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43 >
‘생각보다 훨씬 형편없네. 얘들 위험하겠는데?’
이적시장을 정말로 대차게 말아먹었구나.
라 루비에르를 상대로 경기하고 있는 와중에 성배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라 루비에르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음펜자의 선취골 이후로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진영에 갇혀버렸고, 이후에는 그저 두드리는 대로 맞아주는 샌드백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난 시즌에 7위는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아무리 이적시장에서 전력보강에 실패했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했다.
지난 시즌 주필러 리그에서 7위를 차지한 강팀, 라 루비에르는 어디로 가고 어디서 2부 리그 승격팀보다도 못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비슷한 팀이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지난 시즌 강등당한 RAEC 몽스의 경기력이 더 나았다.
‘쯧쯧... 이렇게 강등당하면 다음 시즌에 승격하기도 힘들 텐데. 구심점이 될 선수도 안 보이고, 이적료를 안겨 줄 선수도 안 보이고.’
이렇게 강등당하면 다시 올라오기가 굉장히 힘들 것이다.
구심점이 되어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줄 에이스감도 보이지 않고, 많은 이적료를 안겨줘 전력을 보강할 수 있게 해 줄 선수도 보이지 않는다.
전생에서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2부 리그를 꾸준히 지켰던 라 루비에르의 강등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동정할 필요는 없지. 결국, 클럽 운영의 실패일 뿐.’
전생의 로얄 앤트워프가 떠올라서 잠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완전히 별개의 일이었다.
오늘 경기 내내 정확한 타이밍에 패스를 계속 커트하면서 라 루비에르의 공격을 봉쇄하는데 크게 한몫하고 있는 중이었고, 라 루비에르는 그런 성배를 전혀 뚫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이유지만 어쨌든 자신도 지금 급한 상황이었기에 라 루비에르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 더 괴롭혀줄 필요가 있었다.
‘이러면 봐주고 싶어도 못 봐주겠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눈에 훤히 보이는 루트로 볼을 투입하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애를 써서 수비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럽게 상대가 생각하는 것들이 보였다.
그 정도로 완전히 밸런스가 무너져있는 라 루비에르였고, 덕분에 수비하기는 굉장히 편했다.
상대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이거 함정인데, 전혀 눈치도 못 채는구나.'
공격수들이 꽁꽁 묶여있어서 조금 단조롭더라도 그나마 마크가 헐거운 선수에게 패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겠는데, 애초에 그것부터가 함정이라는 것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다니.
대인마크는 자신의 약점이고, 태클 타이밍과 함정 수비는 자신의 장점이기에 일부터 열어주었을 뿐.
이곳은 패스를 투입하는 순간 밝지 않은 미래가 정해지는 개미지옥, 라 루비에르 공격의 종착지였다.
“멀리 나가지 마!! 그냥 앞으로 내주고 자리 지켜!!”
“접수했다!!”
패스가 나오는 것을 중간에 끊어냈기 때문에 돌파를 시도해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나가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콤파니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차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드필더에게 패스하기 위한 동작을 이미 취하고 있던 성배는 반더헤그에게 볼을 내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현재 스코어는 6-0.
굳이 성배가 자리를 비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앞으로 튀어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리만 잘 지키고 수비하면서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하기만 하면 만사가 오케이였다.
지금 라 루비에르의 경기력을 보면 한 골이라도 내줄 경우에는 수비진이 단체로 욕을 들어먹을 상황이라서 욕심은 내지 않는 것이 좋아보였다.
공격에서 조금 더 나은 플레이를 보여주려고 욕심내기보다는 그저 실점하지 않을 수 있게 안정적인 플레이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이었다.
-삑!! 삐--익!!
“좋았어!! 잘했다. 개막전 선발은 처음인데 긴장 같은 건 전혀 안 하네?”
“개막전이라고 뭐 다를 거 있나. 그냥 한 경기일 뿐인데.”
수비라인을 유지하면서 수비에 집중하기 시작한 안더레흐트의 수비진을 뚫기에는 이미 너무 무너져버린 라 루비에르였다.
결국, 안더레흐트가 수비적인 전술로 전환한 이후에도 이렇다 할 찬스를 잡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안더레흐트가 대충 진행한 공격이 몇 차례 더 추가 득점 찬스로 이어졌을 정도였다.
결국, 안더레흐트는 6-0의 스코어 그대로 라 루비에르를 잡아내며 승점 3점과 함께 개막전 승리.
그리고 1라운드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생각보다 심각한 라 루비에르의 전력과 생각만큼 강력한 안더레흐트의 전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고, 이번에도 성배는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이름값을 높였다.
***
라 루비에르와의 개막전에서 어시스트를 추가하는 등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기분 좋게 시즌을 시작한 성배는 슬라비아 프라하와의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1차전 홈 경기에 결장했다.
아직 데샤흐트와 성배의 주전 경쟁은 끝나지 않았고, 데샤흐트에게도 홈에서의 출전기회를 주려는 감독의 의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라비아 프라하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컨디션 관리와 개인 훈련에 매진하던 성배는 연락을 받고 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성배를 맞이한 것은 버크만과 한 명의 남성.
정장을 쫙 빼입은 남자는 성배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나온 요하네스 필스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축구선수 주성배입니다. 반갑습니다.”
버크만과 함께 성배를 기다리고 있었던 남자는 벨기에 축구협회의 직원이었다.
이 시점에서 자신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귀화와 관련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그것 외에는 굳이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자신을 찾을 리 없었고,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성배의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이제 월드컵 예선 경기까지는 2주, 유로 U-19 선수권 대회까지는 한 달 반밖에 남지 않았다.
성배도 살짝 조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월드컵 예선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U-19 대회에는 꼭 출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협회 직원의 말에 귀를 더욱 기울이게 되었다.
“버크만 씨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귀화 의사가 있으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서로가 만족스러운 이야기가 나온다면 귀화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성배는 무조건 귀화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급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벨기에 축구협회 측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단 한 명의 선수가 아쉬운 상황이었고, 열여덟의 나이에 벨기에 국가대표 주전 레프트백과의 팀 내 경쟁에서 앞서나가고 있는 성배의 귀화는 그들로서도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래서 성배도 지금처럼 강하게 나갈 수 있었다.
“사실 협회 측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주성배 선수의 가능성을 크게 보고 귀화 가능성을 검토해왔습니다. 내부적으로 이야기도 꽤 진행된 상태이고요.”
“아, 그렇습니까? 영광이군요.”
인재 부족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이미 예전부터 자신의 귀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소식이 아니었다.
실제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벨기에 유스시스템에서 성장한,
원래 국가에서 연령대와 상관없이 한 번도 국가대표로 활약한 적이 없는,
FIFA가 규정한 귀화 조건을 충족시키는,
그리고 주필러 리그 최고의 유망주 중 한 명인 성배를 보고도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어디까지 진행되었느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의 국적을 바꾸는 일인데 금방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런저런 심사와 검토가 필요할 것이었고, 그것이 한 달 반 안에 끝날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10월 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다음번 메이저 국제대회는 2006년 5월에 있을 유로 U-19 엘리트 라운드였고, 2006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이적을 계획하고 있는 성배에게는 너무 늦은 출격기회였다.
“이제는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두 달 안에 결론이 나올 분위기입니다. 아, 결론이라고 하면 주성배 선수에게 벨기에 국적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한 달이나 두 달 안에 제가 벨기에 국적을 얻을 수 있다는 거군요?”
“예. 그러니까 빠르면 당장 9월 초에 있을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게 될 수도 있고, 늦어도 유로 U-19 예선에는 참가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네요.”
자신의 귀화 가능성을 타진하던 중에 벨기에 축구협회에 자신이 직접 전한 귀화 의사는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준 소식이었을 것이었다.
실제로, 성배의 귀화 의사가 전해진 뒤, 벨기에 축구협회는 탄력을 받아 빠르게 성배의 귀화를 타진했고, 이제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포지션도 현재 벨기에가 가장 원하는 포지션이었고, 귀화에 걸림돌이 될 것도 전혀 없었다.
이런 조건의 선수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에 벨기에도 지금 급했다.
최소한 U-19 예선이 치러지기 전에 벨기에 국적을 받아서 국제무대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던 성배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최대한 서둘러도 10월 전에 귀화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는데, 미리부터 협회에서 준비해준 덕분에 의도한 대로 일이 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다음에는 조금 더 확실한 소식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제 주민등록증이라도 들고 와주셨으면 좋겠네요, 하하."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눈 축구협회 직원은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배의 귀화 의지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생각보다 벨기에에 대해 관심이 많아 사소한 것들까지 숙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배의 귀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때 중요하게 활용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밝은 얼굴은 잠시 뒤, 바깥으로 나갔다가 휴대폰을 들고 들어온 버크만의 목소리에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베우스만테른 감독의 전화입니다. 한국 U-18 대표팀 합류 건으로 할 말이 있다는데요?”
“아, 이야기는 끝났어요. 이리 줘보세요.”
타이밍도 좋게 딱 맞춰서 성배에게 한국 U-18 대표팀 합류와 관련된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아직 축구협회 직원은 사무실을 벗어나지 않았고, 귀화에 대해 대략적인 이야기는 나누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귀화와 국가대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건들을 놓고 마주해 진행할 협회와의 협상에서 주도권 싸움에서 일단 우세를 점할 기회였다.
속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 통화에 임하는 성배는 계속 협회 직원의 표정을 살폈다.
< 낭만필드 - 04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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