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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42화 (17/356)

< 낭만필드 - 042 >

1차전에서 6-0의 대승을 거둔 안더레흐트는 일주일 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로 날아가 네프치 바쿠와의 2차전을 가졌다.

2차전에서는 1차전에서의 폭발적인 공격력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다행히 3차 예선 진출에 성공하기는 했다.

하지만 한 수 아래의 네프치 바쿠에게 0-1로 패배했다는 것은 팬들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고, 자존심이 구겨질 수밖에 말았다.

1차전에서 들고 나왔던 전술이 아닌 지난 시즌에 활용했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는 4-3-3 포메이션을 가동했는데, 4-3-3 포메이션의 약점만을 보여주면서 졸전을 펼친 것이었다.

지난 시즌까지는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빌헬름슨과 음펜자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었던 반더헤그와 제터베리의 노쇠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4-3-3 전술에서 양쪽 측면 윙어들이 공격적 성향이 강하면 자연적으로 나머지 선수들의 수비적 부담이 증가했다.

여기서 1차적으로 윙어들의 빈자리를 채워주어야 하는 미드필더 두 명이 지난 시즌에 비해 활동량이 적어지면서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머지 한 명의 미드필더인 바슈쥬는 애초에 수비력이 없는 선수여서 급격히 늘어난 수비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장점인 공격에서도 그다지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

“이거, 네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개막전 선발이라니? 개막전에 선발로 나서는 선수는 별다른 일 없으면 선발 출장 경기가 20경기는 가볍게 넘어갈 텐데 말이야.”

콤파니가 장난기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성배에게 말했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개막전 선발로 뽑히니까 기분은 좋네.”

네프치 바쿠에게 자존심을 구기며 패배하는 과정에서 성배와 레프트백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데샤흐트의 플레이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4-3-3의 특성상 양쪽 윙어들에게 직선적인 움직임보다는 중앙으로의 움직임을 보다 많이 요구했고, 어쩔 수 없이 측면이 비기 때문에 그 자리를 채워줄 풀백들의 공격력이 상당히 중요했다.

그리고 그런 전술을 활용하면서 데샤흐트를 쓰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물론, 애초부터 데샤흐트에게 측면 공격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고, 수비를 해달라는 뜻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아 데샤흐트에게도 공격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데샤흐트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성배라는 공격력이 뛰어난 대체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주전 자리를 확보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 덕에 성배가 반 발자국 정도 미세하게 앞서며 개막전 선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지. 오늘도 화끈하게 이겨보자고. 이번 시즌에는 우승해야지?”

“우승이라...”

전생에서 16년이나 프로 축구 선수로 활약한 성배였지만, 우승 트로피는 단 한 개도 가져보지 못했었다.

로얄 앤트워프는 2부 리그에서도 강팀이라고 볼 수 없는 클럽이었고,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에 승격을 달성했을 때도 시즌 종합 5위에 그쳤다.

승격은 어디까지나 벨기에 리그의 특수성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이 내 선수생활 커리어를 통틀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빅 리그의 우승팀 경쟁은 매년 비슷한 클럽들끼리의 경쟁이 되고, 깜짝 돌풍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하는 클럽이 나오기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스페인의 양대 강자, EPL의 4-5개 클럽,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 정도가 아니면 우승을 노려보는 것 자체도 어려워질 것이었다.

성배는 자신이 그런 클럽에서 활약하기 쉽지 않을 거라 자평했다.

그렇다면, 자타가 공인하는 주필러 리그의 최강자, 안더레흐트 소속으로 활약할 때가 커리어의 마지막 우승 기회일지도 몰랐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이번 시즌 종료 후 여름 이적시장이나 다음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의 이적을 계획하고 있는 성배였기 때문에 안더레흐트에서 우승을 노려볼 기회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래. 우승이다. 다른 것도 다 좋지만, 이번 시즌에는 우승을 제일목표로 한 번 달려보자.’

제한된 선발출장 기회를 잡아 20경기 정도에 나서서 항상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이고 자신의 멀티 플레이어 소화 능력을 어필한다.

이런 계획들도 다 좋았고 폐기할 생각도 없지만, 우선순위를 한 단계씩 뒤로 조정했다.

최우선 순위는 우승.

자신의 몸에 탈이 날 정도로 모든 걸 바쳐 뛰는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도 내에서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해 뛰는 것이 성배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

안더레흐트의 개막전 상대는 RAA 라 루비에르.

스탕다르 리에쥬나 클럽 브뤼헤, 겐트처럼 안더레흐트의 우승을 위협할 수 있는 클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상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강팀이었다.

그러나 지난 시즌 7위를 차지한 뒤, 주력 선수들을 모두 잃었고 이적시장에서 전력 보강에 처참히 실패해 하위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뭐야, 간단하네.’

라 루비에르의 오른쪽 윙어, 마티유 메이튼의 돌파는 성배에게 간단히 가로막혔다.

메이튼의 몸에 자신의 몸이 가려진 순간, 성배는 어깨 싸움을 펼치는 척하면서 오른손으로 유니폼을 살짝 잡아당겼고, 이미 밸런스가 불안했던 메이튼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주심과 부심 모두 정당한 어깨 싸움으로 간주했고, 성배는 쉽게 볼을 따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오늘 경기, 별로 어렵지 않겠는데?’

라 루비에르는 중앙보다 측면에 힘을 주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한 축인 오른쪽 윙어 메이튼의 기량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전력 보강에 처참히 실패했다는 것이 여기서부터 드러나고 있었고, 안더레흐트의 입장에서는 희소식이었다.

볼을 빼낸 성배는 중앙의 콤파니에게 볼을 내주고 천천히 올라갔다.

자신들의 공격이 펼쳐질 때는 미드필드 라인까지 올라가서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풀백의 역할이었고, 특히나 나이가 들면서 탈압박 능력이 떨어진 안더레흐트의 미드필더들에게는 이런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거기다가 주면 안 되지. 너무 압박이 심하잖아.’

콤파니에게 볼을 건네받은 반더헤그는 전방에서 빠르게 내려오며 볼을 요구하는 구어에게 패스했다.

하지만 이미 출발하는 순간부터 상대 수비수들에게 들켜버린 구어는 두 명의 수비수에게 압박을 받고 있었고, 첫 번째 볼 터치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겨우겨우 볼을 빼앗기지 않고 다시 콤파니에게 넘겨주었지만, 상대 수비수들에게 정돈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말았다.

‘역시. 괜히 나중에 세계 최고가 되는 게 아니네.’

구어가 넘겨준 볼은 굉장히 불친절해서 볼을 잡자마자 상대 공격수에게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콤파니는 그를 간단히 따돌린 뒤 타이히넨에게 볼을 넘겼다.

양쪽 풀백이 이미 미드필드 라인까지 올라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패스할 곳이 없었던 타이히넨은 볼을 띄워서 왼쪽 측면의 성배에게 넘겨주었다.

“리턴!!”

타이히넨의 패스를 쫓아간 성배는 가볍게 살짝 뛰어서 논스톱 힐패스로 제터베리에게 볼을 넘겨주었다.

힐패스가 제터베리를 향해 정확히 이어진 것을 확인한 뒤, 성배는 곧바로 전방을 향해 뛰었고, 경합에서 패배한 메이튼은 뒤늦게 출발해 성배를 뒤에서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 공간이 생긴 것을 발견하자마자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 성배를 노련한 제터베리가 놓칠 리 없었고, 논스톱으로 다시 볼을 밀어주었다.

‘어딜!!’

성배의 논스톱 패스를 받은 제터베리에게 압박을 가하던 상대 선수는 다시 볼을 건네받은 성배를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자신이 뚫리면 측면이 완전히 비어버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태클을 시도했지만, 이를 예상했던 성배는 앞으로 강하게 차 볼을 먼저 통과시킨 뒤, 태클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런 치고 달리기가 가능하다니... 무릎 부상의 타격이 굉장히 크긴 컸구나.'

전형적인 치고 달리기로 상대 풀백을 벗겨낸 성배는 빠르게 내달렸다.

풀백이 뚫려버린 이상, 성배의 돌파를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수비 상황에서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미드필드 라인까지 올라왔던 상대 풀백 브레이의 실수라고 볼 수 있었다.

사실 그 전에 제터베리를 너무 자유롭게 놔두었던 미드필더진의 포지셔닝에도 실수가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측면을 내주게 되면 풀백에게 그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뻥!

‘제대로 감겼다. 바보가 아니면 넣겠지.’

텅 비어있는 측면을 파죽지세의 기세로 달리던 성배는 왼발로 낮고 빠른 크로스를 감아서 올려주었다.

투톱으로 나선 두 선수 모두 170cm대 중반의 신장을 가진 크지 않은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높게 띄워주는 것보다는 앞쪽으로 빠르게 올려주는 크로스가 더 위협적일 것이라 판단했고, 크로스의 질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안더레흐트의 투톱, 음펜자와 아쿤은 발이 느린 라 루비에르 센터백들 사이로 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주!! 주!! 넣었어!! 넣었다고!!”

“하하, 축하해. 개막전부터 골도 넣고, 좋겠네.”

자신의 계산보다 아주 살짝 앞으로 나간 크로스가 불안했지만, 몸을 날려 머리를 가져다 댄 음펜자의 다이빙 헤더 덕분에 선취 골로 이어질 수 있었다.

지난 네프치와의 경기에서 한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것에 이어서 이번 개막전에서도 어시스트 한 개를 추가한 성배는 두 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기록, 기분 좋게 시즌을 시작하고 있었다.

“역시, 나는 너랑 잘 맞는 것 같아. 크로스 아주 죽였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크로스가 좋았지.”

지난 시즌, 왼쪽 윙어로 출전했던 음펜자가 살아난 것은 중앙으로 움직이는 자신을 대신해 측면 공격을 맡아주었던 성배가 데뷔한 이후였다.

이번 시즌 왼쪽 윙어로 출전하고 있는 구어는 물론이고 스트라이커 자리를 차지한 음펜자마저도 성배와 함께할 때 위력이 배가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주전 경쟁에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앞으로도 자주 좀 나오라고.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누가 더 편한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공격하는 처지에서 말하면 올리비에보다 네가 나올 때 기회가 더 많아지니까.”

“하하, 그런 건 감독님에게 말해달라고. 나한테 말해봤자.”

수비력이 뛰어난 데샤흐트가 나오는 것이 수비수들에게는 더 반가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격수들은 성배가 주전 경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격력이 더 뛰어난 성배가 주전으로 출전해야 공격수들이 골을 넣거나 좋은 모습을 보일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리하게 공간을 파고드는 성배의 플레이는 다른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매 경기 골을 넣을 수는 없지만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면 감독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에 공격수들은 데샤흐트와 경쟁을 펼치는 성배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 낭만필드 - 042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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