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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4화 (245/356)

< 낭만필드 - 014 >

“으, 으으... 으으으...”

열여섯 살이던 시절, 그러니까 로얄 앤트워프 입단도, 자스민과의 만남도, 그리고 딸인 엘리자베스의 탄생과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이었지만, 성배의 기억 속에서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성배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현실을 현실이라 받아들인 이후부터 자스민과 엘리자베스가 성배의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때 축구와 로얄 앤트워프를 뒤로 밀어내고 자신의 모든 것이 되었던 두 여자를 잊을 수 없었다. 슬픈 과거는 잊고 다시 새로운 세상에서 행복한 미래를 다시 써나가기로 결정한 순간, 마치 자신을 어떻게 잊을 수 있냐며 성배를 비난하듯, 두 여자가 꿈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 아... 아악!!”

결국 성배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라는 것이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존재하는데, 가장 유력한 이론이 있을 뿐, ‘그래, 이거다!!’ 할 만한 것은 아직 없었다. 가장 유력한 주장은 자는 도중에 뇌에서 기억이나 정보를 무작위로 자동 재생한다는 것인데, 무작위라면 최근 들어서 갑자기 늘어난 그녀들의 출현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마치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주 찾아오고 있는 그녀들. 반갑기도 했지만 그녀들로 인해 성배도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젠장...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내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게 아니라고...”

꿈속에서 그녀들을 볼 때마다 성배의 가슴은 찢어졌다. 자신에게 없었던 사람처럼 되어버린 그녀들도 슬프겠지만, 자스민의 기억에서 완전히 없는 사람이 되고, 태어나지도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태어나지 않을 아이가 된 엘리자베스로 인해 성배가 겪는 아픔은 그것보다 훨씬 더 컸다. 두 사람은 떠올리며 아파할 기억 자체가 사라진 것이지만, 성배는 앞으로도 계속, 얼마가 될지 모르는 오랜 기간 동안 이 기억을 붙잡고 살아야만 했다.

“너희는 이제... 나의 기억이 아예 없어졌잖아... 왜 자꾸 나타나는 거야... 나 혼자 이 기억을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힘든데... 너희까지 왜 그러는 거야...”

결국 성배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돌아온 이후,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애써 두 사람에 대한 기억도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이 회귀했음을 인정하고 다시 돌아온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두 사람의 기억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성배를 괴롭혔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잊는 것도 성배에게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지만, 두 사람의 기억이 계속 떠오르는 것도 지금의 성배에게는 못지않은 고통이었다. 결국 다시 잠들지 못한 성배는 침대에 누워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곱씹으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뻥!! 뻥!! 뻥!!

“어? 뭐야? 저 새끼, 저거... 주성배 아냐?”

“응? 그 개념 없는 새끼? 에이, 설마...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우리한테 말도 없이 훈련용품 꺼내서 쓰고 있으려고?”

부모님에게 사실상 벨기에 유학을 허락받은 성배는 이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거칠 것이 없었지만 이제 최소한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에 나온 성배는 교무실에서 축구부실 열쇠를 가져왔고, 공들을 전부 꺼내놓고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음... 일단 킥력 부족, 체력 부족, 킥 정확도 부족, 피지컬 부족, 발끝 감각 부족, 거기다가 신장도 크지 않고... 뭐,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네.’

지난 며칠 동안 파악한 자신의 약점들이었다. 물론, 성배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프로 기준이었기 때문에 동년배와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부분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킥력이나 체력, 킥의 정확도는 동년배의 유럽 선수들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이후에도 이 부분들에서는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성배였기 때문에 부상도 당하기 전인 지금 상황에서 나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근력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만 빼면 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피지컬이랑 개인 기술인데... 신장이야, 뭐...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미 20년을 살아본 입장에서 성배는 자신의 약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성배의 피지컬은 정말이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벨기에 리그가 유럽 리그 중에서도 몸싸움을 기피하는 리그로 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배는 그 곳에서도 누구 한 명 피지컬로 이기는 경우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형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로 몸싸움을 무서워하기까지 했으니 성배는 피지컬로 인해 선수생활 내내 발목을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몸싸움에 대한 부담이 덜한 풀백이라고 하더라도 몸싸움 자체가 되지 않는 수비수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인 기술의 투박함 역시 성배가 가지고 있는 큰 단점이었다. 한국 엘리트 축구의 병폐이기도 한 이기기 위한 축구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개인기를 활용하면 감독과 코치들, 선배들에게 기합을 받았다. 그 결과, 패스와 공간을 향한 움직임 등 전술적인 움직임만을 익혔고, 프로 데뷔 후에는 개인기가 되지 않으니 패스를 위한 공간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개인 기술은 개인 돌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플레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으로 갖출 필요가 있는데, 한국 유소년 지도자들은 이를 너무 소홀히 하는 면이 있었다.

‘당장 중요한 건 개인기술을 익히는 거야. 발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볼을 섬세하게 다루는 연습을 해야 돼. 피지컬은... 아직 때가 아니야.’

아직 한참 자라고 있는 몸이었다. 지금부터 피지컬을 키우겠다고 웨이트에 집중하면 나중에 성장했을 때, 신체의 밸런스가 깨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한, 그 신빙성에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웨이트에 집중해 근육을 키울 경우에는 신장 발육에 문제가 생긴다는 연구도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너무 일찍부터 근육을 키우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몸이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따라 선수 성장의 방향도 바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벌크 업에 열중하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또, 전문가의 도움도 받지 않고 실행하는 웨이트 트레이닝은 축구 선수에게 독과 같았다. 피지컬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스피드가 훨씬 더 중요한 포지션의 선수들에게는 특히나 더 그랬다. 벌크 업은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다. 벌크 업을 하면서 스피드를 잃어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치고 달리기로 유명했지만 벌크 업 이후 장점을 잃어 한참을 헤맸던 가레스 베일의 예를 들 것도 없었다.

결국 지금 당장 가장 시급한 일은 개인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부분들은 당장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욕심을 살짝 줄이고 동년배 선수들과 비교하면 크게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개인기술, 즉 테크닉은 동년배의 유럽 유망주들과 비교하면 중간도 가지 못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당장 오늘부터라도 보강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야!! 너 미쳤냐? 우리들이 말한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정신병자야? 아니면 머리가 좀 모자라? 장애야?”

“아...”

자신의 약점과 당장 필요한 그 극복방안들에 대해서 고민하던 성배는 옆에서 자신에게 언제나처럼 욕을 퍼부으며 등장한 선배들로 인해 생각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이런저런 방법들을 생각하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아쉬웠다. 어차피 며칠만 더 지나면 안 볼 사람인 선배들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와, 진짜 이 새끼만 만나면 울화통이 터진다. 너 그것도 재주야!! 어떻게 볼 때마다 이렇게 빡치게 만드냐?”

“예. 죄송합니다.”

이제는 미래가 된 과거에서의 성배는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로얄 앤트워프를 거치면서 성배를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성배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싫어하지도 않았다. 한 팀에 16년간 충성을 바쳤고, 마지막까지 의리를 다했던 성배는 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의리와 신의로 대했다. 당연히 싫어할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의 마지막에 결국 단장과 감독으로부터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성배는 아직 사람을 대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그 대상이 며칠 뒤에는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선배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점점 더 미움을 사고 있는 성배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하아... 지금은 바쁘니까 그냥 간다. 너 오늘 점심 먹고 바로 축구부실로 와라.”

“예.”

“아오, 빡쳐!! 예, 예. 너는 예, 말고 할 줄 아는 말이 없냐? 무슨 말이라도 붙여 봐!! 무슨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잖아!! 씨발, 네가 심심이냐? 맨날 똑같은 말이야!! 매크로냐고!!”

“죄송합니다.”

“으아아악!!!!!”

선배가 옆에서 지랄발광을 해도 성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충 선배의 용건이 끝난 것 같아 선배들이 오기 전에 했던 고민을 다시 시작할 뿐이었다. 성배의 이런 반응에 선배들은 제대로 열이 받았는지, 한참동안 욕설을 내뱉다가 교실로 올라갔지만, 성배에게는 전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일 뿐이었다.

< 낭만필드 - 014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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