을 대단하다 여기지 않았지만, 팬들의 인식에는 골 넣는 수비수로 박혀 있었다.
세트피스를 제외하고 보면 다른 수비수들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는데, 인식이 이렇게 박힌 이유는 역시 중요한 경기에서 중요한 순간에 멋진 골을 많이 넣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중요한 경기가 되니까 경기력이 폭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결승전에 필드골로 두 골을 넣고 해트트릭을 눈앞에 둔 수비수는 주가 아마 유일할 겁니다.”
중요한 경기였기에 그런 것인지 성배는 오늘 경기에서도 필드골로만 선취 골과 동점 상황에서 앞서 나가는 추가 골, 결정적인 두 골을 터뜨리며 그런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리고 페널티킥 기회까지 주어져 해트트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페널티킥이야 하던 대로만 차면 넣는 거니까.’
지난 4강전에서 승부차기를 성공시키면서 성배의 페널티킥 연속 성공 횟수는 6회가 되었다.
여전히 성공률은 100%, 어지간하면 해트트릭이 무산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빠르고 강하게 구석을 노리면 사람인 이상 막을 수 없다니까.’
페널티킥에서 이런저런 심리전을 걸고 속임수를 활용하는 것은 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11m 거리에서 강력한 슈팅을 정확하게 찰 수만 있다면 사람인 이상 골키퍼는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성배는 가능했다.
“주, 도움닫기 후, 슈팅!! 골! 골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강력한 슈팅으로 상단 구석을 정확하게 노립니다! 이번에는 오른쪽 상단이었습니다!”
어차피 부담이 적은 페널티킥이었다.
득점왕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간절한 것은 아니었고, 이는 해트트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지도에 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이미 인지도는 하늘을 뚫었고, 이런 기록에 연연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 덕분에 연습에서와 같은 정확한 슈팅을 날릴 수 있었다.
“해트트릭! 해트트릭을 기록하네요! 주성배, 유로 2012의 결승전이라는 큰 무대에서, 32년 만에 출전한 유로컵 결승전에서 무려 세 골을 몰아쳤어요!”
아무리 부폰이라도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성배는 부폰을 상대로 침착하게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주! 주! 주! 주! 주!]]
이미 경기장에서는 벨기에 관중들이 지르는 함성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탈리아 팬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경기 종료를 기다리거나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저 유럽 최대의 스포츠 축제를 즐기고 싶어서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벨기에 관중들과 함께 벨기에의 우승을 축하해주었다.
“자, 이러면 득점왕이죠! 오늘 해트트릭으로 단번에 4호 골을 기록하면서 팀 동료 루카쿠와 독일의 고메즈 등을 제치고 득점 1위 자리를 차지, 사실상 득점왕을 확정지었어요!!”
해트트릭과 함께 대회 득점왕까지도 따라왔다.
남은 시간 동안 루카쿠가 한 골을 추가하지 않는 이상 득점왕 자리는 이미 확정적이었다.
“수비수가 유로컵 득점왕을 차지하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는 하네요.”
“주니까 가능한 겁니다. 주가 아니었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수비수가 페널티킥을 양보받고 해트트릭을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선수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주이기에 득점왕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한 시즌에 두 자릿수 골을 기록하는 수비수는 지금도 종종 있었다.
인테르의 마르코 마테라치나 바이에른 뮌헨의 다니엘 반 바이텐 같은 선수들은 한 시즌 두 자릿수 골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강력한 제공권을 앞세워 세트피스에서 득점을 올려주는 선수들이었고, 그나마 한두 번 정도에 그쳤다.
게다가 센터백도 아닌 풀백이 몇 시즌 연속으로 두 자릿수 골을 넣어주면서 유로컵 득점왕까지 차지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축하해. 또 한 건 했네.”
세리머니를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성배에게 콤파니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또 한 건이라... 그래도 이제 시작이지. 아직 스물다섯인데.”
성배는 자신을 과거로 돌아오게 했던 미련을 이미 오래전에 털어버렸다.
그러고도 수많은 업적들을 달성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목표는 조금씩 상향조정되었다.
과거의 미련은 이미 모두 청산했고, 새로운 목표들은 모두 현재의 목표였다.
더 이상 새롭게 설정할 목표가 없어지는 날, 아마 그 날은 은퇴하는 날일 것이었다.
***
“경기는 이대로 끝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경기에 대한 평가 한 마디만 해주시죠.”
벨기에는 마지막까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젠 침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꿈도 꾸지 못했던 유로 우승컵, 앙리 들로네컵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흥분한 벨기에 선수들의 패스와 킥은 조금씩 부정확해졌고, 이탈리아는 반격의 힘을 잃은지 오래였다.
“준결승전 두 경기가 모두 승부차기까지 가면서 아무래도 김이 좀 빠졌었거든요? 두 경기가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화끈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벨기에와 스페인이 맞붙었던 경기처럼 독일과 이탈리아의 4강 경기도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승부차기까지 흘러갔다.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성장한 보아텡이 합류한 독일의 수비 역시 빈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단단했다.
공격진이 상대 수비에게 고전하면서 자연스럽게 경기 내용은 조금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결승전에서 우리 벨기에 선수들이 네 골을 터뜨리며 화끈하게 마무리해주었네요. 양 팀 팬이 아닌 중립 팬 입장에서는 아마 재미있게 경기를 볼 수 있었겠죠.”
벨기에와 이탈리아 모두 강력한 수비력을 앞세운 팀이었기에, 이번 결승전 흥행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펼쳐졌다.
수비가 강한 벨기에가 수비수인 성배를 앞세워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맹폭, 성배의 해트트릭과 함께 4-1의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하아, 지금 말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정말 힘듭니다. 당장 저도 저기 있는 팬들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조금만 참겠습니다.”
중계진은 애써 담담한 척 평소처럼 경기를 마무리하려 했지만, 이미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서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흥분했는지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자, 이제 결승전까지 끝이 나는데, 마지막으로 이번 대회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주시죠.”
“음. 아아. 이번 대회는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죠.”
해설자 역시 메여오는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대회에서 벨기에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십, 수백 번을 속으로 되뇌였던 한 문장이 있었기에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유럽 축구계의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싶네요. 이번 유로 2012에서 우리 벨기에는 기존의 강팀들을 모두 꺾었고, 메이저 대회 3연패를 노리던 세계 최강 스페인까지 꺾어내면서 돌풍이 아닌, 진정한 자격을 갖춘 최강임을 증명했어요.”
이제는 벨기에를 넘어 전 유럽의 축구팬들이 벨기에의 강력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까지 깔끔한 경기 끝에 꺾어냈고, 결승전에서는 조별리그에서 스페인과 최고의 명경기를 만들어낸 이탈리아를 4-1로 꺾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자존심을 내세워 벨기에를 깎아내릴 수 없었다.
“비록 오늘 결승전의 대승에는 이탈리아의 불운도 한몫했지만, 그래도 벨기에는 유럽 최강의 자격을 충분히 갖췄음을 증명했어요. 이제부터는 벨기에의, 우리의 시대입니다.”
벨기에의 약진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2006년 말부터 2007년 초를 기점으로 어린 유망주들을 전면에 기용하기 시작한 벨기에 대표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은메달을 계기로 급성장했다.
끝을 모를 암흑기에 접어들었던 벨기에 대표팀은 그렇게 유럽 내 다크호스로 돌아왔고, 조금씩 강해지기는 했지만, 유로 2012 예선까지는 그 정도 위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열린 유로 2012 예선, 벨기에는 숨은 강호 러시아와 명장 트라파토니 감독이 이끄는 아일랜드를 따돌리고 본선 출전권을 획득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8강 정도를 노려볼 수 있는 숨은 강호 정도의 평가였다.
하지만 본 게임인 유로 2012가 개막한 이후, 벨기에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마지막 경기인 결승전이 끝나기 직전인 지금 시점에서 벨기에는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잉글랜드, 네덜란드 등 전통의 강호들과 대등한 위치까지 올라와 있었다.
“항상 객관적이어야 하는 해설자로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주가 우리 벨기에 대표팀에 합류한 게 정말 행운이었어요. 주가 벨기에로 귀화해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뒤부터 여기까지 엄청난 속도로 달리지 않았나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신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준하는 대단한 선수임은 분명한 것 같네요.”
전에도 이야기했듯, 지금의 벨기에 국가대표팀은 ‘감독 마크 빌모츠의 팀’이 아닌 ‘주장 주성배의 팀’이었다.
벨기에가 세운 업적들은 곧 성배의 업적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4강 신화를 이룩해 불었던 ‘히딩크 열풍’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주성배 열풍’이 벨기에에 불고 있었다.
“바로 그 선수가 해트트릭을 기록한 경기가 드디어 끝을 고합니다! 벨기에, 바로 그 선수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4-1로 이탈리아를 꺾어내며 유럽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앙리 들로네컵은 2016년까지 우리 벨기에의 것입니다!”
주심은 길게 휘슬을 불어 경기의 끝을 알렸다.
앞선 85분보다 마지막 5분이 더 길게 느껴졌던 중계진은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동안 참아왔던 열기를 바깥으로 발산했다.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발음까지 뭉개지는, 최악의 중계였지만, 중계를 시청하는 팬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의 울분을 털어내는 듯한 중계진의 울부짖음이 팬들의 마음을 건드려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갔다.
경기장에서 우승 장면을 직접 지켜본 팬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중계진 덕분에 집에서 TV로 시청하던 팬들도 이 자리의 열기를 어느 정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오오, 오오오!! 오오!! 오오오!!””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벤치에서 뛰쳐나온 선수들은 그라운드 위의 동료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서로 어깨동무한 채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응원가를 열창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노래하는 이들은 결코 추해보이지 않았다.
“수고했어요, 부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승 축하한다. 아쉽지만, 너희가 더 강했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 비슷한 뜻일 것이었다.
동료들은 신나게 우승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지만, 성배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쁨의 표출을 잠시 누르고 이탈리아 선수들을 찾아다니며 위로와 격려, 좋은 경기에 대한 감사를 표할 시간이었다.
“주! 뭐해, 지금! 빨리 와!”
눈물로 얼굴 전체를 적신 주제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콤파니가 성배를 급히 찾았다.
다른 벨기에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젊은 선수들은 젊은 선수들대로, 베테랑들은 베테랑대로 우승의 감동과 기쁨으로 감동의 눈물과 기쁨의 웃음, 두 가지 상반된 표정을 함께 지었다.
한창 우승의 기쁨에 취해있다가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성배를 찾은 것이었다.
“간다, 가.”
성배가 이탈리아 선수들, 심판진과의 대화를 마치고 벨기에 선수단 사이로 합류하는 순간, 관중석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몇 명이 일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성배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던 모든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와 함성을 보내주었다.
[THE Prophet]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봐.]
[분명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이루어질 테니까.]
[하늘색 하늘 아래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그는 특별해.]
[목표한 모든 걸 이뤄내는 힘을 가지고 있지.]
[그와 함께라면 우린 크나큰 성공을 이루게 되겠지.]
[부러워도 어쩔 수 없어. 그는 우리의 캡틴이니까.]
성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것은 물론이고,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작곡했다는 것까지 더해져 성배의 응원가 ‘THE Prophet’은 유럽 전역의 축구팬에게 퍼져나갔다.
거대한 성공을 거둔 맨체스터 시티는 전 유럽으로 팬을 퍼뜨렸고, 그들 중 일부가 성배의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명한 곡이었고, 지금 분위기에 적합했기에 곧 경기장 전체에 ‘THE Prophet’이 울려 퍼졌다.
< 낭만필드 - 352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