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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76화 (51/356)

< 낭만필드 - 076 >

벨기에 국가대표로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은 각자 클럽으로 흩어지기 전에 점심 약속을 잡고 모였다.

장소는 브뤼셀에 집이 있는 바슈쥬의 집이었다.

“몸 엄청 좋아졌네. 뭘 했길래 그 짧은 시간에 몸을 이렇게 키운 거야?”

집에 들어서는 성배를 본 반덴 보레의 반응이었다.

시즌이 끝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정도의 몸은 아니었기 때문에 반덴 보레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뭘 해. 운동했지.”

성배도 초대를 받고 바슈쥬의 집을 찾았다.

지난 시즌 안더레흐트에서 함께 뛰었기 때문에 당연히 친분은 있었다. 깊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왈터! 확실히 이상하지 않아요? 이거 약 한 거 아냐?”

두 달 동안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키운 몸이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오니 조금 뿌듯했다.

“약은 무슨. 진짜 열심히 운동했나 보네. 보기 훨씬 더 좋다.”

“고마워요, 왈터. 저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요.”

여기 모인 벨기에 국가대표 선수 중에서도 성배는 꽤 잘나가는 편이었다.

물론 현재 기량과 미래의 잠재력을 고려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저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성배의 시선이 반덴 보레에게 가 닿았다.

굉장히 활발하고 장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위기감을 좀 가져야 할 때인데. 이번 경기에도 못 나갔고.’

혜성처럼 등장해 콤파니와 함께 벨기에의 미래를 짊어질 재목이라며 극찬을 받았었지만, 최근에는 성장세가 생각보다 더딘 느낌이었다.

지난 시즌에도 리그 열여섯 경기 출전에 그쳤고, 콤파니는 물론이고 성배까지 대표팀에서 자리 잡는 동안 여전히 후보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 봤을 땐 정말 대단했었는데. 하긴, 일반적인 유망주라면 저게 정상인가.’

혜성처럼 나타난 유망주가 성장이 더뎌져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일은 흔했다.

반덴 보레도 그런 케이스였을 것이었다.

비슷한 포지션이고 회귀한 뒤에도 항상 비교되었기 때문에 반덴 보레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성배였다.

특히, 회귀 후 반덴 보레를 처음 봤을 때, 그 재능에 놀랐었기에 더욱 아쉬웠다.

‘결국, 자기 일이지. 개인적으로는 과거와 달라지길 바란다만.’

성배가 없었던 전생에서도 베르통헨이 맡았던 레프트백 포지션은 어느 정도 땜빵이 가능했지만, 라이트백 포지션은 꾸준히 벨기에의 걱정거리가 되었었다.

반덴 보레가 성장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벨기에 전력에 플러스가 되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일 생활은 어때.”

반덴 보레에 대한 생각을 접은 성배는 콤파니의 옆에 자리 잡았다.

함부르크에서는 콤파니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용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이었다.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리그, 새로운 포지션에 적응하느라 애쓰고 있을 것이었다.

“독일 생활인지 뭔지 신경 쓸 틈도 없다. 팀이랑 포지션에 적응하는 것도 벅차서.”

콤파니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함부르크가 콤파니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수비형 미드필더 전성시대.

과거, 재능있는 선수들을 모두 공격수로 활용했던 것처럼 지금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용하는 것이 대세였다.

“어때?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는 건.”

“패스할 일도 많고 다른 것도 많은데, 비슷한 부분도 많아서 재미는 있다.”

아직 센터백의 빌드업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전이어서 패스가 좀 되는 센터백들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려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성공한 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볼 때, 넌 딱 센터백인데 말이야.”

다만, 콤파니는 그런 케이스가 아니었다.

함부르크 시절은 콤파니 커리어의 암흑기였고, 콤파니의 전성기는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해 센터백으로 돌아간 뒤에 찾아왔다.

“글쎄. 센터백이 편하기는 하지만, 팀에서 원하는 곳에서 뛰는 거지. 아직 내가 뭐 가릴 커리어도 아니고.”

반덴 보레와 달리 콤파니는 결국 최고의 선수가 되기 때문에 콤파니를 걱정하는 건 쥐가 고양이 걱정해주는 꼴이었다.

“그래. 널 뭐하러 걱정하겠냐. 어떻게 해도 나보다 잘 나갈 텐데.”

“그러는 너도 요즘 분위기 좋던데. 주전은 확정인 것 같더라.”

“레프트백 경쟁자가 없으니까. 내 포지션은 그게 좋아. 한 팀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선수를 두 명 이상 보유하기 힘든 포지션이라서.”

선수들이 가고 싶어서 안달 난 몇몇 빅클럽을 제외하면 성배 정도 수준의 레프트백을 두 명 보유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좋겠네. 센터백은 뭐 이렇게 좋은 선수가 많은지.”

피식 웃으며 콤파니가 말을 받았다.

“그나저나, 이제 다 모인 건가?”

대략 열 명 정도의 선수가 모였는데,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할 분위기였다.

“아마 그럴걸? 다니엘만 오면 다 오는 것 같은데.”

스물세 명의 선수 중 모인 선수는 열 명 남짓.

무언가를 눈치챈 성배가 천천히 모인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전부 다 프랑스어를 쓰고 있네.’

바로 이거였다.

전부 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어 지역권 출신이거나 아프리카 이민자 출신 선수들이 모여있었다.

브뤼셀을 연고로 하는 안더레흐트 선수들을 포함해 리그앙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의 모임이었다.

‘네덜란드에서 활약하는 선수는... 한 명도 없구나.’

벨기에의 지역감정은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독립 전에는 서유럽 중개 무역의 거점이자 전통 산업인 모직물 공업의 힘으로 유럽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번영했던 플랑드르 지방은 독립을 이룬 시점에서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반대로 프랑스어 지역권인 왈롱 지방에는 벨기에가 보유한 대부분 탄전과 철광산이 있었는데, 독립할 즈음 일어난 산업 혁명으로 인해 벨기에 경제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래서 독립할 때쯤에는 경제력이 역전되었고, 플랑드르 인들은 왈롱 인들에게 거지 취급을 받고, 정치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으며 150년 정도를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원래 네덜란드인 비율이 높았던 브뤼셀이 왈롱인들의 도시로 변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중공업 섹터가 몰락하고 금융업이 발달하면서 플랑드르가 관광업과 금융업을 앞세워 화려하게 부활했다.

왈롱 지방과 플랑드르 지방의 경제력이 역전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차별을 받아왔던 네덜란드 지역권이 플랑드르 지방의 경제력을 앞세워 들고 일어났다.

사용 언어에 따라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역별로 의회를 프랑스어권, 네덜란드어권, 독일어권으로 나눠 세 개를 두기로 한 것이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브뤼셀에는 다섯 개의 의회가 있고, 브뤼셀의 주민들은 세 개 의회의 통제를 받는 것이었다.

중세 시대에 불어로 공식 문서를 작성한 덕분에 문맹 취급을 받아 상류층으로 나서지 못했고, 얼마 전까지는 거지 취급을 받으며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아온 플랑드르 지방이 울분을 토해낸 결과였다.

당연히 왈롱 지방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고, 이 대립에서 독일어권마저도 제도권에서 소외당해 불이익을 받고 있다며 나름대로 반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왈롱 지방과 플랑드르 지방, 그리고 독일어 공동체가 따로따로 분리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어가 주로 쓰이면서 플랑드르 지방에 속해있고 벨기에와 EU의 수도인 브뤼셀 수도권은 미국의 워싱턴 D.C.처럼 독립하겠다며 나서는 등 하여튼 복잡했다.

‘이러니 그 좋은 선수단으로도 몇 년을 더 고생했지.’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팀인 만큼 당연히 여기서도 서로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

왈롱 지방 출신 선수들과 플랑드르 지방 출신 선수들 간의 반목이 벨기에의 발목을 잡아 황금세대가 나타난 이후에도 몇 년을 더 고생해야 했다.

‘나는 이쪽으로 고정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자신은 어느 쪽에 속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브뤼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지만,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나 모두 구사하고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복잡하네. 잘 풀리면 분명 큰 무기가 될 수 있을 텐데.’

다음 행선지를 아약스로 고를 때 고려했던 대로 두 집단 모두에 속하는 것이 베스트였다.

두 집단과 모두 친분을 쌓으면 기량과 별개로 선수단의 화합을 위해 국가대표팀에 출근도장을 찍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아,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 일이 좀 생겨서.”

그때, 마지막으로 벨기에의 정신적 지주, 다니엘 반 바이텐이 도착했다.

벨기에에서 가장 세계적인 선수이자 대표팀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반 바이텐...’

그리고 양쪽 집단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까지 하고 있는 선수였다.

반 바이텐이라는 네덜란드 성을 쓰고, 스탕다르 리에주와 마르세유를 거치는 프랑스권에서 성장했으며, 독일인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독일어까지 유창하고 함부르크를 거쳐 바이에른 뮌헨에서 뛰고 있는 선수.

이보다 더 그 역할에 적합한 선수는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을 정도였다.

“오! 이게 누구야. 어제의 영웅이 아니신가!”

성배를 발견한 반 바이텐이 살짝 과장을 섞어 연극 투로 말했다.

“「햄릿」에 출연이라도 하려고?”

성배가 반 바이텐에게 태클을 걸었고, 반 바이텐은 웃음을 터뜨리며 성배의 옆자리에 앉았다.

“야, 뱅상. 얘 이런 말도 할 줄 아네. 네 말만 들었을 때는 완전 재미없는 스타일일 줄 알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물론, 자신이 별로 재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회귀한 이후 그다지 유쾌한 태도로 살지는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것이었다.

“간간이 던지는 말에 센스는 있지만 재미있는 건 아니지. 5분만 대화해보면 알 수 있을걸.”

“하하, 그런가? 그러면 한 5분만 대화해보지, 뭐.”

반 바이텐의 말에 콤파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선수들에게로 향했다.

반 바이텐이 성배에게 할 말이 있어 자리를 피해달라 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주. 점심 먹고 다른 약속 있어?”

그리고 한다는 말이 이 자리가 끝난 뒤 약속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없지. 왜? 네덜란드계 선수들끼리 또 모이는 자리라도 있나 보네.”

“오. 점성술이라도 하는 건가? 혹시 그게 동양의 비전? 닌술, 차크라, 뭐 그런 거?”

성배의 말에 반 바이텐은 또 한 번 과장되게 놀라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이미지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배는 반 바이텐이 꽤 긴장했음을 눈치챘다.

“너무 긴장하지 마. 그런 거 안 어울려. 고작 모임에 같이 가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눈치도 빠르네. 나름대로 경험도 많고 분위기 파악도 잘하는 편인데 말이지. 나보다 훨씬 노장들을 보는 느낌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반 바이텐은 고개를 저었다.

“뭐, 좋아. 같이 가자고. 안 그래도 먼저 말하지 않았으면 그런 모임 없냐고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으니까.”

안 그래도 네덜란드계 선수들과 접점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주면 땡큐였다.

“네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했으면 굳이 내가 올 필요도 없었군.”

“지금 내가 가진 조건이 얼마나 유리한 건데 그걸 놓칠까. 프랑스어권에서도 활약하고 네덜란드에서도 활약한 선수. 네가 맡은 역할을 이어받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지.”

반 바이텐은 계속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데려가서 빨리 그 역할, 같이 하게 해달라고. 내 앞길과 벨기에의 앞길을 닦아줄 테니.”

“알았다. 알았으니까 끝나면 기다리고 있어. 안 그래도 혼자서 왔다 갔다 하기 힘들었으니까.”

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 두 곳을 오가며 그사이를 연결해준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 덕에 성배의 상황을 보자마자 역할을 분담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 것이고.

“네덜란드어는 할 줄 알지?”

“당연하지. 네덜란드어를 더 잘할지도.”

반 바이텐의 물음에 네덜란드어로 답한 성배였다.

네덜란드어 구사 능력에서 통과한 성배는 반 바이텐의 협조로 네덜란드계 선수들 모임에 참여했고, 가벼운 친분을 쌓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계의 핵심이 될 콤파니와 친분이 상당하고, 앞으로 네덜란드계의 핵심이 되는 베르마엘렌이나 베르통헨 등과도 함께 활약하게 된 만큼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76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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