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84 >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그리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관객들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점점 촬영 막바지로 흘러가면서 질문들도 무겁고 현실적인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성배가 입을 열 때마다 질문한 당사자는 물론 촬영진과 출연자, 심지어 박인진, 윤기표까지도 긴장하고 있었다.
“스물여섯이라고 하셨죠? 저보다 세 살이 많으시네요. 그런데 아직 2군 소속이고 1군 경험은 한 경기도 없다고 하셨고요.”
이번 주인공은 스물여섯의 2군 선수였다.
대학 졸업 이후 가까스로 프로에 입단하기는 했지만, 3년째 2군에서만 경기를 뛰었고, 2군에서도 주전이 아닌 백업으로 활약하는 중이었다.
1군 무대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의 고민은 미래가 보이지 않아 은퇴를 고민한다는 것이었다.
“희망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실업팀은 모르겠지만, 일단 프로의 유니폼을 입은 이상 실력 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1군에 올라 활약할 수 있다는 뜻이죠.”
실제로 2군 선수와 1군 선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기량의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결과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다들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갖췄기 때문에 기량의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질문자분께서도 아실 겁니다. 작은 차이라고는 말하지만, 그 차이를 따라잡기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프로까지 온 이상 기량의 상승이 쉽게 이뤄지는 수준은 이미 옛날에 지났을 겁니다. 만약 아직 여력이 남아있다면 무조건 은퇴하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로에 왔는데도 여력이 남아있다는 건 축구에 진지하지 않다는 뜻이니까요. 그런 사람은 선수로 뛸 자격이 없습니다.”
성배의 입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올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계속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 앉은 윤기표는 계속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자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모범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만 해줄 거면 애초에 이런 자리가 필요 없어. 비전문가도 해줄 수 있는, 아무런 가치 없는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처럼 냉정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덮어놓고 따뜻한 사람보다는 냉정하고 할 말은 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사람을 더욱 좋아했다.
모범생 타입이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비록 여전히 모범생의 재미없는 타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었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는 법이었다.
“그 약간의 차이만 극복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1군에 합류하고 어쩌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약간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앞으로 십 년을 더 고생하고, 십 년 뒤, 아무런 무기도 없이 세상에 내버려질지도 모릅니다. 확률을 따지자면 솔직히 후자가 훨씬 더 높습니다.”
전생의 자신도 그랬다.
서른여섯까지 최선을 다해 그 약간의 차이를 따라잡아 보려 했지만, 타고난 재능의 차이와 후천적인 부상은 그런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지금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원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제가 답을 내드리지는 않습니다. 머리가 터질 때까지 고민하세요. 결론은 질문자께서 내리는 겁니다. 그 약간의 차이를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셔도 좋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다음 인생의 목표를 수립하는 것도 좋을 겁니다. 후회없는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야, 주성배 선수. 말을 굉장히 잘하시는데요? 조언도 얼핏 들으면 냉정하지만,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건드려 주니까 이해가 팍팍 되네요.”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가는 주인공 자리는 어느새 성배에게 와 있었다.
시작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박인진이 주인공이었고, 애초에 기획 단계부터 그렇게 기획된 프로그램이었지만,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선수들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1부까지만 해도 대놓고 박인진을 밀어주었던 촬영팀은 이제 성배를 밀어주고 있었다.
지나치게 착한 박인진의 화법과 조언은 전혀 화제성이 없었다.
“마지막 질문자, 일어나서 발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정안중학교 2학년, 임주환입니다.”
드디어 마지막 질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열다섯 살, 170cm도 넘을 것 같은 신장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직 소년의 티가 여실히 남아있는 귀여운 학생이었다.
“아! 저 선수 알아요. 얼마 전에 신문 기사에 조그맣게 나기도 했고, 유명한 선수예요.”
“아, 저도 알아요. 열다섯 살, 만으로 열네 살인데 U-17 대표팀에 합류했다던 그 선수 맞죠? 반가워요.”
동년배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이라 평가받는 선수 중 한 명이 스튜디오를 찾았다.
1995년생으로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된 임주환은 만열네 살의 나이로 U-17 대표팀에 속해 있었다.
1년 차이가 어마어마한 한창 자랄 나이에 세 살을 건너뛴 것이었다.
“옆에 계신 분은 부모님이신가요?”
“네. 저희 아버지랑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자리에 참석한 모양이었다.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 두 사람은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것이 쑥스럽기는커녕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자, 그러면 한 번 고민을 들어볼까요?”
진행자의 말에 임주환이 마이크를 들었다.
부모님도 임주환이 발표할 내용에 대해 모르는 듯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이군.’
성배도 임주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심지어 그 부모님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임주환은 과거에서도 꽤 유명했다.
‘아들의 재능에 기대어 먹고 살려던 사람들.’
임주환의 부모는 아들의 재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처음에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조금씩 내 아들은 특별하다는 생각에 잠식 되어갔고, 한국 유소년 시스템을 무시하며 내 아들은 대한민국에서 절대 클 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스포츠계는 물론 청소년 교육에 대한 한국의 시스템에 불신이 큰 대중들도 한국의 유소년 시스템을 무시하며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서 결과는 폭망이었지.’
성배가 벨기에를 선택했던 것처럼, 벨기에 축구 유학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불신에 젖어 있었던 임주환의 부모는 유럽 시민권 획득을 위해 벨기에 유학을 선택했다.
지금 성배의 모습이 임주환의 부모들이 원하던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게 임주환을 망쳤지.’
임주환이 선택한 클럽은 RC 헹크였다.
안더레흐트와 함께 유소년 시스템의 NO.1을 다투던 헹크 입단은 팬들에게 큰 기대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한국 선수가 왔다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갔던 성배는 임주환의 모습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었다.
불세출의 재능까지는 아니었지만, 벨기에 유수의 유망주들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은 재능을 보인 것이었다.
드리스 메르텐스와 비슷한 스타일이었고, 빛을 늦게 본 메르텐스가 같은 나이에 보여준 기량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무리한 욕심과 계속된 채찍질이 그의 성장을 멈추게 했다.
‘쯧쯧. 역시나.’
역시나 임주환의 고민은 부모의 지나친 통제에 있었다.
학교를 믿지 못한 그들은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철저하게 시간을 지켜가며 아들에게 운동을 시켰다.
먹는 것, 쉬는 것, 자는 것 등 모든 생활을 초 단위로 계산해 아들을 닦달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런 일정을 소화했으니 아이가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까 망하지.’
벨기에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임주환은 결국 한국으로 유턴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벨기에 국적은 오히려 독이었다.
한국 국적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귀국했지만, K리그 구단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부모의 계속된 언플로 인해 한국 축구계로부터 속된 말로 찍혔고, 심지어 그것을 만회할 기량의 발전조차 유학과 동시에 멈춰버렸다.
J2 리그, 헝가리 리그, 오스트리아 리그 등을 전전하던 임주환은 20대 중후반, 성배가 있던 벨기에 2부 리그로 이적해왔었다.
‘쯧쯧. 이번에는 내가 뭘 해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임주환을 다시 만났을 때, 성배는 다른 의미로 또 한 번 놀랐다.
10년이 지났는데 10년 전보다 오히려 기량이 퇴보한 것이었다.
그리고 10년 전처럼 축구를 전혀 재미있다고 느끼지 않는 듯했다.
너무 안쓰러워서 친동생처럼 보살펴주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관심을 쏟았었지만, 결국 임주환은 서른이 되기 전에 축구계를 떠났었다.
[... 저는 코치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코치님은 학교에도 계시고, 국가대표팀에도 계세요. 저는 부모님이 필요해요.]
특별히 사전 촬영까지 마쳤던 임주환의 영상이 끝났다.
부모, 정확히는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에 지친 아들의 하소연이었다.
심지어 유소년 대표팀이지만, 국가대표팀의 일원인 아들의 훈련 내용과 방식에까지 간섭하고 있었다.
평범한 주부에 불과한 사람이 국가대표의 훈련에 간섭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서로 언성을 높일 일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임주환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박인진 선수는 이 영상을 보니까 어떠신가요?”
“음... 사실 저도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어요. 서포트도 많이 해주셨고요. 그래서 주환 군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너무 과하신 것 같네요. 물론 마음이야 제가 감히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시겠지만,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주신 다음에 도와주셔도 늦지 않거든요.”
계속 완곡한 어투로 말해왔던 박인진마저도 부정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동영상에 나온 어머니의 극성은 심각했다.
한창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을 아이에게 체력을 키우고 근육을 키워야 한다는 이유로 뱀탕이나 개소주 등 보양식에 단백질이 대부분인 식탁을 차려주는 건 너무 심했다.
심지어 훈련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그 날의 운동을 마치면 TV나 컴퓨터로 해외 축구 영상을 찾아보게 시켰다.
임주환의 일상에 축구를 제외한 다른 것의 자리는 없었다.
“주환이가 굉장히 힘들겠네요. 저렇게 하면 남들보다 빠르게 실력이 늘 수는 있겠지만, 절대 오래 못 가요. 저렇게 고통스럽게 하는데 어떻게 직업으로 하겠어요. 저희 같은 선수들도 사실 시즌을 치르다 보면 지루할 때가 있어요. 경기, 휴식, 훈련, 경기, 휴식, 훈련의 반복이거든요.”
프로 선수가 되고 축구가 직업이 되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될 일상이었다.
그걸 열다섯의 나이에 벌써 겪는 건 좋지 않았다.
윤기표 역시 부정적인 의사를 표시했다.
“음...”
그리고 성배가 마이크를 잡았다.
촬영 내내 두루뭉실하게 넘기지 않고 날카롭고 직설적인 독설을 아끼지 않았던 성배였기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 형, 아직도 포기 안 했네.’
윤기표의 팔꿈치는 여전히 바빴다.
다른 일도 아니고 아이와 부모의 일이었기에, 부모라는 존재에게 약한 한국의 특성상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바로 얻어맞게 될 것이었다.
“제가 볼 때는... 부모님, 특히 어머님이 굉장히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겁낼 성배가 아니었다.
어차피 젊은 층은 설득력이 충분하고 시원한, 전문적인 독설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할 사람들은 그런 젊은 층이었다.
< 낭만필드 - 18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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