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11 >
“우리 이번 시즌 맨체스터 더비 무패인 거 알지? 오늘도 절대 지면 안 돼. 내가 다른 팀한테 두 번 지는 건 봐줘도, 맨유한테 한 번 지는 건 용납할 수 없지.”
맨유와의 칼링컵 4강전 1차전 이후 FA컵 4라운드 경기를 치르게 된 맨시티는 운이 좋게도 하부 리그의 스컨도프를 만났다.
스컨도프를 만난 덕분에 백업 선수들을 활용해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비축한 맨시티는 최고의 전력으로 맨유와의 올드 트래포드 원정을 맞이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첫 경기는 비록 패배하진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나빴던 경기였지. 오늘은 깔끔하게 이기고 돌아가자.”
끝나지 않는 추가시간 때문에 억울하게 승점 1점으로 만족해야 했던 맨시티였다.
다시 돌아온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깔끔하게 승리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 분위기가 괜찮으니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이번 시즌에도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자랑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그것도 올드 트래포드에서 승리를 거둘 기회가 그리 자주 올 리 없었다.
그래도 맨체스터 시티의 최근 경기력이라면 기대는 해볼 수 있었다.
* * *
[클래스를 돈으로 살 수 있다 생각하나? 어림없지!]
[전통을 그깟 더러운 돈으로 메우려 하지 마라!]
[WELCOME TO MANCHESTER!]
올드 트래포드의 분위기는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맨체스터 더비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듯한 WELCOME TO MANCHESTER 플래카드는 오늘도 존재했다.
“맨유가 4-4-2를 버리다니. 너무 겁내는 것 같지 않아?”
성배는 자신과 같이 맞붙게 된 맨유의 오른쪽 윙어, 박인진에게 말했다.
오늘 맨유는 퍼거슨 감독의 대표 전술인 4-4-2를 버리고 4-5-1로 경기에 나섰다.
지난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 경기에서 맨시티가 내보낸 세 명의 미드필더에게 중원을 장악당해 경기를 내준 것을 고려한 전술 변경이었다.
“글쎄. 퍼거슨 감독님은 워낙에 전술이 유연하신 분이라.”
박인진의 말처럼 퍼거슨은 전술을 유연하게 바꾸기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트렌드를 만들고 유럽 축구계 전체에 전술적 영향을 준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 요한 크루이프, 펩 과르디올라 등과는 다른 성격이었다.
그들처럼 자신만의 전술 철학을 가지고 세세하게 전술을 짜는 스타일이 아니라 시대의 주류 전술을 읽고 분석해 자신에게 맞춰 활용하거나 대응법을 고안해 큰 틀을 잡고 나머지를 수석 코치에게 맡기는 형태의 전술을 사용했다.
“그렇게 나오면 할 말 없지만서도.”
성배 역시 그냥 던져본 말일 뿐이었다.
90년대에는 롱 패스 중심의 역습 스타일을 보였고,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빠른 스위칭과 짧은 패스를 통한 기동전을 보여준 퍼거슨이었다.
4-4-2가 대표 포메이션이긴 하지만, 4-5-1 등 다른 포메이션도 곧잘 사용해왔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아. 맨시티가 1년 만에 지금 이 위치까지 올라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박인진의 프리미어리그 경력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2005/06시즌부터 뛰었으니 이제 다섯 번째 시즌.
그래도 맨체스터 시티의 별 볼 일 없던 모습을 모두 지켜본 그였다.
“스포츠에 프로라는 글자가 붙게 되는 순간, 절대로 돈을 빼놓을 수 없지. 돈이 많은 팀은 무조건 잘될 수밖에 없어.”
만약 성배가 미래의 성적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상황이 같았다면 무조건 맨체스터 시티를 선택했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프로 스포츠에서 돈이 갖는 힘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지금보다도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그건 인정하지. 그래도... 아직은 좀 일러.”
“글쎄. 과연 그럴까? 올해 맨체스터 더비 전적은 이미 우리가 앞서고 있다고.”
“결과가 중요한 거야, 결과가. 리그 순위도 우리가 높고, 칼링컵 결승도 우리가 가면 되지.”
퍼거슨의 맨유는 이제 슬슬 하락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맨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퍼기의 아이들은 이제 거의 다 은퇴했거나 은퇴 직전에 있었다.
그리고 영입된 선수들은 사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팀의 네임밸류에 어울리지 않는 선수들이 많았다.
베컴-호날두로 이어진 오른쪽 윙어 자리에 발렌시아를 영입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했다.
즉, 지금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선수가 아닌 감독이 멱살을 잡고 억지로 끌고 올라가는 클럽이 된 것이었다.
“글쎄. 아무리 감독의 전술이 좋아도 경기는 선수가 뛰는 거지. 퍼거슨 경은 참 대단한 사람이지만, 클럽에서 지금처럼 월드클래스를 영입해주지 않는다면 곧 한계가 보일 거야.”
물론, 퍼거슨 감독은 그 전에 은퇴하겠지만.
지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단 면면은 호날두가 이탈한 이후 분명 그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선수 한 명 한 명이 모두 상대 선수에게 제압당하면, 퍼거슨 경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
솔직히 말해 성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가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호날두가 있을 땐 그 어떤 클럽과의 경기보다 긴장되는 경기였지만, 호날두 이적 후 그 자리를 대체한 박인진, 발렌시아, 나니, 오베르탕 그 누구도 성배를 부담스럽게 하지 못했다.
팀의 승패는 물론, 당연히 중요하지만, 대부분 감독과 부진했던 선수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기 때문에 성배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 * *
아데바요르의 복귀가 가까워지면서 맨체스터 시티는 호비뉴와 벤자니를 모두 떠나보냈다.
3,000만 유로를 투자해 영입한 호비뉴가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팀을 떠나버린 것은 분명 작지 않은 타격이었지만, 호비뉴의 영입은 맨체스터 시티의 위상을 한 번에 끌어올려 준 ‘사건’이었기 때문에 처참한 실패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맨체스터 시티, 다시 한 번 맨유의 오른쪽 측면을 노립니다! 주, 경기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발렌시아와 브라운, 베르바토프 등 1차전 출전 선수 세 명을 교체한 맨유와는 달리 맨시티는 1차전 선발멤버 그대로 2차전에 나섰다.
‘벌써 진정되었을 리 없지.’
그리고 성배는 1차전과 마찬가지로 벨라미와 힘을 합쳐 하파엘을 노렸다.
경기 전부터 만치니 감독과 동료들에게 모두 허락을 받아놓은 상태로, 오늘 맨체스터 시티의 측면 공격은 왼쪽 측면 위주로 진행될 것이었다.
“주, 중앙으로 패스! 배리가 받아서 전방으로 투입! 퍼디난드가 걷어냅니다!”
물론 성배도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왼쪽 측면 공격을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최근 한참 물이 오른 테베즈를 활용해 에반스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원래 맨체스터 시티와 만치니 감독의 스타일은 세 명의 중앙 미드필더를 앞세운 중앙 공략이었다.
“비에라가 점프하면서 다시 전방으로! 배리가 다시 이어받아서 왼쪽으로 빠지며 주에게!”
맨시티 선수들의 경기 초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패스 템포가 경쾌했고, 몸놀림 역시 가벼웠다.
“주, 벨라미에게! 벨라미, 중앙으로 움직이며 테베즈에게 연결!”
“버텨주지 못했습니다! 플레처!”
하지만 1차전에 결장했던 퍼디난드가 돌아온 맨유의 수비진은 확실히 안정된 모습이었다.
퍼디난드는 자신을 등지고 볼을 받아낸 테베즈를 밀어내며 볼의 소유권을 상쇄시켰고, 그 볼은 플레처에게 흘렀다.
“박인진에게 연결! 전방 압박하는 맨시티!”
플레처가 왼쪽으로 달리면서 박인진에게 패스했다.
그리고 맨시티는 전방에서부터 강력한 압박으로 맨유의 플레이를 방해했다.
“박이 중앙 쪽으로 돌파! 주가 강력하게 견제합니다! 그리고 태클!”
‘좀 짧았다.’
박인진에게 볼이 연결되자, 성배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거칠게 압박해 들어갔다.
박인진의 탈압박 능력은 좀 떨어지는 편이었고, 성배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횡적인 움직임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횡방향으로 조금씩 전진하던 박인진에게 태클을 시도한 성배였지만, 마지막 순간 노련하게 볼을 다룬 박인진의 드리블 때문에 볼을 빼앗지는 못했다.
“박인진, 전방으로! 아! 데 용의 몸에 맞고 굴절! 다시 주에게!”
하지만 성배가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맨체스터 시티의 중앙 미드필더들이 순식간에 박인진을 에워쌌다.
지금까지 쫓아온 성배와 비에라, 데 용까지 세 명이 박인진을 삼면에서 포위했고, 전방으로 내주려던 패스는 이 압박을 뚫지 못하고 데 용의 허벅지에 맞으며 굴절, 성배 쪽으로 향했다.
“플레처가 몸을 날려 걷어내지만, 배리에게!”
몸을 날리면서까지 볼을 걷어낸 플레처였지만, 하필이면 볼은 성배가 박인진을 따라가면서 비어버린 공간을 커버하던 배리에게 이어졌다.
플레처가 몸을 날리면서 성배보다 뒤에 위치하게 되었고, 하파엘은 배리에게 끌려가 있었다.
‘나왔다!’
그리고 성배는 공간을 발견하고 바로 뛰었다.
플레처와 하파엘이 끌려 올라간 상황에서 왼쪽 측면은 완전히 비어버린 상황이었다.
“가레스! 찔러!”
성배의 외침과 배리의 패스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공간을 향해 뛰어들어간 성배는 패스의 궤적을 확인한 뒤, 볼을 무시하고 빈공간으로 계속 달렸다.
“벨라미 원터치 패스!”
배리의 패스를 받은 벨라미는 볼을 끌지 않고 바로 성배에게 내주었다.
‘스피드 경쟁이라면 내가 이기지.’
성배의 앞을 막아선 선수는 리오 퍼디난드.
좋은 선수지만, 지금처럼 스피드 경쟁이 벌어졌을 때는 성배를 이길 수 없었다.
‘어딜!’
볼을 받은 성배는 퍼디난드의 앞을 가로지르도록 퍼스트 터치를 가져갔다.
퍼디난드는 자신의 앞으로 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곧바로 성배의 등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중앙으로 파고드는 주성배!!”
스피드 경쟁에서의 완벽한 승리였다.
순식간에 퍼디난드의 앞을 점유한 성배는 팔을 사용해 어떻게든 막아내려 하는 그의 방해를 뿌리치고 중앙으로 빠르게 침투했다.
‘빠르네.’
중앙까지 파고든 성배는 동료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아쉽게도 벨라미는 플레처가, 테베즈는 에반스가 마크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이어서 패스를 제대로 이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도는 없지만.’
결국, 자유로운 상황에서 마음 놓고 슈팅할 수 있는 선수는 자신이 유일했다.
측면에서 올라와 각도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파고들다가 그대로 슈팅!!!!!”
맞고 뒈져라 슛.
각도가 없었기에 성배는 맞으면 정말 정신을 잠시 가출시킬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슈팅을 시도했다.
반대편으로 흐르지 않게 아웃 프런트로 살짝 스핀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골!! 골!! 골!!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골! 엄청난 골이 터졌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반 데 사르의 반사신경이 아무리 좋아도 도저히 제시간에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를 자랑한 슈팅이었다.
회전 때문에 마지막에 아주 살짝 휘어진 볼은 반대편 옆그물 안쪽에 3초 정도 떨어지지 않고 걸려 있었다.
슈팅에 담긴 파워를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주성배의 선취 골이 올드 트래포드를 침묵에 빠뜨립니다!!”
성배의 시원한 선취 골에 7만5천 관중이 운집한 올드 트래포드가 조용해졌다.
< 낭만필드 - 21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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