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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48화 (116/356)

< 낭만필드 - 148 >

“아, 이건 아닙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이게 파울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파울이 선언되자, 잠시 조용해졌던 벨기에 중계진은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만을 표시했다.

전문가가 아닌 캐스터도 파울이 아님을 확신했다.

“음... 사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죠. 그래서 그런 건지 국제대회가 중국에서 열릴 때마다 판정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악명이 높다고 하는데, 오늘도 그런 건가요?”

해설자는 이미 편파 판정을 확신하고 있었다.

벨기에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인 성배 때문에 한국 언론도 찾아서 읽어보았고, 그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선수들,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아무리 편법을 동원해도 기량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벨기에의 중계진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중국에서 편법을 들고나와도 그 정도 기량으로는 지금 벨기에 올림픽 대표팀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성배는 잠시 주심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돈을 받지는 않았겠지.’

흔한 홈 어드밴티지였다.

물론, 중국의 분위기와 성향상 평범한 홈 어드밴티지보다 좀 더 심하기는 했다.

그래도 문제 삼기에는 애매한 수준이었다.

‘다행히 흔들리는 모습은 없어.’

어제 동료들을 모아놓고 미리 이럴 수도 있다고 말해놓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 덕분인지 벨기에의 어린 선수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나와준다면 나도 편하게 날뛰어주지.’

진짜 짜증 나는 건, 심판의 보이지 않는 호의를 받고 있음에도 당하는 것이었다.

성배는 중국 선수들에게 진짜 더티 플레이라는 것이 뭔지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중국의 정즈가 왼쪽의 하오준민에게. 하오준민, 주와 마주합니다.”

홈팬들의 압도적인 성원과 심판들의 보이지 않는 비호를 받는 중국은 기량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으로 나섰다.

분위기가 좋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조금만 삐끗하면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오준민의 과감한 돌파 시도! 주, 따라갑니다!”

하오준민은 괜찮은 선수였다.

나중에 샬케에서 2년 동안 스무 경기 정도 출전할 정도의 기량은 갖추고 있었다.

지금 중국 대표로 그라운드에 나와 있는 선수 중 정즈와 리웨이펑, 가오린, 그리고 하오준민 정도는 벨기에도 긴장하고 상대해야 했다.

‘기량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지.’

애초에 깔끔하게 막아낼 생각은 없었다.

조금만 접촉이 있어도 파울이 불리는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은 파울이 불리더라도 하오준민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잘 가라.’

성배는 하오준민을 향해 거칠게 몸을 들이밀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파울이 선언될 정도의 강한 접촉이었다.

예상대로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아, 주! 흥분한 겁니까? 평소의 깔끔한 수비와 다르게 거친 모습을 보여줍니다!”

“흥분하는 건 좋지 않은데요. 지금 경기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침착해야 해요.”

중계진은 성배의 거친 플레이에 당황했다.

평소 겉으로는 영리하고 깔끔한 수비를 보여주었고, 반칙도 교묘하게 하는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배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컥! 컥!”

하오준민은 두 손을 땅에 짚고 엎드려서 마른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성배가 의도한 그대로였다.

‘조금 아플 거다.’

조금 전의 충돌은 단순한 차징 파울이 아니었다.

평범한 차징 파울처럼 보이도록 밀고 들어갔지만, 부심과 주심의 시야를 교묘하게 가린 뒤, 팔꿈치로 하오준민의 가슴을 가격한 것이었다.

‘웅크리는 게 빠르면 빠를수록 편해질 거다.’

고의적으로 거칠게 플레이해서 상대 공격수에게 겁을 주고, 그로 인해 플레이에 차질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수비수들의 주 무기 중 하나였다.

사실 통증이라는 건 익숙해지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당연히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웅크리는 순간, 너희도 끝이야.’

수비의 리웨이펑, 중원의 정즈, 측면의 하오준민, 최전방의 가오린.

이렇게 네 명의 분투 덕분에 중국은 벨기에와 그나마 팽팽하게 대치할 수 있었다.

한 명이라도 무너진다면 중국도 무너졌다.

***

“여전히 0-0의 균형이 깨지지 않는 가운데, 다시 측면의 하오준민에게 볼이 연결됩니다.”

후반전에 접어들고도 시간이 꽤 지났지만, 여전히 스코어는 0-0이었다.

벨기에가 한 수 앞선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보였으나, 심판의 비호를 받는 중국도 나름 잘 버텨내고 있었다.

“주, 다시 한 번 하오준민의 앞을 막아섭니다.”

“이제는 파울을 좀 조심할 필요가 있어요. 계속 거친 플레이가 이어지면 경고를 받을 수 있거든요?”

계속된 거친 플레이로 주심에게 여러 번 구두경고를 받았지만, 성과는 확실했다.

경기 초반만 하더라도 활발했던 하오준민의 플레이가 위축된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보상받을 차례였다.

‘그렇지!’

다시 한 번 달려들자, 하오준민은 티가 날 정도로 몸을 피했다.

이 정도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성배가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주! 이번에는 깔끔합니다!”

“이거죠! 이게 주의 플레이에요!”

큰 액션은 페인트였다.

그 액션에 속은 하오준민이 몸을 피했고, 볼의 소유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성배는 다리를 뻗어서 깔끔하게 볼을 빼냈다.

전반을 버리다시피 하면서 이걸 준비한 것이었다.

‘서태웅도 아니고.’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리면서도 측면으로 빠르게 질주했다.

하오준민이 워낙 어이없이 당해버렸기 때문에 중국은 아직 진용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성배는 빠르게 필드를 스캔했다.

“주, 길게 뿌려줍니다! 주의 트레이드 마크!”

성배가 볼을 끊어냈다는 것은 곧 역습이 전개된다는 말과 같았다.

그라운드를 빠르게 한 번 스캔한 성배가 전방으로 길게 볼을 넘겨주었다.

“시몬스, 아악!! 뭡니까, 이거!!”

성배의 패스는 시몬스의 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벨기에 중계진은 경악했다.

“이런!! 저딴 건 축구가 아니죠! 중국이 무술로 유명한 건 알고 있지만, 여기는 링이 아니에요! 그라운드입니다!”

시몬스는 그라운드 위에 말 그대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주심 주변에는 벨기에 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 이건 뭡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벨기에 올림픽 대표팀의 주장, 마르텐 마르텐스가 앞장서서 주심에게 항의했다.

그는 완장을 콤파니나 베르마엘렌, 그도 아니면 성배에게 넘기려고 했지만, 이 세 선수는 일찌감치 A대표팀에 합류해 올림픽 대표팀에서 거의 뛰지 않았다.

그래서 세 선수 모두 고사했고, 와일드카드로 합류했지만, 연령대가 비슷한 마르텐스에게 완장이 돌아갔다.

그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펠라이니는 파울을 범한 중국 선수를 향해 다가가 어마어마한 떡대와 인상을 활용해 일당백으로 중국 선수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판정은 여기가 중국이니까 이해했는데... 이건 좀 심하네요.”

성배는 흥분하지 않았다.

주심을 빤히 쳐다보면서 냉정하게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레드 카드! 주심, 드디어 제대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무조건 퇴장이죠! 이번에도 그냥 넘어갔으면 정식으로 항의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대놓고 팔꿈치를 사용한 저우하이빈은 결국 퇴장당했다.

알게 모르게 중국의 손을 들어주었던 주심도 어쩔 수 없었다.

“저, 아저씨. 끝났으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저우하이빈의 퇴장이 선언되면서 이번에는 중국 선수들이 주심을 둘러쌌다.

관중들의 반응도 격렬했다.

그렇게 어수선한 사이, 성배는 시몬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레드 카드 나왔어요. 이제 일어나도 된다고.”

성배는 시몬스가 그렇게까지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시몬스는 성배 못지않게 노련하고 영리한 선수였다.

중국 선수들의 무식한 플레이에 다칠 정도의 선수가 아니었다.

“...진짜 끝났어?”

“그래. 끝났어. 한 명 퇴장이야.”

시몬스는 얼굴을 감싼 손을 치우지 않으면서 주섬주섬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데 나 안 다친 거 그렇게 티나냐?”

“뭐, 이번 건 좀 괜찮았어.”

상황은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시몬스는 잠시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나가 치료를 받았고, 성배는 프리킥을 준비했다.

“지금 위치는 직접 득점을 노리기엔 조금 먼 것 같습니다.”

“대략 35미터 정도 되는데, 가까운 거리는 아니죠. 하지만 주의 킥 능력이라면 박스 안에서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성배의 프리킥은 감겨서 날아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35미터라는 거리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직접 득점보다는 공중볼 경합을 펼쳐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공권에서는 벨기에가 압도하고 있죠? 펠라이니와 콤파니, 베르통헨까지. 강력한 제공권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많아요.”

제공권 하나만큼은 유럽 강호들과의 A매치에서도 밀리지 않는 벨기에였다.

그 선수들이 그대로 이식된 이번 올림픽 대표팀 역시 제공권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아시아팀인 중국은 상대할 수조차 없었다.

‘어차피 한 명 퇴장당했는데, 급할 필요 없지.’

하지만 성배는 이번 플레이로 득점을 욕심내지 않았다.

하오준민은 완벽하게 꺾어냈다.

게다가 한 명이 퇴장당하기까지 하면서 중국의 분위기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 쐐기를 박을 때였다.

‘그냥 겁주는 거니까... 알아서 피하라고.’

주심의 휘슬이 울렸고, 성배는 빠르게 볼을 향해 달려들었다.

벽을 쌓고 있던 중국 선수들 역시 무릎을 굽히며 점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뻐-엉!

성배답지 않은 강력한 슈팅이었다.

겁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득점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없었기에 강하게 때리지 않을 뿐, 킥력 자체는 뛰어난 편인 성배였기에 볼은 레이저처럼 일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뻐-억!

“아, 주의 슈팅이 벽에 걸렸습니다! 중국 선수의 머리에 맞고 사이드라인 아웃됩니다.”

성배의 의도와는 다르게 벽을 쌓고 있다가 점프한 중국 선수의 머리를 정통으로 때리고 말았다.

그 충격에 쓰러진 중국 선수는 그 후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진짜로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킥력이 괜찮다고 평가받는 선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때린 슈팅은 몸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걸 머리에 맞았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이런,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네요. 정즈 선수인 것 같은데요.”

중국의 주장이자 핵심인 정즈는 성배의 슈팅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들것이 들어왔고,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나가 치료를 받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뇌진탕인가...’

가벼운 뇌진탕인 듯했다.

후유증이 남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오늘 경기에 더 이상 뛸 수는 없을 것이었다.

‘뛰려고 하면 못 뛸 것도 없지만...’

98년 월드컵, 당시 한국 팬들의 많은 기대를 받았던 윙어였고, 지금은 해설자로 활약 중인 윤승우가 가장 아쉬운 대회로 꼽은 대회였다.

첫 경기를 앞두고 훈련 중에 공에 맞아 가벼운 뇌진탕으로 잠시 의식을 잃었던 그는 출전을 강행했고, 경기 내내 나사 하나는 빠진듯한 플레이로 최악의 경기를 펼쳤다.

‘나와주면 오히려 고맙지.’

잠시라도 의식을 잃었다면 제 모습을 보인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경기 출전을 강행해준다면 벨기에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 낭만필드 - 148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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