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83 >
“그렇게 먹고 싶은 거 참고, 먹기 싫은 거 먹으면서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날들이었고,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결과가 좋아서 보람은 있습니다.”
“이런. 그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지만 지금 주성배 선수가 있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거군요. 정말 대단하네요. 존경스러울 정도예요.”
오늘 프로그램의 목적은 선수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쉽게 섭외하기 힘든 세 선수가 출연한 만큼, 세 선수의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한 게스트들이었기 때문에 2주 편성이 되었고, 1주 차는 선수들 개개인의 이야기 위주, 2주 차는 조언 위주의 방송이 예정되어 있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자리에 참석하신 관객분들의 고민에 대해 세 분께서 조언해주실 차례입니다. 이 시간만을 기다리셨을 거예요. 지금까지 세 분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본인의 상황에 대해 조언을 듣는 것만큼은 못하겠죠.”
세 선수의 살아온 이야기들에 대해 충분한 대화를 나눈 뒤, 드디어 관객들의 고민을 들어줄 시간이 되었다.
촬영 전에 이미 이들의 고민을 미리 받아본 제작진이었다.
그리고 방송에 내보낼 만한 그림이 되는, 즉, 화제성과 자극성이 충분한 사연들로 선정했고, 일부는 따로 촬영까지 따놓은 상태였다.
“그럼 첫 번째 사연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 선수의 사연이네요.”
아무래도 운동선수들의 고민과 사연을 받았기 때문에 어둡고 무거운 내용들이 많았다.
예체능 쪽 직업은 다들 그랬다.
선택된 극소수의 사람들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스타의 삶을 살지만, 그들을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이 젊음을 낭비하고 사라져 갔다.
날아온 사연들의 대부분은 무겁고 안타까웠다.
“열일곱 살, 용원고등학교에서 축구 선수로 뛰고 있는 1학년 김인호입니다. 세 분처럼 뛰어난 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유럽에서 뛰어보고 싶습니다. 자, 이 분 어디 계시죠?”
하지만 아무래도 오락 프로그램이다 보니 무거운 내용들로만 채울 수 없었다.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 감동적인 내용은 뒤의 감동 코드 쪽으로 빼놓고, 일단 가볍고 귀여운 내용의 사연들을 앞에 배치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용원고등학교 1학년, 중앙 공격수로 뛰고 있는 김인호입니다.”
다섯 번째 줄에서 건장한 체격의 소년이 일어났다.
중앙 공격수라더니 확실히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좋아하는 건장한 체격의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보였다.
“이야... 여기 있는 우리 세 명보다 훨씬 더 큰데요?”
윤기표의 말처럼 오늘 출연한 세 선수는 체격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최장신인 성배가 183cm였고, 박인진과 윤기표는 170cm대 중후반에 불과했다.
“키가 몇이에요?”
“헤... 186cm요.”
소년은 박인진의 물음에 수줍게 답했다.
우상이나 다름없는 박인진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은 듯했다.
“자, 그럼 직접 들어볼까요? 물어보고 싶은 게 뭐예요?”
“아, 저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수 있는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은데요, 세 분이 모두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계시잖아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공격수들의 특징이나 장점들을 듣고 싶습니다. 혹시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MC의 물음에 답한 소년은 세 선수에게 프리미어리그의 특징과 공격수들의 장점을 물어왔다.
확실히 유럽 진출을 꿈꾸는 소년에게 유럽 리그 공격수들의 특징을 가르쳐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박인진 선수, 어떻습니까?”
“음... 일단 유럽에서 뛰어보면 선수들의 힘이 굉장히 좋아요. 우리나라 공격수들도 충분한 재능과 기량을 갖추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수비수들과의 경합에서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질문한 선수뿐 아니라 프리미어리그를 꿈꾸는 미래의 꿈나무들을 위해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박인진이었다.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스트라이커인 채범진을 비롯해 하대욱, 신윤기, 성규한, 이영배, 백진영 등의 사례를 예로 들어 성공한 선수들과 실패한 선수들의 차이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성배가 입을 열었다.
“피지컬도 중요하고 테크닉도 중요합니다. 프리미어리그를 보면 정말 그렇게 멋지고 화려할 수 없죠.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화려한 테크닉과 갖은 개인기들을 연습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래서는 절대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할 수 없습니다.”
성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제 한국 선수들도 유럽 선수들과의 피지컬 경쟁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사니까 피지컬은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실제로 아시아권에서 유럽인과 체형이 비슷한 중동 선수들을 빼면 한국 선수들만큼 유럽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고 경쟁할 수 있는 선수들이 없었다.
“유럽 유소년 시스템을 겪어본 건 제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단호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 한국 선수들의 가장 큰 문제는 피지컬이 아닙니다. 유럽 선수들에 비해 한국 선수들이 가장 부족한 건 기본입니다. 기본이 떨어지니까 경쟁력이 떨어지는 거예요.”
한국 대표팀을 보면 유럽 팀과의 경기에서 주도권을 내주고 졸전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가장 큰 건 역시 기본기의 부재였다.
기본기가 딸리니 자신감이 떨어지고, 압박을 받았을 때, 정확한 패스로 전개하기 보다 당장 걷어내기에 급급해 멀리 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경기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유럽에 진출하고 싶다면 기본기 훈련에 매진하세요. 저도 한 2년 정도 미친 듯이 기본기만 갈고 닦았습니다. 훈련 끝나면 기본 두 시간 정도 지루한 기본기 훈련만 했어요. 그러면 재능이 있다고 했을 때, 충분히 유럽에서 버틸 수 있습니다.”
유소년 클럽부터 차근차근 유럽 축구를 경험한 성배의 조언은 다분히 현실적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유럽 축구계에 뛰어든 박인진, 윤기표가 해줄 수 없는 조언이었다.
하다 보니 굉장히 길고 상세해졌기에 상당 부분이 편집되어 나가겠지만, 만약 흘려 듣지 않고 유심히 들었다면, 이 자리에 있는 선수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뭐, 어차피 나온 거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안 나왔다면 모를까, 방송에 나왔다면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 게 좋았다.
일반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아무래도 어린 선수들을 앞에 두고 그들에게 조언해주는 입장이다 보니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가벼운 사연 몇 가지가 이어졌다.
대부분 방송에서는 한 문장 정도로 정리되어 편집될 내용들이었다.
“자, 그러면 다음 고민의 주인공을 만나볼까요?”
“안녕하세요. 장호대학교 4학년 유병진입니다.”
다음 고민의 주인공은 대학생이었다.
오늘 주제에 맞는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의 시작이었다.
“이제 곧 졸업인데, 프로 지명을 못 받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서 조언을 받고 싶어 나왔습니다.”
장호대학교는 그렇게 유명한 학교도 아니었다.
전국 대학 축구계에서 중하위권에 속했고, 하필 경쟁이 치열한 중부 권역에 속해 있어 U리그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는 학교였다.
그런데 유병진은 그런 장호대학교에서도 주전과 백업을 오가는 처지였다.
치열한 프로 입성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정확히 고민이 뭔가요?”
“솔직히 아직 축구에 미련이 남았습니다. 내셔널 리그에서라도 뛰고 싶은데, 그렇게 해서 앞으로 먹고 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조언이 듣고 싶습니다.”
평범함을 벗어나지 못한 운동선수의 미래란 다 거기서 거기였다.
프로가 되지 못하면 끝이었다.
실업팀이라도 입단한다면 당장은 문제가 없었다.
실업팀은 보통 실업팀의 주체, 즉, 시청이나 도청, 각 회사의 직원으로 등록되어 연봉을 받기 때문에 평범한 또래 친구들보다는 조금이나마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 해봐야 30대 중반까지였다.
운동에 매진한 은퇴 선수가 30대 중반에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음, 저도 대학에 갈 때 어디서도 선택받지 못해 억지로 테니스부 TO를 받아 겨우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조금씩 일이 풀려 J리그 하위권 팀으로 갔다가 여기까지 왔죠.”
유병진과 거의 똑같은 길을 걸어온 박인진이 입을 열었다.
실제로 제작진은 박인진의 조언을 끌어내기 위해 이 사연을 채택한 것이기도 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길은 열립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무슨 일이 있어도 축구를 놓지 마세요. 그러면 언젠가 길이 열릴 겁니다.”
박인진의 조언은 유병진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한국 최고의 선수를 넘어 세계 최고의 리그, 최고의 클럽에서 뛰고 있는 박인진도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이었다.
그 때, 성배가 마이크를 들었다.
“글쎄요.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좌절한 선수에게 겨우 희망을 안겨주며 훈훈해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발언이었다.
“인진이 형의 사례가 놀랍고 존경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박인진’하면 인간 승리의 화신, 평발 신화 등등 갖은 수식어를 대며 꾸며주죠. 그 이유가 뭘까요?”
성배의 말에 스튜디오는 정적에 휩싸였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네, 맞습니다. 인진이 형과 같은 상황에서 성공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진이 형은 말 그래도 신화를 쓴 사람이에요. 보통은 저런 상황에서 인진이 형처럼 성공한다는 건 불가능하죠. 실제로 그런 사람도 없고요.”
한 마디 한 마디가 급소를 찔렀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왔던 것을 다이렉트로 찔러 들어오는 성배의 발언이었다.
“프로에 지명받는 선수보다 지명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어디 있을까요? 수도 없이 많았을 그들 중 여기 인진이 형이나 강원의 김윤후, 안승남, 그 외에 몇 명을 제외하면 이름이라도 알린 선수가 있습니까? 그게 현실입니다.”
K리그는 아니지만, 프로 야구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연습생 신화.’
몇몇 선수들이 연습생으로 입단해 1군에서도 최정상급 선수가 된 경우에 붙여주는 말이었다.
아마추어 시장이 축구보다 크고, 선수단의 규모가 더 큰 야구에서는 괜찮은 기량의 선수가 10라운드까지 뽑히지 않는 경우도 꽤 되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자주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수십 명씩 선발되는 연습생 중 1군 무대를 한 번이라도 밟아보는 선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신화’라는 단어가 붙는 이유가 다 있었다.
“제가 굳이 이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졸업반이시면 스물세 살이시겠네요. 저랑 동갑이군요.”
10대의 유소년 선수들이라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동갑이고 이미 20대를 넘어 성인이 된 그들은 지금 하는 선택 하나하나가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었다.
장밋빛 전망만 늘어놓으면서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운이 좋아서 선수생활을 한 12년 더 한다고 칩시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아서 내셔널리그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아 한 5천만 원 받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6억 정도 벌겠네요. 그리고 한 50년 더 살겠죠.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35까지 총연봉 6억.
절대로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명이 짧은 만큼 선수로 뛰는 동안 남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야 할 운동선수에게는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
그리고 매년 프로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실업팀 소속으로 12년을 버틴다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가 어떻게 하라고 결론은 절대 못 내드려요. 결정에 도움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한 번 고민해 보시고, 좋은 방향으로 결론은 내리시길 빕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절대로 후회할 일은 없어야 한다는 거예요.”
성배는 진심을 가득 담아 말을 이어나갔다.
전생의 자신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저런 상황에서 헤르만 덕분에 벨기에 2부 리그로 건너가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 길도 있다고 방송이 끝난 이후 말은 건네 볼 생각이었다.
저 선수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헤르만이나 버크만의 도움을 받으면 유럽의 2부 혹은 3부 리그, 아시아의 중소 리그 정도에는 연결해줄 수 있었다.
‘전생의 내가 해주는 조언이라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지금 이들이 보는 자신은 고생은 했지만, 어쨌든 탄탄대로를 달려온 선수일 것이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한마디를 해도 무게감이 달랐을 텐데, 그건 좀 아쉬웠다.
‘실패한 무명 선수가 얼마나 비참한지, 아직 모르겠지.’
자신이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말해주었지만, 아마 축구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었다.
운동선수란 족속들이 그랬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새겨듣는다고 해도, 스물세 살까지 축구만 해온 사람이 할 만한 일도 거의 없었다.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뭘 해서 먹고 산단 말인가.
남의 돈 받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타깝군. 안타까워.’
돈을 벌면서도 미래에 대비하느라 궁상맞게 살아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벌이가 괜찮았던 자스민과 함께 산 자신도 그랬는데, 이들이 어떻게 살아나갈지는 뻔했다.
< 낭만필드 - 18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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