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29 >
“첼시도 정말 잘 싸워주었거든요? 몸을 날려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을 막아내는 첼시 선수들의 투지는 감동적이었고, 존경스러웠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맨체스터 시티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네요.”
첼시도 분명 암울한 상황에서 최선의 전술을 선택,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전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고, 그 차이는 너무나도 컸다.
아시아의 몇몇 국가에서 강조하는 근성론의 한계였다.
“아, 램파드... 드록바... 첼시의 전성기를 이끈 두 선수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애써 팀원들을 독려하고는 있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애처롭습니다.”
분명 전반전까지는 첼시도 나쁘지 않았는데, 맨체스터 시티가 같이 뛰어주기 시작하면서 경기 분위기까지 확 기울어버리고 말았다.
빅 이어를 제외한 모든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첼시의 베테랑 선수들은 마지막으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렸지만,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분위기였다.
“아, 존 테리. 머리를 감싸쥐는 존 테리의 모습이 잡히네요. 첼시를 이 위치까지 끌어 올린 베테랑 선수들, 두 번째 결승전 기회마저도 놓치는 분위기가 되었어요.”
지난 2007/08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자신의 승부차기 실축 때문에 클럽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놓친 존 테리의 아쉬움이 가장 컸다.
문제가 많은 선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첼시의 상징인 것은 사실이었고, 첼시의 좌절을 가장 아쉬워할 선수인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맨체스터 시티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사실상 확정적입니다. 무패 트레블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이 세워지는 분위기입니다.”
두 팀이 경기해서 눈물을 흘리는 팀이 있으면 웃는 팀도 있는 것이 당연했다.
오늘 경기에서 웃는 클럽은 맨체스터 시티였다.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해 첼시와 마찬가지로 클럽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렸던 맨체스터 시티는 첫 도전에서 실패한 첼시와는 달리 빅 이어 획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IN - 9. 로멜루 루카쿠 / OUT - 10. 에딘 제코]
“맨체스터 시티, 선수 교체를 단행합니다.”
시간을 끌기 위한 교체였다.
제코는 뛰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그라운드를 벗어났다.
남은 시간은 추가 시간을 더해봐야 3, 4분밖에 되지 않았고, 경기는 2-0으로 앞서 있었다.
크게 실수하지 않는 한 맨체스터 시티의 우승이 유력했다.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는 제코, 이미 웃고 있네요. 우승을 확신하는 모습이죠?”
맨체스터 시티 선수단의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무대, 그리고 우승컵 빅 이어는 모든 선수가 선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꿈꾸는 목표였다.
그 꿈이 이뤄지기 직전이었으니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냥 둘까.’
평소였으면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승리를 확신하며 마음을 놓아버리는 행동을 제재했겠지만, 성배는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경기가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였고, 자신이 생각해도 남은 시간 안에 경기가 뒤집어질 리는 없었다.
세상에 만약은 없다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은 현실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았다.
“제코와 루카쿠, 서로 미소를 주고받으며 손을 마주칩니다.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주심도 이미 경기가 기울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적잖이 시간을 끄는 제코에게 옐로우 카드를 꺼내 들지 않았다.
승부에 영향이 없을 거라 판단, 관대하게 넘어가 준 것이었다.
“첼시, 어쨌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경기가 재개되자마자 다시 한 번 거칠게 달려듭니다.”
“비록 상황은 많이 어렵지만, 잉글랜드에서 독일까지 날아온 팬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네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왔는데, 팬들에게 한 골 정도는 선물해야죠.”
첼시도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마지막까지 달려들었다.
승리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한 골이라도 넣을 생각이었다.
“루이즈, 적극적으로 오버래핑합니다. 램파드를 보고 패스, 한 것이 실바에게 끊깁니다! 미켈의 태클을 피하면서 전진!”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그런 첼시의 마지막 소망마저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부담 없이 남은 시간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여유로운 경기 운영을 보여주고 있었다.
“실바, 오른쪽으로! 산체스, 빠릅니다!”
루이즈는 원래 공격력이 장점인 수비수였다.
그래서 공격 본능을 조절해줄 수 있는 테리와 함께하면 공수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지나치게 많이 올라갔다가 위기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라인을 뒤로 물리고 있었기에 큰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결국 마지막에 큰 실책을 범하며 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오른쪽에서 산체스! 산체스! 반대편에서 루카쿠!! 골! 들어갔습니다! 맨체스터 시티, 세 번째 골! 산체스의 어시스트에 이은 루카쿠의 슈팅이 첼시의 골망을 흔들며 쐐기 골을 기록합니다!”
결국, 마지막 골도 첼시가 아닌 맨체스터 시티의 몫이었다.
마음만 급했던 루이즈의 패스가 실바에게 끊긴 순간 이미 결정이 되어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맨체스터 시티의 역습은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기에 유럽 최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맨체스터 시티, 정말 대단하네요! 충분히 말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꿋꿋이 버텨내더니 결국 두 번의 역습으로 경기를 가져갔어요. 두 번째 골과 세 번째 골 모두 역습으로 만들어냈죠?”
더블과 연속 무패 신기록을 작성하는 동안 쌓인 자신에 대한 신뢰와 팀에 대한 신뢰는 이상하게 경기가 말리던 전반전에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그 신뢰대로 감독인 만치니와 주장인 성배는 해결책을 찾아주었고, 선수들은 또 그 신뢰를 받아 요구를 백퍼센트 수행해주며 경기를 가져왔다.
“맨체스터 시티는 정말 강력합니다. 이제 2분만 더 지나면 유럽 역사에 길이 남을 시즌 무패 트레블 기록이 세워집니다!”
이번 시즌 62경기, 지난 시즌까지 더해 66경기 연속 무패를 달리던 맨체스터 시티의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이대로 승리한다면 67경기로 신기록을 늘리며 2011/12시즌 전체 무패, 그리고 트레블까지도 기록할 수 있었다.
“멀리까지 원정 응원에 나선 시티즌들은 거의 정신줄을 놓아버렸네요. 몇 명 쓰러질 수도 있겠는데요?”
이젠 산술적으로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흘러왔다.
트레블을 확신한 맨체스터 시티의 팬들, ‘더 시티즌’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울부짖으며 경기 종료 휘슬을 기다렸다.
130여 년의 설움을 단 한 시즌 만에 모두 날려준 선수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 거의 쓰러지기 직전인데도 여전히 광기어린 응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삑! 삐-이익!!
“경기 끝났습니다! 10개월에 걸친 2011/12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의 대장정!! 치열한 경쟁 끝에 꼭대기에 오른 클럽은 맨체스터 시티입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맨체스터 시티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이번 시즌은 정말 말도 안 돼요! 어떻게 한 클럽이 한 시즌 63경기를 치르면서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마무리할 수 있나요! 거기다 트레블이죠, 트레블! 역대 일곱 번째 트레블의 주인공, 맨체스터 시티!”
셀틱과 아약스, 아인트호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르셀로나, 인테르에 이은 역사상 일곱 번째 트레블의 주인공.
그리고 역대 최초의 시즌 무패 트레블 기록 또한 맨체스터 시티를 따라왔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시즌이었다.
“수고했어. 드디어 끝났네.”
성배는 다른 동료들이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콤파니와 포옹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부터 이미 우승을 자축하던 맨시티 선수단은 종료 휘슬과 동시에 그라운드로 뛰쳐나왔다.
벌써 이번 시즌 세 번째 난입이었다.
“축하한다. 나도 축하하고. 와, 이런 날이 오네.”
이걸로 이번 시즌은 끝이었다.
다음을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이뤄낸 성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2개월 뒤에도 같은 기분을 느껴보자고.”
이제 2개월 뒤에는 유로 2012가 예정되어 있었다.
10년 만의 메이저 대회 복귀에 벨기에 팬들도, 선수들도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빨리 와, 이 녀석들아! 벤치가 무슨 맨체스터에 있냐!”
그래도 지금만큼은 성배 역시 모든 부담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기뻐했다.
평소와 다른 해맑은 미소로 벤치에서부터 달려온 동료들을 맞이했다.
“주장! 우리가 이겼어! 빅 이어라고, 빅 이어!!”
“아, 내 인생에 빅 이어가 있을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빨리! 다 주장 덕분이라고! 하하하!”
마이카 리차즈와 콜로 투레도 성배를 향해 달려왔다.
리차즈는 몰라도 투레는 이제 서른한 살로 베테랑 축에 들어가는 선수였다.
약물 검사에서 적발되었을 때 심하게 마음고생 했던 투레는 성배의 꾸준한 케어 덕분에 힘을 내 돌아올 수 있었고, 주전은 아니지만, 만능 백업으로서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주전에서 물러난 첫 시즌, 투레는 8년 만의 리그 우승컵과 커리어 첫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내가 뭐라고 했어. 맨체스터 시티는 분명 클 거라고, 세계 최고의 자리로 올라갈 거라고 말했지? 물론, 나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인 성배는 선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함께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이적을 설득한 산체스와 마주했을 때, 산뜻한 미소와 함께 오늘의 이 성공을 함께 누리는 것은 다 자기 덕이라며 장난스레 거들먹거렸다.
“그래, 그래. 다 주의 덕이지. 하하, 나도 네 말에 설득당해서 오긴 했지만, 바로 이 시즌에 이렇게까지 대박이 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범접할 수 없는 최강의 클럽이자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불렸던 전성기의 바르셀로나도 해내지 못한 시즌 무패 기록을 달성한 맨체스터 시티였다.
아무리 일생의 꿈이자 아버지와 같았던 삼촌의 유언이었다고는 해도 프로 선수로서 맨체스터 시티를 떠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맨체스터 시티에 뼈를 묻으라고. 내가 은퇴할 때까지는 이 정도 전력을 유지할 테니까. 뭐, 내가 하는 건 아니지만.”
설득할 때는 분명 언제든 원할 때는 바르셀로나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이미 계약서에는 싸인이 되어있고, 잉크도 말랐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었다.
우승을 차지한 맨체스터 시티는 관중석 2층 한쪽에 마련된 시상대에서 플라티니 UEFA 회장에게 챔피언스리그 우승 메달을 수여 받았다.
‘와.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벌써 몇 번은 죽었겠네.’
그리고 알리안츠 아레나를 찾아온 적지 않은 숫자의 바이에른 뮌헨 서포터들은 그런 맨체스터 시티 선수단을 강렬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주! 빨리 와! 뭐해!”
“아아, 알았어, 알았어. 간다고.”
이미 우승 메달을 목에 건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가운데 자리를 비운 채 성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빅 이어를 받아들고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역할은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인 성배의 몫이었고,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 역시 팀의 중심이 성배임을 인정하고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후우, 이게 빅 이어인가.’
플라티니 회장에게 빅 이어를 받아든 성배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빅 이어였다.
양심상 우승컵은 차마 바라지도 못하고 그저 주필러 리그 무대만을 갈망하던 성배에게 유럽 축구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는 빅 이어가 주어진 것이었다.
“주? 뭐해?”
“아, 아아. 알았어. 보채지 않아도 한다고.”
그라운드를 바라보면서 빅 이어를 들어 올리는 과정이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였다.
성배가 돌아서기만을 기다리던 동료 선수들은 기다리다 지쳐 성배를 재촉했다.
“자, 그럼 간다. 하나, 둘, 셋!!”
“우와아아아아!!!!!”
“으랏차차차차!!!!!”
셋을 센 성배는 하늘 높이 빅 이어를 번쩍 들어 올렸고, 동료 선수들 역시 성배의 움직임에 맞춰 함성과 함께 두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2011/12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챔피언, 유럽 축구에서 가장 밝게 빛난 별은 맨체스터 시티였다.
< 낭만필드 - 329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