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20 >
“아오, 비옵니다. 우산 있으십니까?”
한 시간 반이라는 길지 않은 비행시간 동안 애매하게 잠들어서 오히려 더 찌뿌둥해졌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기분 나쁜데, 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나가 보니 비까지 오고 있었다.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드는 날이었다.
“앞으로 런던에서 활동하려면 무조건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비 오는 날이 맑은 날보다 많은 도시니까요.”
옆의 편의점에서 우산 두 개를 사 온 버크만이 그중 한 개를 내밀며 말했다.
런던.
잉글랜드의 수도이자 축구의 수도라고 불리는 그 도시에 성배가 서 있었다.
“뭐,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날씨가 안 좋으니 기분도 꿀꿀해지네요.”
버크만의 말이 옳았지만, 그래도 처지는 건 처지는 거였다.
더 할 건 없고, 더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우산을 펴면서 투덜댈 뿐이었다.
토트넘 핫스퍼 F.C.
성배는 다음 행선지로 이곳을 선택했다.
북런던의 토트넘을 연고지로 하는 프리미어리그의 유서 깊은 클럽이었다.
비록 빅4의 아성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매년 빅4를 위협할 클럽을 꼽을 때 첫 손에 꼽히는 클럽이었다.
재정 상황도 괜찮고, 이적시장에서도 꽤 많은 돈을 풀었다.
매년 더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야망이 가득한 클럽.
그런 클럽이었기에 성배도 기쁜 마음으로 토트넘을 선택했다.
“그래도 걱정은 걱정입니다. 토트넘의 이번 시즌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아서요.”
버크만은 아직도 토트넘을 선택한 성배의 결정이 불안한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20라운드가 끝난 현재 시점에서 토트넘의 순위는 12위.
빅4 다음 레벨로 팀이 성장한 지 고작 2-3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직 확실히 자리 잡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버크만도 마찬가지였다.
“알랭. 토트넘은 분명 지난 2년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둘 겁니다. 잠시 주춤하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성배는 확신이 있었다.
확신이라기보다는 성배 혼자 알고 있는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렸다.
성배가 알고 있는 미래, 토트넘은 빅4와 맨체스터시티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클럽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당장 이번 시즌 성적만 봐도 처참합니다.”
지난 두 시즌 동안 5위를 차지하며 빅4를 위협한 토트넘이었다.
하지만 미드필더의 핵심이었던 마이클 캐릭이 팀을 떠났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유명한 유리몸 센터백 진영은 매 순간, 매 초마다 붕괴했다.
게다가 마틴 욜 감독이 수집한 풀백들은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눈에 확 띄는 선수가 없었다.
그렇게 10라운드까지 1승 4무 5패라는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었고, 순위는 17위까지 떨어졌다.
결과는 마틴 욜 감독의 경질이었다.
“그것도 물론 사실입니다. 하지만 킨, 베르바토프, 벤트, 데포로 이루어진 공격진은 프리미어리그 정상급이고, 말브랑크와 레넌이 버티는 측면도 훌륭합니다. 수비진만 안정시킬 수 있다면, 언제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클럽이에요.”
약점이 분명한 팀이지만, 그만큼 장점도 분명했다.
로비 킨,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투톱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조합이었다.
백업인 벤트와 데포 역시 다른 팀들이 욕심낼 수밖에 없는 좋은 공격수들이었다.
말브랑크와 레넌 역시 측면에서 쏠쏠하게 지원해주었다.
“뭐, 어차피 선택했는데 주의 말이 맞기를 바라야겠죠. 치열한 풀백 경쟁에서 승리할 자신은 당연히 있으시겠고.”
“굳이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지도 않았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 성격.”
성배는 기본적으로 주전 자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팀을 옮기지 않았다.
이적을 추진한 두 번의 이적시장에서 이런 모습을 확실히 보았던 버크만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토트넘의 풀백은 포화상태입니다.”
파스칼 심봉다, 가레스 베일, 폴 스탈테리, 아수-에코토, 윤기표에 성배, 그리고 곧 영입할 것이 확실시되는 크리스 군터까지.
두 자리를 놓고 무려 일곱 명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풀백이 있음에도 겨울에 두 명이나 되는 풀백을 영입했다는 것은 현재 팀의 풀백들이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제게 좋은 일이죠.”
토트넘 풀백 진영의 특징은 기량이 나쁘지는 않은데, 마땅히 뛰어난 선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안정감과 수비는 괜찮지만, 공격력이 약한 윤기표처럼 뭔가 애매한 선수들이 많았다.
“게다가 라모스 감독은 공격적인 풀백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욜 감독은 수비가 안정적인 풀백을 좋아했죠.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저는 둘 다입니다. 하지만 지금 토트넘에 있는 풀백들은 욜 감독의 취향에 맞는 선수들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욜 감독이 토트넘을 지휘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윤기표는 중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라모스 감독이 부임한 이후 라인업에서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세비야 시절, 희대의 공격형 풀백 다니 알베스와 함께했던 라모스의 눈에 윤기표의 공격력은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이었다.
“하긴. 저도 들었습니다. 평소 토트넘답지 않게 이번에는 라모스 감독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였다고 하는데, 주의 영입은 전적으로 라모스 감독의 뜻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성배의 앞날은 더욱 밝았다.
토트넘은 분명 프런트가 독재하는 클럽이라고 불릴 정도로 단장의 입김이 강했고, 이런 시스템이 중요한 길목마다 발목을 잡았지만, 현장에서의 감독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즉, 선수 선발은 전적으로 감독의 결정이라는 것이었다.
라모스 감독이 직접 영입을 추진했고, 자신이 원한 몇 안 되는 선수인 성배를 벤치에 앉힐 리 없었다.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라운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걱정하면 됩니다. 알랭도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할 건 없군요. 스폰서나 찾아보겠습니다.”
프리미어리그 진출.
이미 한 번 스폰서 계약을 갱신하며 상당한 금액을 보장받았지만, 스폰서도 한 곳만은 아니었다.
프리미어리그 진출로 인한 광고 효과는 상당했고, 국가대표팀에서까지 맹활약을 펼치며 벨기에 내에서 성배를 원하는 곳이 많아졌다.
벨기에 축구의 암흑기.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벨기에 선수는 거의 없었고, 성배는 스폰서와 광고 등으로 부수입을 얻을 최적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건 알랭이 알아서 잘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것보다, 독립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버크만도 독립 준비를 하고 있었다.
1,100만 유로짜리 선수인 성배와 함께 몇몇 선수들을 관리하던 버크만은 맡은 선수들이 모두 터지면서 주가가 상승했다.
더 이상 AA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예. 이미 두 명 정도의 선수가 합류하기로 한 상태입니다. 회사도 대충 꾸려지고 있습니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한 AA 출신이었기에 버크만도 프랑스 출신 선수 몇 명, 그리고 성배와 함께 시작하기로 했다.
가끔 성배의 조언도 받아가면서 선수들을 설득했고, 이미 두 선수는 버크만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두 명이라. 꽤 많은데, 누군지 들어도 됩니까?”
“당연합니다. 주가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리옹의 카림 벤제마, 마르세유의 사미르 나스리입니다.”
아무래도 신생이었기 때문에 너무 뜬 선수도, 너무 어린 선수도 곤란했다.
그렇다고 대충 골라잡기에는 버크만의 이름값이 많이 높아졌다.
그래서 버크만은 대형 유망주이지만, 에이전트는 약하고 아직 확실하게 뻥 터지지는 않은 선수를 노렸다.
벤제마와 나스리는 확정, 몇몇 선수는 설득 중이었다.
“오! 그 두 선수입니까? 굉장한 성과인데요? 역시, 대단합니다.”
버크만이 조언을 구해 답해준 적이 많았고, 이 두 선수를 적극 추천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 영입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두 선수가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은 다른 선수들도 이들의 이름값을 보고 합류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버크만의 능력은 항상 상상을 초월했다.
“다 주의 조언 덕분입니다. 하하.”
“저...”
그때, 갑자기 앞좌석에서 택시 기사가 말을 꺼냈다.
“혹시 주성배 선수 아닌가요?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이미 성배가 토트넘과 계약하기 위해 메디컬 테스트를 받는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상황이었다.
축구의 나라 잉글랜드에서 토트넘의 연고지 북런던, 토트넘에 그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맞습니다.”
알아본다고 해서 특별히 곤란할 일도 없었다.
성배의 시인에 택시 기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런! 내가 주를 태운 거였군요! 이거 영광입니다!”
토트넘의 열렬한 서포터라고 자신을 소개한 택시 기사는 토트넘과 성배에 대한 내용을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흥분해서 현재 토트넘의 약점과 보강해야 할 부분을 늘어놓는 그의 말은 평범한 팬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정확했다.
“하하, 그래서 저는 겨울 이적시장이 열리기도 전에 꼭 주를 영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팀에 중요한 건 수비와 공격을 한 번에 해결해줄 수 있는 선수였고, 주는 누구보다 그 역할에 잘 어울리니까요!”
직접적인 프리킥 득점, 프리킥과 코너킥을 통한 세트피스, 절묘한 타이밍의 오버래핑과 안정적인 수비력, 준수한 수비라인 조율 능력까지.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현재의 토트넘에는 다재다능한 수비수가 필요했다.
시장에 나올 가능성이 있고, 토트넘이 영입할 수 있는 선수 중에서 최고는 성배였다.
“감사합니다. 이거 좀 부담스럽지만, 굉장히 기쁜데요?”
‘내가 다재다능하다는 평가를 받다니...’
다재다능.
성배는 이 단어에 가슴이 뿌듯하게 차오름을 느꼈다.
재능이 없음을 비관하며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발악했던 십수 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재다능한 풀백 유망주의 대표격으로 불리고 있었다.
“주, 진짜 잘 부탁해요. 우리 스퍼스는 이렇게 무너질 팀이 아니에요.”
축구가 인생인 잉글랜드 서포터들에게 응원하는 클럽의 부진은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두 시즌 연속 5위를 차지하며 챔피언스리그를 향한 꿈을 키웠던 그들은 지금의 순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의 영입이 그 돌파구가 되어주길 바랐고, 지금까지 신빙성 있는 이적설의 주인공 중 최대어가 바로 성배였다.
“하하, 그런 걱정을 왜 하십니까? 스퍼스는 당연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겁니다. 요즘에는 분위기도 좋은데요, 뭐.”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이끌어낼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프리미어리그에 대한 불안감은 있었다.
아직 완벽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드볼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몫 이상은 할 수 있어.’
일단 남은 반 시즌은 리그에 적응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번 시즌의 토트넘은 망했다.
적당히 자신의 몫만 해주어도 비판은 받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프리킥과 코너킥만 활용해도 충분히 자신의 몫은 해줄 자신이 있었다.
“꼭 부탁합니다. 주만 믿고 있을게요.”
순수하게 축구와 토트넘을 사랑하는 서포터.
간절함과 함께 자신에 대한 응원을 내비치는 택시 기사의 눈빛을 보며 성배는 마주 웃어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후반기에 분명 스퍼스는 더 위로 갈 겁니다.”
빅리그 진출.
빅리그에 성배의 발자국이 찍히기 직전이었다.
< 낭만필드 - 120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