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24 >
“흐엥... 오빠 진짜 가는 거야? 안 가면 안 돼?”
“아이고, 우리 유빈이 또 우네? 유빈이가 이렇게 자꾸 울면 안 되는데... 유빈이가 계속 이렇게 울면 아빠랑 오빠가 마음 놓고 갈 수 있겠어?”
“응? 아빠는 끌어들이지 마. 나는 괜찮으니까. 내가 가서 우는 것도 아니잖아?”
“여보!!”
“아... 말이 헛나왔네. 여보, 신경 쓰지 마.”
다음 날, 성배의 가족은 모두 함께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이제 아버지와 자신은 벨기에로 떠나게 될 것이었고, 어머니와 유빈이는 한국에 남을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빠를 응원한다던 유빈이는 결국 이별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열두 살의 어린 아이에게 이별의 아픔을 감당해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성배는 그저 토닥여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유빈아. 어제 오빠랑 약속했지? 나는 벨기에에서 열심히 축구하고, 너는 한국에서 열심히 그림 그리기로 했잖아.”
“훌쩍... 응... 그랬어.”
“다음에 내가 귀국하면 너 그림부터 그려보게 할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다시 가버려야지.”
“이잇!! 그런 게 어딨어어!! 흐끅! 시험, 흐끅! 싫어!!”
미운 네 살도 키워봤던 성배였다.
네 살 짜리 아이에 비해 열두 살짜리 아이는 성인이나 다름없었다.
최소한 덮어놓고 떼를 쓰지는 않았기 때문에 차분하게 이야기하면 거의 통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엄마 말씀 잘 듣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면서 있어. 그러면 오빠가 와서 맛있는 거 또 해줄 테니까.”
“...응. 알았어. 오빠도 가서 축구 열심히 해. 최고로 잘 하기 전에는 오지 마!! 어... 아니, 아니야. 최고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돼.,,”
성배가 했던 것처럼 한 번 으름장을 놓고 싶었던 것인지 강하게 나가봤던 유빈이는 곧 꼬리를 말고 자신이 한 말을 부정했다.
생각해보니까 역시 오빠가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는 것보다는 자신과 함께 놀아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괜히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정말로 최고가 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까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유빈이도 보고 싶고, 어머니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올 수가 있어? 시간 날 때마다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놀고 있어.”
“알았어... 자주 와야 돼? 알았지?”
“그럼!! 약속할까? 손가락 걸고?”
이제 울음을 그친 유빈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어왔다.
왼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유빈이는 정말 귀여웠다.
함께 나이를 먹었던 서른두 살의 유빈이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열두 살의 동생이 훨씬 더 귀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크흠... 우리도 저거 할까?”
“어머, 좋죠. 뭘로 할 건데요? 바람 피면 접시에 코를 박고 이 세상을 떠나겠다, 뭐 이런 걸로 할까요?”
“저, 저기... 여보? 여보?”
이별의 순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대화였지만, 이것이 부모님의 이별 방식이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처음으로 해외 공간에 발령을 받아서 떠날 때도 이런 식으로 이별했다고 들었다.
어린 성배와 아주 어린 유빈이를 두고 떠나는 아버지와 두 어린 아이를 혼자서 키워야 하는 어머니는 그 때도 이렇게 장난을 쳤다고 했다.
‘그 뒤에 혼자 우셨다고도 하셨지만...’
어머니도 마음이 좋지 않으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첫 해외 공관 발령 때도 외교관이 되어 교육을 마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업무를 맡은 좋은 날이었고, 이번에도 남들보다 일찍 2등 서기관으로 승진해 나가는 좋은 날이었지만 부부가 몇 년을 떨어져야 하는데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서로가 보는 앞에서는 슬픈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어머니, 그럼 이제 그만 가볼게요. 이러다가 비행기 놓치겠어요.”
“그래, 가봐야지. 여보도 빨리 들어가요. 비행기 놓치면 시말서로 안 끝날 걸요?”
“알았어. 그럼 가볼게. 도착하면 전화할게. 들어가서 쉬어.”
이별은 참 힘들었다.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발이 참 떨어져주지 않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을 힘들게 움직이면서 성배와 아버지, 어머니와 유빈이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응? 왜 불러?”
“저 꼭 성공할 거예요. 그것도 엄청.”
“그래, 그것도 좋겠지.”
16년 만에 되찾은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을 자신의 의지로 박차고 나선 길이었다.
최소한 그 시간들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아니 무조건 그 이상의 것을 얻어내야만 하는 길이었다.
아버지도 굳이 성공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는 길을 전폭적으로 밀어주실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부모님과 유빈이를 가슴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었고, 나름대로 자신도 있었다.
“으아아아... 아버지, 이거 엄청 힘드네요. 차라리 하루종일 훈련을 하는 게 낫겠어요.”
“삶의 터전을 바꾸는 일인데 당연히 힘들지. 이사라는 거, 아무리 세상이 좋아져서 알아서 짐을 다 날라준다고 해도 절대로 쉬운 거 아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에휴...”
나라에서 외교관에게 내어주는 관저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남자 두 명이 사는 집으로 방 두 개 딸린 18평짜리 집은 차고도 넘칠 만큼 좋았다.
게다가 공관이 있는 브뤼셀은 벨기에의 수도이면서 유럽의 수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도시 자체도 굉장히 잘 만들어져 있었다.
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어 공부는 많이 했지? 내일부터는 당장 어학원에 다녀야 하니까 미리미리 쉬어둬라. 피곤할 텐데.”
“뭐... 어찌어찌 대화는 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뭐, 괜찮아요.”
9월에 시작해서 6월에 끝나는 일정으로 학교가 돌아가는 벨기에였기 때문에 성배는 9월까지 어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내년 9월에 만 12세부터 18세까지 다니는 Secondary School 5학년으로 편입하게 될 것이었다.
벨기에는 18세까지는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었는데, 한국은 중학교까지가 의무 교육이었기 때문에 성배는 굳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벨기에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좋았고, 유럽 클럽들은 유스 평가 기준에 일정 수준 이상의 학업 성적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교는 다니기로 했다.
“입단 테스트는 언제 보러 갈 거니? 언제 있어?”
“며칠 뒤에 있어요. 테스트 비용이 엄청 비싼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내야 하는 거니까 한 번에 붙어야죠. 붙을 자신도 있고요.”
불안한 부분은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붙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사실 공동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한 지난 유로 2000에서 최악의 부진을 겪은 벨기에 축구는 위기에 빠져있었다.
성인 대표팀은 물론, 청소년 대표팀의 FIFA 랭킹도 겨우 30위권에 불과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벨기에가 선택한 것은 유스 시스템의 개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3년 정도 뒤부터 시행되었고, 현재는 아직 과도기적인 시기였다.
벨기에 유스도 성적을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시기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나는 유스 팀들이 노릴 수밖에 없는 선수야. 무조건 뽑힌다.’
2006년의 개혁 이후로 벨기에는 협회 차원에서 유스팀들의 승리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에 주력했다.
2003년의 벨기에 유스 클럽은 선수를 키우기보다 승리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것이 벨기에의 축구를 망치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의 벨기에 유스 클럽들은 대한민국보다는 훨씬 낫지만 어쨌든 승리에 집중하고 있었고, 성배는 잠재력은 몰라도 당장의 승리를 따내기 위해서는 완벽한 선수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유스 지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6가지 요소, 즉, 위닝 멘탈리티, 성격, 정서적 안정성, 현명한 의사결정, 가속의 폭발력, 신체 지배력 중 성배는 가속의 폭발력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아직 성장기인 유스 선수들을 평가할 때, 피지컬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성배에게 행운이었다.
위닝 멘탈리티와 현명한 의사결정 부분에서는 성배보다 나은 선수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었다.
성격은 서른여섯의 삶을 살았던 성배가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신체 지배력은 피지컬과 달리 자신의 몸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를 뜻했기 때문에 이것도 자신이 있었다.
“아마 나는 바빠서 못 갈 것 같은데...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지?”
“그럼요. 겨우 입단 테스트인데 거창하게 무슨 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요. 나중에 제 프로 무대 데뷔전 때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그래, 그럼 나는 너만 믿고 있으면 되는 거네.”
여섯 개의 중요 평가 요소 중에 네 개에서 탑을 찍는데 유스 따위에서 떨어질 리 없었다.
어쨌든 현재의 벨기에 축구는 분명 위기였고, 자신의 기억 속에서도 90년대 생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황금세대라고 불리기 전까지는 벨기에에서 특별한 선수들은 많이 나오지 않았었다.
자신 정도의 유망주라면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간다, 안더레흐트!!”
“그래, 그래. 힘내라. 알았으니까 소리는 그만 지르고 이사나 좀 도와.”
이제 정말로 벨기에에 왔고, 새로운 인생의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는다는 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는 성배였다.
과거, 자신의 꿈의 구단이었던 안더레흐트가 이번 생에서는 고작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이 되었다는 것은 성배를 더없이 기쁘게, 더없이 설레게 만들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과거가 어땠는지는 이제 다 잊고 진짜 내 목표를 보고 달려야 돼. 벌써부터 기뻐하고 설레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과거를 잊으려고 했지, 과거의 비참함까지 잊으려고 하지는 않았어.’
안더레흐트에서 큰 기대를 받고 성장한 선수들 중에서 빅 클럽의 주전으로 자리 잡은 선수들은 몇 명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90년대 이전에 출생한 선수들 중에서는 몇 명 없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유스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것은 안더레흐트가 아니라 KRC 겡크였다.
안더레흐트 1군에 주전으로 합류할 수 있다면 그 때는 벨기에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전까지는 최고의 코스를 밟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만족할 때가 아니었다.
< 낭만필드 - 02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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