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84 >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이번에는 벨기에 축구의 자존심, 벨기에를 넘어 세계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주성배 선수입니다.”
성배는 아일랜드와의 유로 2012 예선을 위해 벨기에 대표팀에 합류해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벨기에로 돌아와 벨기에 스케줄을 소화했다.
“안녕하세요. 벨기에 국가대표팀과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 주성배입니다.”
광고 촬영이나 축구 관련 스케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성배의 가치를 알아본 스폰서들은 거액의 장기계약 혹은 매년 갱신이 가능한 계약으로 묶어놓았고, 이미 지난 2년 동안 촬영을 마친 상황이었다.
이번 일정은 토크쇼였다.
사실, 이미 성배는 이런 토크쇼에 나와 인지도의 업그레이드를 노릴 수준은 넘어섰다.
이번 출연은 방송국과 축구협회의 삼고초려로 성사되었다.
“이야, 정말 반갑습니다. 그렇게 섭외를 해도 나오시지 않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나오셨나요? 하하.”
지금 벨기에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의회만 7개에 각 지방의 갈등이 극에 달한 결과, 일이 터진 것이었다.
2년 전에는 총리가 최후 수단인 의회 해산권을 발동하였음에도 모든 의회에서 승인받지 못해 무산되었고, 반년 동안 말 그대로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겨우 정부를 새로 만들었는데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한 개의 정당이 탈퇴해버렸다.
이후 의회와 내각이 모두 해산, 다시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고, 석 달 전에 드디어 무정부 상태 290일에 돌입, 종전 최장 기간 무정부 상태 기록이었던 이라크의 289일을 경신했다.
지금은 1년을 훌쩍 넘어 400일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와, 모르는 척 하깁니까? 그렇게 귀찮을 정도로 연락하셨으면서? 하하, 여기서 휴대폰 통화내역 공개해도 됩니까?”
지방별로 색깔이 뚜렷한 만큼, 지방의회의 힘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해 다행히 나라는 생각보다 잘 돌아갔지만,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눈을 돌릴 곳은 문화 쪽이었다.
유럽 만화계의 중심을 담당하는 벨기에 만화가 성장세를 보였고, 당연히 스포츠 쪽도 평소 이상의 관심을 받았다.
벨기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는 로드 레이스와 축구.
당연히 벨기에 축구의 최고 스타인 성배를 향한 관심도 하늘을 찔렀다.
“이런, 차라리 자진 납세하는 게 현명하겠군요. 이번 시즌 주의 활약이 워낙 뛰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랬어요. 봐주세요. 분명 시청률도 잘 나오고 핫이슈가 되실 겁니다. 잘 해 드릴게요. 봐주세요.”
축구협회 역시 이 타이밍을 놓칠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성적이 나오고 있는 시점이었다.
성적이 나오는 시점에서 벨기에 국가대표팀을 향해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1, 2년 전부터 오랜 부진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가 점점 나타나는 중이었기에 인기를 꽤나 회복하긴 했지만, 아직은 조금 아쉬웠다.
“그나저나, PFA 올해의 선수 선정 축하합니다. 발표되고 난 다음에 벨기에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완전 난리가 났었는데, 아셨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 성배의 성적은 큰 의미가 있었다.
벨기에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리그인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선수로 꼽힌 데다가 리그와 FA컵 우승, 챔피언스리그도 팀을 4강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성배와 콤파니 개인의 성과였지만, 벨기에 팬들은 이들의 성과를 자랑스러워했다.
“네. 주변 분들한테 들었습니다. 기분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제 활약을 인정받은 데다가 팬분들까지 그렇게 높게 평가해주셨으니 정말 잊을 수 없는 시즌이 될 것 같습니다.”
성배는 이미 폴 반 힘스트, 얀 쾰레만스, 엔조 시포, 레이몽 브라인, 미셸 프뢰돔 등 벨기에의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거론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월드클래스로 평가되었던 벨기에 선수가 그리 많지 않기도 했지만, 그만큼 성배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기도 했다.
“이번 시즌 이야기를 하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정말 굉장한 성공을 거두지 않으셨습니까?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FA컵 우승, 챔피언스리그 4강에 PFA 베스트 일레븐에 최우수 선수까지. 더 이상 좋은 결과를 내기 힘들 정도입니다.”
성배가 아무리 높은 평가를 받아도 레전드들과 비교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들과 비교될 수 있는 이유는 커리어 수상내역에 있었다.
리그 베스트 일레븐 4회, 리그 MVP 1회, 리그 우승 2회, 컵대회 우승 4회.
그리고 스물네 살의 나이에 국가대표팀과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완장을 차고 있는 리더십까지.
나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았다.
“물론, 훌륭한 성적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겁니다. 아직 챔피언스리그 우승컵, 빅 이어도 남아있고, 앙리 들로네 트로피와 월드컵 트로피도 남아있죠. 언젠가는 꼭 따낼 겁니다.”
클럽 최고의 영예인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인 빅 이어.
유럽 최고의 영예인 유로컵 우승 트로피 앙리 들로네.
세계 최고의 영예인 월드컵 우승 트로피 FIFA 월드컵 트로피.
성배의 커리어가 끝나기 전에 이 중 한 개만 따낼 수 있다면, 특히 국가대항전 트로피만 따낼 수 있다면 벨기에 역대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와... 말만 들어도 설레는 이야기입니다. 꼭 그 트로피들을 벨기에로 가져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성배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미 유명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 벨기에로 어떻게 건너오게 된 것인지, 그리고 귀화에서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벨기에 축구팬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배를 불러놓고 그 극적인 이야기들을 빼놓을 순 없었다.
자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대충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유로대회 예선 이야기 좀 해보죠. 아일랜드와의 경기는 정말 아쉬웠습니다. 1-2 패배라니. 유로 예선 첫 번째 패배였습니다.”
벨기에는 아쉽게도 며칠 전 있었던 아일랜드와의 예선 6차전에서 패배했다.
5차전까지 4승 1무로 무패 행진을 달리던 벨기에의 유로 예선 첫 번째 패배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반니 트로파토니 감독님의 전술에 완벽히 말린 경기였습니다. 확실히 왜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고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참, 그렇게 답이 안 보였던 경기는 오랜만이었어요. 나름 전술적인 재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답이 안 보였습니다.”
트라파토니 감독은 성배와 데푸르, 게임을 만들어주는 두 명에게 강력한 대인마크를 걸었다.
아자르가 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플레이 메이커를 잃은 벨기에는 생각보다 너무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수비의 단단함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운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두 골을 실점하면서 패배, 예선 첫 번째 패배를 기록했다.
“팬들도 이번에는 유로컵 출전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기대해봐도 되겠습니까?”
이번에야말로.
벨기에 축구팬들의 생각이었다.
지난 월드컵 예선에서 플레이오프 끝에 아쉽게 떨어졌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점점 전력을 끌어올렸고, 성적을 내기 시작하면서 팬들에게도 기대감을 심어주었고, 관심을 끌어올 수 있었다.
“당연합니다. 비록 한 경기 패배하긴 했지만, 충분히 자신 있습니다. 이번에는 기대해주셔도 좋습니다.”
관심을 한껏 끌어올린 만큼, 이번에 유로컵 출전에 실패하면 애써 끌어온 관심이 확 사라질 위험도 있었다.
벨기에 입장에서 이번 유로컵은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면서 위기이기도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로컵 출전 티켓을 따내야 했다.
“모두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꼭 메이저 대회에서 벨기에 국가대표팀, 붉은 악마의 모습을 보고 싶네요.”
성배 역시 유로컵과 월드컵에는 한번 나가고 싶었다.
거기에 꿈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우승 트로피를 얻지 못하면 절대 은퇴할 수 없어!,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프로 선수로서, 국가대표 선수로서 그런 메이저 대회에서 한 번 활약해보고 싶었다.
은퇴 이후에 축구팬들로부터 받을 평가를 생각해도 메이저 대회 실적이 꼭 필요하긴 했다.
“마지막이니까 팬분들에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메이저 대회에서 붉은 악마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세요. 꿈을 좀 크게 가지세요. 우승 트로피, 최소한 한 개는 벨기에의 품에 안겨드리겠습니다.”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일단 말만 던져보는 것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트로피를 노린다고 했을 때, 비웃음을 사지 않을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성배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 팬들의 지지를 받을 것 역시 확실했다.
지금껏 성배가 입에 담았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현실이 되었으니까.
성배는 커리어 내내 실패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성공의 아이콘이었으니까.
***
“수고했습니다. 역시 말도 참 잘하십니다. 토크쇼나 인터뷰 같은 것 힘들어하는 선수도 많은데.”
이번 토크쇼도 성공이었다.
성배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모두 전했고, 축구협회와 방송사의 목적도 달성되었다.
방송사가 준비한 대본도, 함께 준비해준 에이전시의 직원들도 고생했지만, 대본대로 방송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준비한 것을 때와 상황에 맞춰 잘 풀어놓은 성배의 역량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것도 제 무기 아니겠습니까? 하하. 이런 능력이라도 없었으면 수비수의 몸으로 여기까지 못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배의 가장 큰 장점을 축구 지능과 영리한 플레이, 뛰어난 공수 밸런스로 꼽았다.
하지만 성배가 생각하는 본인의 가장 큰 장점은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본인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것이 그라운드 위에서의 일이든, 바깥에서의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아, 그것보다 만치니 감독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통화가 가능할 때 전화해달라고 하더군요.”
공식적으로 시즌 종료 휴가는 7월 첫째 주까지였고, 성배는 6월 중순 즈음에 잉글랜드로 돌아가 다음 시즌에 대비할 생각이었다.
열흘 정도 뒤면 맨체스터로 돌아감에도, 성배는 물론이고 만치니 본인도 휴가를 즐기고 있는 상황에서 연락을 했다는 건 꽤 급한 일일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통화 좀 하겠습니다.”
급한 일인 것 같아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거라면 돌아간 뒤에 해도 될 텐데, 굳이 지금 연락한 것을 보면 그런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예, 만치니입니다.]
“감독님. 주입니다. 연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만치니 감독의 목소리만으로도 뭔가 급한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웅성대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같았고, 성배 외에도 전화하고 있는 상대방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 그래. 연락했었어. 네가 좀 해줘야 하는 일이 있는데, 지금 설명하기는 좀 길고, 에이전시 메일로 메일 보냈거든? 그거 읽어보고 궁금한 거 있으면 다시 연락해.]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는지 메일로 미리 보낸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일단 전화를 끊고 버크만을 바라보았다.
에이전시 메일은 버크만이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랭, 메일 온 것 있습니까?”
“예. 30분 전쯤에 하나 왔습니다. 여기서 확인하긴 그러니까 숙소로 가서 확인하시죠.”
직원에게 온 문자를 확인한 버크만은 스마트폰을 꺼내 기사를 띄워주었다.
“일단 이 기사들을 좀 읽어보시죠. 대충 직원이 알려준 정보를 보니 그걸 알고 메일을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성배는 버크만에게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액정에 뜬 기사의 제목은 성배가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맨체스터 시티, 우디네세의 알렉시스 산체스 노려.]
< 낭만필드 - 28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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