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69 >
다람쥐 쳇바퀴는 쳇바퀴인데 매일매일 굴리는데 너무 큰 힘이 필요한 네모난 쳇바퀴를 굴리느라 방전되고 있는 성배가 오랜만에 일정 외의 약속을 잡았다.
집과 트레이닝 센터가 아닌 것을 방문하는 건 거의 2주 만이었다.
“뭐야. 운동 안 하나 봐? 신수가 훤해졌네.”
식당에 들어온 성배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약속 상대를 찾아 그 앞에 앉았다.
“쉬기는. 다음 시즌부터 얼마나 빡빡해졌는데.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
성배가 만난 사람은 안더레흐트 팀 동료 콤파니였다.
이적이 확정되어 곧 떠나는 콤파니가 성배에게 연락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밥이나 한 끼 먹자고 불러낸 것이었다.
“그래서, 빅리그로 간 기분은 어때.”
결국, 콤파니는 전생과 마찬가지로 분데스리가의 함부르크와 계약을 맺었다.
최근에는 좀 주춤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라 평가받는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것이었다.
“부담되겠네. 하필이면 또 다니엘 후임으로 영입된 거니까.”
함부르크는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 최소 실점을 기록한 팀이었다.
공격력이 조금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리그 3위를 차지한 것은 탄탄한 수비진 덕분이었고, 그 배경에는 현재 벨기에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선수, 다니엘 반 바이텐이 있었다.
그 반 바이텐을 대체할 선수로 벨기에 국가대표팀에서 반 바이텐의 후계자라 불리는 콤파니가 낙점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워낙 잘하기도 했고.”
그런 벨기에 국가대표팀에 이어 클럽에서도 반 바이텐의 공백을 채워달라는 기대를 받게 된 것이었다.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난 반 바이텐의 이적료는 1,050만 유로. 분데스리가 역사상 다섯 번째로 많은 금액이었다.
“하하. 네 이적료도 만만치 않은데,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어휴. 내 손이 다 떨린다.”
그렇다고 콤파니의 이적료가 적은 것도 아니었다.
함부르크는 콤파니를 얻기 위해 무려 800만 유로의 이적료를 지불했다. 조금만 부진하면 곧바로 비난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겁주지 마라. 안 그래도 부담스러우니까.”
스무 살의 어린 선수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전 세계를 대표하는 센터백으로 성장할 선수라고 해도 지금은 고작 스무 살의 어린 선수일 뿐이었다.
“뭘. 너무 부담 갖지 마. 벨기에 최고의 재능이라는 놈이 고작 함부르크에 부담을 느끼면 안 되지.”
그리고 그런 모습이 이제는 별로 낯설지 않았다.
전에는 미래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이 거의 없어졌다.
“걱정 마라. 아무리 망해도 설마 너보다 성공 못 할까.”
“그딴 이야기 들으려고 위로해준 건 아니다만.”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해두지. 기본적으로 나는 타고난 것들이 많아서. 신의 사랑을 받은 몸이라 너와는 다르니까.”
이 자식을 한 대 치고 싶다.
이런 생각이 성배의 머릿속을 스쳤다.
안 그래도 타고난 피지컬이 부족해 토할 때까지 고기만 먹고 또 토할 때까지 웨이트를 하면서 살고 있는데, 이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그런 생각 하다가 금방 따라잡힌다. 요즘 진짜 토할 때까지 운동하고 있으니까.”
“그럼 나는 토하기 전까지만 운동해도 가볍게 앞서나갈 수 있겠네.”
본전도 못 건졌다.
“그래서, 너는 어디로 갈지 대충 정해졌어?”
말문이 막혀 한숨을 쉬고 있는 성배를 보며 승리의 웃음을 터뜨린 콤파니가 화제를 돌렸다.
“아니. 아직. 대충 생각은 하고 있는데, 아직은 더 두고 보려고.”
아약스와 랑스, 모나코를 두고 고민 중이지만, 아직 이적시장은 한 달하고도 반이 넘게 남아있었다.
“끌리는 제안이 있기는 있고?”
“당연하지. 네가 아무리 무시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이 몸도 꽤 잘 나가서.”
누차 말해왔듯, 왼발 킥이 정확한 레프트백은 희귀했다.
당연히 이적시장에서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너무 시간 끌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시간 끌수록 더 좋은 제안을 기다릴 수 있고, 마음이 급한 클럽 측에게 조금 더 좋은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에는 마음에 들었던 클럽이 다른 선수를 영입하고 관심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위험도 공존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뭘 얻어낼 수 없지. 그 정도쯤이야. 설마 지금 고려하고 있는 클럽들이 전부 그렇게 날아갈 리도 없고.”
솔직히 돈도 중요하지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돈이야 당장 몇 년만 기다리면 투자했던 금액들이 몇 배는 뛰어서 돌아올 것이고,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벌어들일 것이었다.
문제는 연봉에 따른 팀 내 대우.
연봉이 높을수록 더 많은 기회를 받는 것이 당연했기에 조금이라도 더 몸값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 뭐 그거야 너 알아서 해라.”
“그래. 나 알아서 할 테니 밥 좀 먹자. 고기에 소스 찍어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먹고 싶은데 계속 말 걸어서 침 흘릴 뻔했네.”
콤파니의 질문이 끝나고 나서야 아까 전부터 계속 시선을 빼앗았던 스테이크에 드디어 칼을 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먹는 양념 된 고기에 최근 들어 날카롭게 서 있었던 날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굶기라도 한 거냐.”
“미친. 그럴 리가 있나. 운동선수가 굶는다는 게 말이 돼?”
몇 글자 되지도 않는 말이었지만, 성배의 말은 중간에 몇 번이나 끊겼다.
지금은 입을 말하는 것보다 먹는 것에 사용하고 싶은 성배였다.
***
“어머니! 여기예요!! 유빈아, 여기!!”
방학이 시작된 7월 말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유빈이와 함께 벨기에에 오실 수 있었다.
성배도 이날 만큼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공항으로 나왔다.
“에구, 우리 아들. 신수가 훤해졌네. 그새 키도 좀 큰 것 같고.”
혜진은 성배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면서 양팔을 한껏 벌리고 달려왔다.
“키요? 좀 크긴 했는데, 작년이랑 비슷해요.”
“어! 오빠! 오랜만이야.”
유빈이도 성배를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아니, 이제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많이 사라진 사춘기 소녀가 되었으니 쪼르르라는 묘사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너도 이제 곧 고등학생인데 좀 조신하게 굴어. 여자애가 민소매입고 그렇게 팔을 들면 어떡하냐.”
한국보다는 여름이 조금 더 선선하다고는 하지만,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벨기에도 더웠다.
그래서 민소매를 입고 온 유빈이가 그런 옷차림으로 손을 높이 뻗어 흔들며 달려온 것이었다.
“아이고, 아빠냐? 아빠보다 더한 것 같아. 그치, 엄마?”
“그러게. 네 오빠가 원래 이 정도로 보수적이었나?”
남자든 여자든 민소매를 입은 상태에서 겨드랑이가 보일 정도로 팔을 드는 건 거슬리지 않나?
성배는 자신이 진짜로 보수적인 것인지 두 사람이 지나치게 개방적인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힘들어, 힘들어. 빨리 집에 가자. 나 힘들어. 잘 거야!!”
열다섯 시간의 비행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어머니도 유빈이도 굉장히 지쳐있어서 빠르게 집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알았어. 빨리 가자.”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유빈이의 말에 성배는 바로 두 사람의 짐을 받아 자신의 차로 안내했다.
“그런데 겨우 열흘 있는 것치고는 짐이 많네요? 어지간한 건 다 집에 있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가져왔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뭐가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니.”
열흘 정도 여행하는 건데 둘이 합쳐서 대형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오다니... 성배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와 유빈이는 오히려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으이그, 그 나이에 아직도 이렇게 여자를 몰라서야. 쯧쯧, 안 되겠어, 안 되겠어.”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들며 말하는 꼴이 아주 볼만했다.
방금 꽤 컸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린 유빈이가 여자 어쩌고 하는 건 마냥 귀여웠다.
“그래. 네 나이 때는 나는 다 컸다고 생각하는 법이지.”
“아악!! 내가 머리 건들지 말라고 작년에도 그랬을 텐데!!”
“아! 아파, 이것아.”
한창 자기는 다 컸다고 생각할 때였다.
귀엽기도 하고 해서 장난삼아 머리를 헝클어뜨렸다가 손을 물렸다.
역시.
사춘기 여학생은 미운 네 살 시절의 엘리자베스 못지않게 다루기 어려웠다.
“너도 저 나이 때 네가 다 컸다고 생각하지 않았니? 갑자기 목소리 쫙 깔고 어머니, 아버지하면서 벨기에 간다고 했던 나이잖아.”
지금 유빈이의 나이에서 반년 정도 지나면 딱 성배가 과거로 돌아온 시점의 나이와 같아졌다.
그런데 서른여섯에서 열여섯으로 돌아온 성배는 그 당시 자신을 굉장히 어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얘기가 좀 달랐다.
“그것도 그러네요. 그런데 저랑은 다르죠. 하하. 그때 전 진짜로 준비가 되었던 거고요.”
“나도 다 컸다니까? 요즘 내가 얼마나 철이 들었는데... 그치, 엄마?”
“응? 글쎄다. 그건 잘 모르겠네. 키하고 몸은 좀 큰 건 맞는데, 왜 하필이면 철이 들었다고 해서... 엄마가 편들어주려고 했는데, 못 들어주게 됐잖아.”
“아, 엄마!!”
“역시. 어머니가 현명하세요. 시대의 어머니상이라니까요?”
분명 혜진은 유빈이의 편으로 참전했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것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 만나자마자 투닥거리기 시작한 남매를 보는 것 자체가 혜진에게는 기쁨이었고, 조금 더 오래 투닥거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어머니의 배려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남매는 1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오늘은 일단 쉬실 거예요? 아니면 조금 쉬고 바로 나가실 거예요?”
열다섯 시간의 비행은 물론 힘들겠지만, 시간은 열흘밖에 없었다. 하루를 그냥 쉬기에는 아까웠다.
“글쎄. 여행도 여행이지만 너랑 같이 있으려고 온 거니까 쉬어도 상관은 없는데...”
“나가자!! 나가자!! 보고 싶은 것도 많단 말이야. 나 미술학원도 열흘이나 빼고 온 거니까 여기저기 많이 다닐 거야.”
일상에 지쳐있던 참에 휴가를 얻은 혜진은 그냥 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젊어서 그런지 유빈이는 별로 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긴.
미술학원을 빠질 수 없다던 유빈이에게 이것저것 보여주겠다면서 꼬신 사람이 성배였으니 할 말은 없었다.
“그럼 어머니는 집에서 쉬고 계실래요? 제가 유빈이 데리고 돌아다니면 되니까요.”
“글쎄. 일단 집에서 쉬면서 생각해보자. 많이 피곤하면 그렇게 하고, 괜찮은 것 같으면 같이 나가지, 뭐. 나도 피곤하지만 않으면 나가고 싶고.”
벨기에로 시작해서 프랑스를 거쳤다가 다시 벨기에에서 끝나는 여정이었다.
열흘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무리해서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일단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꼭 봐야 하는 것들을 모두 챙기기로 한 것이었다.
두 국가 모두 유럽의 미술사에서 중요한 문화재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세요, 그럼. 가까운 곳에 차 대놨으니까 빨리 가죠.”
“오오, 오빠 운저-언! 오빠가 운전하는 차 처음 타보네. 막 사고 내고 그러는 거 아니지?”
“경력이 몇 년인데... 차가 움직이고 있는지 멈춘 건지 구분 못 해서 놀랄 준비나 해.”
역시 동생과 있으면 조금 유치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유치해질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 낭만필드 - 06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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