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22 >
“오늘이 마지막 훈련인 거지?”
“네. 내일이면 출국이니까요.”
2주라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그리고 그 2주를 치열하게 살았던 성배에게는 더욱 짧게 느껴졌다.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주제에 유영민이라는 좋은 코치를 만났고, 개인 코치를 두고 일대일로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대충 흘려보낼 성배가 아니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과거의 감각을 상당 부분 되찾은 상태였다.
“그동안 정말 수고했다. 너처럼 어린 나이에 이렇게 치열하게 살기 힘들 텐데 말이지. 지금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태도 덕분에 분명히 거기서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열심히만 한다고 성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코치님도 아시잖아요. 이 바닥에서 재능이라는 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야, 인마. 정말 평범한 애들이 보면 너도 재능덩어리야. 이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 애들이 흔한 줄 알아?”
유영민은 2주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성배에게 반해버렸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성배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던 유영민이지만 가끔 휴식의 개념으로 일대일 대결을 할 때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성배의 노련한 수비에 깜짝 놀란 적이 많았다.
11 : 11의 경기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성배의 진정한 장점을 보지 못했어도 성배의 축구 지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본기나 스피드, 킥의 정확도나 파워도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 실력도 대단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처음 봤을 때에 비해서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그 성장 속도가 더욱 대단했다.
그런 유영민에게는 성배의 말이 그저 겸손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코치님도 아시잖아요. 제 비교 대상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아니에요. 제 또래 친구들도 아니고요. 지금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1군 선수들. 그들이 제 경쟁자라고요. 아직 턱없이 부족해요.”
하지만 성배는 당연히 만족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과거에 밟았던 길이었다.
요령을 알고 있고 직접 경험해본 기억이 있으니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그러나 전생의 수준까지 기량을 끌어올리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처음 밟아보는 단계였고, 지금처럼 빠른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전생에 없었던 스피드를 찾았다는 부분에서는 분명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새로운 목표인 빅 클럽 진출을 이뤄내기에 부족했다.
빅 리그로 나간다면 하위권 클럽, 프랑스나 포르투갈과 같이 살짝 아쉬운 리그에서는 중상위권 클럽 주전 레프트백.
그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어마어마한 기회를 얻은 성배가 그 정도로 만족할 리 없었다.
게다가 몸싸움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어졌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부상을 당했던 과거는 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트라우마는 정신적인 문제이고, 그 기억은 아직 성배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만큼 예상컨대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었다.
아무리 풀백이라도 수비수에게 피지컬은 분명 중요한 요소였고, 그렇기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주자면... 너무 급하게 가려고 하지 마라. 너는 아직 한창 성장할 나이고, 고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아이라고. 유소년의 실력이 부족한 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부족함을 알면 정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죠. 옛 성현들께서.”
“에휴... 한 마디를 안 져요. 알았다, 인마. 너 알아서 해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다가 아니야. 오히려 적절히 끊고 쉬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훈련 방법이니까.”
“아시잖아요. 적절하게 잘 컨트롤하고 있다는 거.”
“그러게... 그게 신기하다는 말이지. 네 나이 때는 훈련에 목숨을 걸지 않거나 완전히 목숨을 걸거나 둘 중 하나이고, 프로가 되어도 그 중심을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너는 목숨을 거는 것 같으면서도 쉬어야 할 때는 철저하게 쉬어주니까. 무슨 프로에서 10년은 넘게 구른 베테랑을 보는 것 같단 말이야.”
프로 무대에서 구를 만큼 구르다가 결국 다 닳아 없어지기까지 했을 정도의 베테랑이 바로 성배였다.
조급하게 생각하고 급하게 달리면서 몸에 무리를 주는 미련한 짓을 할 리 없었다.
물론 급한 것은 맞았다.
지금 같은 나이의 그 어떤 선수도 성배보다 급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브라질 뒷골목에서 맨발로 공을 차며 인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아프리카의 내전 속에서 꿈을 키우며 언젠가는 탈출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도, 이민자 출신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사는 가정의 사람도. 그 어떤 사람도 지금의 자신보다 절박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비참한 현실에 놓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비참하게 실패한 인생을 겪고 다시 돌아와 기회를 얻은 사람의 절박함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조급해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써 조절하고 있었고, 다행히 정신이 무너지지 않아 조절이 가능했다.
“정말로 감사했어요. 코치님이 아니었으면 혼자서 트래핑이나 하는 것이 전부였을 거예요. 코치님 아니면 제가 이 나이에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 무슨 수로 개인 코치를 두고 일대일로 훈련을 했겠어요. 정말 큰 도움을 받았네요. 감사합니다.”
“무슨. 나야말로 너같이 재능 있는 선수를 지도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지. 막말로, 이제 겨우 지도자 생활 3년 차에 선수 시절 유명한 선수도 아니었던 내가 너같이 재능 있는 선수를 언제 또 보겠냐. 이거 앞으로 지도자 길이 막히는 거 아냐? 다른 애들 전부 다 너랑 비교하게 될 텐데...”
“하하하, 겨우 열일곱 살짜리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코치님 진짜 유능한 것 같아요. 코치님도 보셨죠? 지난 2주 동안 제가 얼마나 빨리 늘었는지.”
분명 이 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된 시간이었다.
코치와의 일대일 훈련은 2주의 시간을 거의 통으로 날릴 뻔했던 성배에게 황금과도 같은 기회였고, 지도자 생활을 잠시 쉬면서 코치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영민에게도 감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하나 자신의 방식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다만, 조금 더 절박했던 성배가 조금 더 많이 고마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그게 내 덕분이냐. 네가 워낙에 자질이 뛰어났던 거지. 퍼거슨 감독을 데려와도 너처럼 빠른 성장을 이끌어내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고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죠. 코치님, 자신감을 가져요. 선수경력이랑 지도자경력은 전혀 상관없다고요. 진짜 유명 감독들 중에 유명선수 출신은 얼마 안 돼요.”
유영민 코치는 이제 성배에게 내 사람이 되었다.
적절히 이용해먹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주절주절 많은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이번 인생을 살아가는 성배의 방식이 그랬다.
남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겠다는 것.
그 방식에 따르면 성배가 이 정도로 살갑게 대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내 사람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벌써 3년 차인데 너무 시작이 늦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휴우...”
“어디 제의 들어온 곳은 없어요?”
“있어. 며칠 전에 들어왔지. 안 그래도 더 늦으면 올해를 통으로 날려야 할 것 같아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중이야.”
아무리 아마추어 학교 축구부라고 하지만 시즌 중반에 코치를 영입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기본적으로 계약 단위가 년 단위였고, 프로 팀들과 마찬가지로 시즌이 치러지는 중간에 코치를 영입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영민도 더 이상은 재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무슨 학교인데요?”
“음... 아마 너도 알 걸? 작년 전국대회에서 우리 학교한테 이기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 탈락한 수원 이매중. 거기야.”
“꽤 강팀으로 가네요? 적어도 전국 대회 16강 정도로 평가받는 학교잖아요?”
“그렇지. 아무래도 청주 내에서 다른 학교를 알아보는 것보다는 수원에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강팀으로 가는 게 내 커리어를 위해서 좋을 것 같으니까.”
“분명히 거기서 잘 될 거예요. 제가 장담할게요.”
“뭐? 네가 뭘 안다고 장담을 해. 잘 됐으면 좋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유영민이었지만, 성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성배의 기억 속에서 유영민은 수원의 이매중학교 코치로 갔다가 2년 뒤 한국의 2부 리그인 N리그의 수원시청의 코치로 영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K리그 수원 유나이티드의 2군 코치로 영입되었는데, 나이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경력이었다.
“에이, 어쨌든 믿어 봐요.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데,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뭐... 그건 그래. 그러면 네 말 믿고 희망차게 한 번 시작해보지, 뭐. 나중에 너는 성공하고 나는 실패하면 대신 네가 나 책임져라.”
“... 아니에요. 코치님은 망할 거예요. 아주 폭삭. 조기 축구회라도 가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야... 알았다. 알았어. 나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까 그런 말은 하지도 마라. 아주 소름이 다 끼친다.”
“아니에요, 코치님은 분명 성공할 거예요.”
“...하지 말아줄래?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부탁이야.”
지난 2주의 시간동안 두 사람은 상당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성배의 중학교 시절에도 두 사람은 나름 친분을 쌓았었지만, 일대일로 시간을 보낸 적도, 보낼 이유도 없는 정도, 딱 코치와 선수의 관계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성배에게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일대일로 2주의 시간을 보내고, 서로가 필요한 시점에 딱 만나 서로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서 두 사람은 확실히 친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서로가 서로의 성격과 실력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빠르게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코치님도 수원에 가서 꼭 성공하세요. 거기 애들한테도 잘 해주시고요.”
“그래. 가끔 연락하고. 잘 가라. 너는 분명 성공할 거야. 나도 스포츠 신문 1면에서 내 제자 얼굴도 보고 좀 그래보자.”
“꼭 그렇게 해드릴게요. 2주 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건강하시고요.”
“나도다. 그럼 잘 가고, 건강해라.”
오늘 훈련을 끝으로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끝냈다.
아직 불안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충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2주였다.
최소한 이 2주일이라는 시간에 후회는 남기지 않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벨기에에서 맞부딪힐 시간이었다.
< 낭만필드 - 02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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