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58 >
6연승을 이어가던 토트넘의 기세는 리그 13라운드에서 이번 시즌 돌풍의 주인공인 호지슨 감독의 풀럼에게 패배하면서 한풀 꺾였다.
그 이후에도 시즌 초반과는 달리 승패를 반복하며 승점을 쌓아나갔고, 리그 9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칼링컵에서도 지난 시즌에 이어 다시 한 번 우승을 노리며 4강에 안착해 있었다.
시즌 초반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확실히 사라졌고, 패배감 역시 사라졌다.
그 자리를 역시 우리는 강팀이었다는 자신감이 채웠다.
그리고 리그 17라운드.
토트넘은 리그 3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만나게 되었다.
“역시 맨유는 슬로우 스타터다. 초반에는 잠시 애매했었는데, 이제 확실히 경기력이 올라왔다고 봐야 한다.”
경기 전, 레드냅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브리핑을 진행했다.
슬로우 스타터로 유명한 팀이 맨유였고, 이번 시즌 역시 언제나처럼 초반에는 살짝 아쉬운 부분들을 보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맨유 위기설이 언론을 장식했고, 몇 달 뒤인 지금에는 언제나처럼 맨유는 맨유라는 극찬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경기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다. 우리 홈 구장이고 거의 모든 팬들이 우리 스퍼스의 팬이지. 절대로 무기력한 경기를 보여줄 순 없다.”
하지만 최근의 토트넘도 경기력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 시즌의 부진으로 평가가 상당히 깎였지만, 그래도 스쿼드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는 토트넘이었다.
선수단을 거의 뒤집어엎다시피 한 이적시장의 여파가 슬슬 마무리되고, 레드냅 감독이 선수단을 장악하자 드디어 스쿼드에 어울리는 경기력이 나오고 있었다.
“맨유는 분명 강한 팀이지만, 너무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아스날도 잡았고, 리버풀도 잡았다. 맨유라고 뭐가 크게 다르지는 않아.”
전력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빅4에게 약했던 토트넘이지만, 이번 시즌에는 달랐다.
한창 부진에 빠져있었던 시즌 초반의 첼시전에서 1-1 무승부로 선방했고, 1-4로 뒤지다가 5-4로 역전한 아스날전은 역습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리그 1위를 달리던 리버풀까지도 잡아냈다.
맨유라고 해서 크게 겁낼 필요는 없었다.
“주!”
“예. 여기 있습니다.”
“자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맨유의 에이스는 호날두니까.”
호날두는 지난 시즌 중반부터 오른쪽 윙포워드로 고정되어 있었다.
수비를 거의 하지 않고 득점에 집중하는 프리롤 윙어였지만, 어쨌든 마크맨은 레프트백인 성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호날두는 유력한 발롱도르 후보로 꼽히고 있다. 그래도...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믿어도 되겠지?”
“뭐, 완전히 지워버리겠다고는 못하지만... 적어도 평범한 윙어 이상의 활약은 할 수 없게 해주겠습니다.”
2008년 발롱도르.
메날두의 시대를 알린 축포와 같았다.
지난 2007년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호날두, 메시가 처음으로 발롱도르 최종 후보 3인에 함께 이름을 올려 예고편을 상영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는 둘 중 한 명이 수상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조금 더 확률이 높은 선수는 호날두였다.
“그 정도면 충분해. 대책 없이 지워버리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럽군. 그럼 한 번 믿어보겠다.”
이제는 성배도 호날두가 부담스러웠다. 아니, 무서웠다.
그가 이번 시즌에 발롱도르 트로피를 타냈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이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충분히 잡아냈어야 하는데...’
자신이 호날두를 상대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시간은 이미 끝나버렸다.
그 시간에도 굳이 승패를 나누면 스플릿 판정으로 패했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호날두가 전성기에 접어 들어버렸고, 승리는커녕 KO나 당하지 않도록 발버둥 쳐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아직 드리블러 성향이 강하다는 게 다행인가.’
드리블러 스타일은 아무래도 컨디션에 따른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는 스타일이었다.
향후 피니셔 스타일로 플레이 성향을 바꾼 호날두는 골무원이라는 별명이 누구보다 어울릴 정도로 어떤 경기, 어떤 컨디션에서도 골을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런 피니셔 스타일은 한순간의 방심이 바로 실점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수비하기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위기지만 기회야. 막으면 1년 안에 빅클럽도 갈 수 있겠지만, 막지 못하면...’
지금 성배는 충분히 빅클럽 이적을 노려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가받았다.
애매한 빅클럽 말고 4대 빅리그에서 위세를 떨치는 클럽의 숫자는 열 군데 정도였으니 성배도 레프트백 TOP 10을 충분히 노릴 만한 수준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호날두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이 평가가 크게 요동칠 수 있었다.
대충 몇 경기 정도 포기해도 되는 중소클럽과 달리 빅클럽들은 호날두를 막아낼 수 있는 선수를 원했다.
호날두를 막아낼 기량이 되지 않는다면 빅클럽 이적은 몇 시즌 뒤로 미뤄질 것이었다.
‘지금 못 막으면 앞으로도 막기 힘들어.’
하지만 큰 폭의 성장을 노릴 수 없는 성배였다.
성배는 사실 지금도 전성기라고 봐야 했다.
앞으로 신체가 성장함에 따라 어느 정도 기량의 상승이 있겠지만, 그 폭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 막아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막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처절하게 굴러야 하나.’
오늘, 성배는 무슨 수를 다 써서라도, 최후의 바닥까지 모든 역량을 다 긁어내서라도 호날두를 막아볼 생각이었다.
***
“반갑네. 이렇게 다시 보니까.”
경기 시작 직후, 자신의 자리까지 올라온 호날두는 성배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한껏 긴장하고 있는 성배와는 달리 호날두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난 안 반갑다. 징글징글해, 아주.”
성배의 기분은 당연히 별로였다.
자신의 표정과 호날두의 표정이 현재 두 선수의 위싱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반갑긴. 나는 그쪽이랑 붙을 때마다 항상 재미있었는데.”
아약스 시절, 성배에게 제대로 한 번 당한 뒤부터 호날두는 성배에게 흥미를 보였다.
흥미라기보다는 상대할만한 선수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배는 호날두를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재미는 그만 찾고. 좀 살살하지. 이제 너랑 나는 격차가 꽤 생겼는데 말이야.”
“격차는 무슨. 매일 엄살이지. 그렇게 엄살떨어도 안 봐줄 거야. 누가 뭐래도 첼시에 그 흑인 친구 다음으로 날 괴롭히는 사람이 그쪽이니까.”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 여유가 생긴 것인지 성배의 심리전에 전혀 걸려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자신감이 발전해 자만으로 넘어갈 만도 한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치기는 했는데, 딱 실력에 맞는 수준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자신감을 보이면 자만이었겠지만.
“높은 평가는 감사한데... 실망은 하지 마라.”
“실망이라니. 난 단 한 번도 그쪽한테 실망한 적이 없다고.”
“그쪽, 그쪽 하지 마. 너라고 부르던지, 이름으로 부르던지, 이름이 어색하면 성으로 부르던지, 그것도 싫으면 “형”이라고 하던지.”
호날두가 계속 자신을 그쪽이라 지칭하는 것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단어들은 전부 다 격식 없는 단어인데, 지칭 대명사에서만 격식을 갖추는 것이 어색했다.
“그쪽이 왜 “형”이야. 나도 진한테 다 들어서 알고 있다고. 그쪽이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면 나도 이름으로 불러주지.”
“아. 인진이 형이 거기 있었지, 참.”
그라운드 위에서의 복수가 쉽지 않아 보였기에 소심하게 복수하려던 성배의 의도는 호날두와 같은 팀의 박인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
“캐릭, 오른쪽으로! 호날두!”
아직 벌크업보다 스피드를 중시한 호날두였다.
무릎 부상도 없었고, 몸도 키우지 않은 호날두의 스피드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단순 스피드 자체는 라이트-필립스나 월콧, 레넌만 못했지만,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플레이의 효율이 있었다.
‘스피드까지 이 정도면 사기지.’
그들을 문제없이 막아냈던 성배도 호날두에게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트-필립스나 월콧의 돌파는 돌파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그들의 침투를 눈치챌 수 있었다.
성배의 이목을 속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날두, 그리고 캐릭, 플레처의 맨유는 성배의 이목을 쉽게 속여냈다.
“호날두, 그대로 논스톱 크로스! 주! 주가 몸을 날려 걷어냅니다! 멋진 태클!”
그래서 성배도 호날두의 돌파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순수 스피드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자신 있는 스피드 대결이었기에 조금 늦게 출발해도 동선을 줄여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매번 플레이할 때마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대단한데? 엄살에 넘어가지 않길 잘했어.”
플레이가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호날두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언제든 뚫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최근 그의 기량이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벌써 헉헉대는 거 안 보이나 보네. 내 자랑은 아니지만, 체력이 좋은 사람이거든, 내가. 근데 벌써 이래. 좀 봐달라니까.”
안 통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엄살을 떨어보는 성배였다.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주입시키면 아주 조그마한 틈이나마 생길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 걸로 치자.”
‘정말 통하려나...’
그런데 아무리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박인진, 중앙으로! 반대편으로 크게 열어줍니다! 다시 호날두!”
4-4-2 포메이션에서 오른쪽 윙어로 경기에 나서지만, 프리롤을 부여받아 수비 가담을 거의 하지 않는 호날두였다.
이 때문에 수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반대편 윙어를 수비적인 선수로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수비 비중을 높이고 있던 박인진이 제격이었다.
“호날두, 다시 한 번 주와 마주합니다!”
“오늘 이쪽이 치열하거든요? 양 팀 공격과 수비에서 핵심인 두 선수이기 때문에 이 승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오늘 경기 결과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네요.”
맨유 공격의 중심이 호날두이고, 또 다른 중심인 루니가 출전하지 않았기에 볼은 호날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맨유의 공격이 오른쪽에서 주로 이루어지니 성배 역시 호날두와 계속 마주하게 되었다.
“천천히 중앙으로 내려가는 호날두, 빠른 발놀림으로 빠져 나갑니다!”
중앙으로 움직이는 호날두를 따라 내려가던 성배는 오른발을 앞으로 길게 내딛는 움직임에 따라갔다.
하지만 페인트였다.
볼은 오른발을 따라가지 않았고, 호날두는 빠르게 몸을 돌리고 스텝을 정돈해 측면으로 빠져나갔다.
“아! 주, 넘어졌습니다! 호날두, 엄청난 돌파!”
“앞에 아무도 없어요!”
호날두의 페인트에 속아버린 성배는 중심을 잃고 그라운드 위에 넘어졌다.
선수생활에서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굴욕은.
‘빌어먹을!’
잠시 굴욕감과 수치심을 뒤로 밀어두었다.
다행히 쓰러지기 전 왼손을 짚어 완전히 넘어지지 않았고, 왼손으로 땅을 밀면서 일어났다.
‘절대 안 놓친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튀어 나갔다.
어느새 골라인에 다다른 호날두의 모습이 보였다.
< 낭만필드 - 15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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