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77화 (52/356)

< 낭만필드 - 077 >

“오늘 이 경기를 시작으로 시즌이 개막한다.”

지난 며칠은 각자 자신들의 나라 대표팀에 합류해 A매치를 치른 날이었다.

또,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지 못한 선수들은 나름대로 휴식을 취한 날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모인 아약스의 선수들은 다시 모여 훈련을 시작했다.

며칠 뒤,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펼쳐지는 에레디비지에 개막전이자 홈 개막전이 열렸다.

“지난 시즌. 내가 감독은 아니었지만 에레디비지에 최고의 팀 아약스의 성적은 실망스러웠다.”

지난 시즌 아약스의 최종 순위는 4위.

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권 플레이오프를 통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긴 했지만, 네덜란드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아약스에 어울리는 성적은 아니었다.

“이번 시즌에는 무조건 우승을 노립니다. 그러니까 오늘 경기, 무조건 잡고 갑시다.”

구겨진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 우승컵이 절실했다.

한 수 아래의 상대를 홈으로 불러들여 치르게 된 개막전.

지난 시즌 종료 이후 조용히 칼을 갈아 온 아약스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섰다.

***

“아, 발베이크. 아약스에게 상대가 안 되네요. 전력의 차이가 큽니다.”

경기 시작 전, 케이테 감독과 아약스 선수들은 굉장히 비장한 태도로 경기를 준비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비장하게 내뱉은 말들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올 시즌에도 아약스는 강력한 우승후보입니다. 전력 보강도 굉장히 충실하게 잘했고요,”

“지난 시즌에 생각보다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래도 아약스는 여전히 아약스입니다. 무난하게 우승권에 안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시즌 4위를 차지했다고 해서 아약스의 전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시즌에는 아약스의 발이 잠시 꼬인 것뿐이라는 게 일반적인 팬들의 생각이었고, 아약스는 여전히 에레디비지에 최강의 팀 중 하나였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뒤쪽에서 길게 볼 투입됩니다! 스네이더에게 정확히 연결되고, 중거리 슈팅! 살짝 빗나갑니다!!”

아약스가 워낙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중계진들도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아약스와 발베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아약스가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면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 거드는 정도였다.

“아약스 입장에서는 아쉽겠네요. 네 번째 골이 들어갈 수 있는 찬스였는데 말이죠. 패스도 좋았고, 슈팅도 좋았는데 아주 살짝 빗나갔어요.”

“최후방에서 한 번에 넘어온 롱패스가 굉장히 위협적이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이번에 새롭게 아약스가 영입한 레프트백 주성배는 이미 주필러 리그에서 정확한 롱패스로 유명했던 선수예요. 역시나 명불허전이네요.”

개막전부터 성배의 롱패스가 빛을 발했다.

아직 직접적인 어시스트는 없었고, 일방적인 경기라 수비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었지만, 간간이 터지는 정확한 롱패스와 정확한 타이밍의 돌파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번 여름 아약스의 이적시장 성적이 굉장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렇죠. 바르셀로나에서 중용되었던 가브리, 비야레알에서 맹활약한 로저 가르시아, AZ 알크마르의 에이스였던 케네스 페레즈, 전도유망한 양쪽 풀백 오가라루와 주성배, 그리고 말이 필요 없는 레전드 야프 스탐까지. 백 점 만점에 백 이십 점은 받아야 해요.”

원래부터 에레디비지에 최고의 명문이었던 아약스고, 그 자리는 점점 더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수 수급의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지난 시즌까지 빅리그에서, 그리고 명문 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던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클럽은 아약스를 제외하면 PSV와 페예노르트 정도밖에 없어요.”

“PSV는 2004/05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과 최근 에레디비지에 2연패 등 갈수록 위상이 올라가고 있는 신흥 강호라 점점 영입이 쉬워지겠지만, 페예노르트는 최근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거든요? 재정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서 갈수록 PSV, 아약스와의 격차가 벌어질 것 같습니다.”

가브리와 로저 가르시아의 영입은 아약스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프리메라리가의 최강자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와 중상위권 클럽 비야레알에서 20경기 이상 출전했던 선수들이 아약스로 이적한 것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국적의 선수들도 아니었다.

지난 시즌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수석코치로 활동한 케이테 감독의 힘도 있겠지만, 아약스 자체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영입이었다.

“경기에 대해 중계를 하고 싶은데, 경기가 너무 일방적입니다. 아약스도 굳이 무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세 골을 넣은 아약스나 세 골을 실점한 발베이크나 적극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경기에서 전력을 다하는 건 체력을 소진하는 것 이외의 의미가 없었다.

“발베이크는 이미 전의가 꺾였고, 아약스는 3일 뒤에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경기가 예정되어 있으니 체력을 아껴야죠. 시즌은 기니까요.”

경기가 소강상태여도 중계진까지 소강상태가 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어떤 뻘소리를 하든지 절대 마가 끼지 않게 중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

‘무난하게 이기겠네.’

사실 성배가 마땅히 할 건 없었다.

안더레흐트나 아약스나 소속 리그의 최강인 것은 같지만, 성배에게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무난한 경기에 무난한 플레이, 무난한 활약이면 데뷔전으로는 무난하네.’

4-2-3-1이나 4-3-3을 활용하던 안더레흐트와는 다르게 아약스는 플랫 4-4-2를 활용했고, 측면 윙어가 2선이 아닌 3선에 위치하면서 플레이하기는 더 쉬워졌다.

딱히 큰 임팩트를 선보였다고 할만한 경기는 아니었지만, 아직 데뷔전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활약이었다.

‘콤파니와 같이 뛸 때도 놀랐는데, 스탐은... 말이 필요 없네.’

그가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콤파니와 함께 뛸 때도 평생 그라운드 위에서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이 있었는데, 스탐은 그보다 더했다.

안더레흐트 시절에는 간혹 성배가 라인을 리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보통은 스탐이, 특별한 경우에도 헤이팅아와 그리게라가 알아서 라인을 조율해주었다.

‘파이터형이라더니.’

파이터형과 커맨더형.

센터백을 분류하는 기준에 따르면 스탐은 파이터형에 속하는 선수였지만, 에레디비지에에서는 완성형이었다.

약점이 없었다.

‘전성기도 아닌 선수가 저 정도면... 도대체 지금 최고의 선수들은 어디에 있는 건지.’

이런 스탐의 모습에 성배는 기가 질렸다.

지난 시즌, 한창 전성기의 호나우지뉴를 꽁꽁 묶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클래스는 영원함을 증명했지만, 엄밀히 말해 스탐은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장이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라면, 앞으로 자신과 경쟁할 월드클래스 선수들의 레벨은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지만... 저런 걸 보고 어떻게 주눅이 안 드냐고.’

과거의 경험에 허우적대면서 미리부터 한계를 그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얼마 전이었지만, 이런 선수들을 볼수록 자신도 모르게 한계를 그리고 있었다.

지금 스탐만 봐도 놀라운데, 전성기에는 도대체 어느 정도였다는 건지, 지금 최고라 인정받는 선수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건지.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IN - 4. 토마스 베르마엘렌 / OUT - 13. 주성배]

‘뭐야. 센터백으로 고정하겠다더니.’

경기 막판, 케이테 감독은 성배를 빼고 베르마엘렌을 투입했다.

이번 시즌 합류해 적응이 필요한 성배의 체력을 관리해주고 아약스가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베르마엘렌에게 출전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수고했어. 이제 좀 쉬라고.”

“그래, 알았다. 수고해라.”

A매치 소집 이후 네덜란드계 대표 선수들 모임에서 친해진 두 선수는 가벼운 포옹으로 하이파이브를 대신했다.

“잘 뛰었다. 데뷔전 축하한다.”

케이테 감독도 성배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에레디비지에 데뷔전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무난하게 연착륙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두 달 안에 적응을 완료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정도면. 괜찮았어.’

그런 의미에서 첫 경기는 만족스러웠다.

***

- 태-앵

“바벨의 돌파! 슈팅! 아, 골대를 강타합니다!!”

FC 코펜하겐과의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2차전.

전력도 한 수 위이고 홈경기인 데다가 원정 1차전에서 2-1로 승리를 거둔 아약스가 주도권을 잡고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별로 안 좋은데?’

하지만 성배는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못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경기를 주도하는 것 같지만, 정작 득점은 나오지 않고 있었고, 공격수들이 신나서 상대 골문을 두드리고는 있는데 슈팅 대부분이 골키퍼 정면이거나 골대를 벗어났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한 번은 위기가 온다.’

만고의 진리이고 선배들이 경험을 통해 알려준 교훈이었다.

계속 두드리던 팀이 균형을 깨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위기에 빠진다는 것.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볼 끊어냅니다!! 코펜하겐의 역습! 그롱크예르가 빠르게 올라갑니다!”

역시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시간이 계속되면서 안일해진 아약스의 패스를 코펜하겐이 끊어내며 빠른 역습을 시도했다.

아약스를 거쳐 첼시, 버밍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스웨덴의 베테랑, 그롱크예르가 선봉장이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빠르네.’

지난 시즌에도 슈투트가르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충분한 기량을 증명했지만, 향수병 때문에 북유럽으로 복귀한 선수였다.

아직 20대 후반으로 한창 전성기를 달릴 나이였고, 장점인 스피드는 여전했다.

“헤이팅아가 놓칩니다!! 그롱크예르의 위협적인 돌파!!”

수비력이 뛰어나지만 헤이팅아의 스피드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일대일이라면 모를까, 이미 최고 속도까지 도달한 그롱크예르를 막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몇 명이나 들어오고 있지?’

코펜하겐의 역습은 매서웠다.

벌써 공격진을 구성하는 네 명의 선수들이 박스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작정하고 있었어, 역시.’

아약스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코펜하겐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런 역습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왼쪽에서 크로스! 문전으로 쇄도!”

그롱크예르의 크로스는 중앙의 스탐과 그리게라를 지나 성배 쪽으로 넘어왔다.

‘닿아라!’

성배와 스탐, 그 사이로 볼이 투입되었고, 코펜하겐의 한 선수가 빠르게 침투했다.

성배도 볼을 먼저 건드리기 위해 최대한 발을 뻗었다.

“슛!! 아... 골입니다. 코펜하겐의 실버바우어, 선취골을 터뜨립니다.”

“좋지 않은데요? 경기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먼저 실점을 허용했어요.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죠?”

성배도 최선을 다했지만, 크로스가 떨어진 위치가 너무 좋았다. 실버바우어의 침투도 완벽했다.

‘막을 수 있었는데. 빌어먹을.’

실버바우어의 발에 먼저 닿은 볼은 성배의 축구화 끝에 맞고 굴절되어 골라인을 통과했다.

가까운 위치에서 이루어진 슈팅이었기에 빠르게 몸을 날린 스테켈렌부르크 골키퍼는 볼이 골망을 흔드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낭만필드 - 077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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