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011 >
“쟤... 뭐냐? 스트라이커라며?”
“그러게요? 지금 제가 뭘 보고 있는 걸까요?”
연습시합을 지켜보고 있는 영원고등학교의 감독과 코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예상하지 못했던 선수의 활약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추운 날씨, 군데군데 얼어있는 운동장의 환경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런 수준으로는 단 한 선수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뭐야!! 지금 타이밍 죽이잖아!!”
“저거 진짜로 공격수 맞습니까? 지금 오버래핑 타이밍하며, 태클 타이밍하며 모자란 부분이 없는데요? 완전 정통 풀백인데요?”
왼쪽 풀백으로 경기에 나선 성배가 감독과 코치들을 놀라게 한 주인공이었다.
공격수 출신으로 알고 있었고,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훈련에서 공격수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성배였는데, 왼발잡이라는 이유로 그저 포지션을 맞추기 위해 출전시켰을 뿐인 왼쪽 풀백 자리에서 그야말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풀백이 경기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2부 리그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프로 선수로 16년을 뛰었던 성배였다.
그 중 풀백으로 활약한 시간은 절반인 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2부 리그의 최정상급, 1부 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던 성배가 고작 고등학생들 연습경기도 지배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음... 이 정도 스피드로 달려보는 건 오랜만이군.’
지금의 성배는 무릎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 전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스피드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래도 손에 꼽힐만한 스피드를 가지고 있는 선수였기 때문에 현재 상대편에서는 성배의 스피드를 따라올 수 있는 선수가 많지 않았다.
‘에이, 확실히 스킬들은 고등학교 때 수준이구나.’
하지만 좋아진 부분이 있으면 당연히 나빠진 부분도 있었다.
선수생활에 위기를 겪게 만들었던 무릎 부상과 그로 인한 스피드 저하는 사라졌지만, 그 외에는 역시나 아직 크게 부족했다.
아무리 피지컬이 쓰레기라고 불리는 서른여섯의 노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열여섯 살의 지금보다는 피지컬, 체력, 스킬 등 모든 부분이 나았다.
지금도 서른여섯의 자신이었다면 놓치지 않았을 크로스를 저 멀리 날려버리고 말았다.
‘좋아, 좋아... 한 번 가본 길, 다시 가는 게 뭐 어렵겠어...’
일단은 프로시절 갈고 닦아왔던 풀백으로서의 플레이 방식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장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의 경험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풀백이라는 포지션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태클의 타이밍과 수비에서의 위치선정, 오버래핑의 타이밍 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출발선 자체가 이미 남들보다 세 발자국 이상은 앞에 위치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 이 기회를 이 따위로 그냥 날려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다시 내려가네...”
“와... 진짜, 싸가지 없는 새끼네. 오늘 끝나고 집합 걸었지?”
지금까지는 이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붕 떠 있었던 성배였지만, 그라운드에 다시 선 이후에는 너무 자신의 세계에 확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또 붕 떠 있었다.
성배는 자신이 원하는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자신의 몸이 서른여섯의 몸과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프로 생활이 몸에 익은 성배에게 연습시합의 가치란 그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선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나름대로 유망한 후배라고 듣기는 했지만, 최소한 오늘 경기에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공격수로 들어온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포지션도 아닌 곳에서 뛰고 있는 성배가 지금 이 연습시합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자기 혼자 잘난 것처럼 다른 팀원들과의 의사소통도 전혀 하지 않고 있으니 선배 입장에서는 아니꼬울 수 있었다.
어쨌든 전, 후반 각각 25분씩 진행된 연습시합은 2학년 팀의 2-1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 나이 대에서 1년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초반부터 2학년 팀이 강력하게 압박했던 것 치고는 팽팽한 스코어였다.
사실, 자칫했으면 1학년 팀이 이길 수도 있었을 정도로 경기 자체가 중반부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주성배!! 너 공격수 맞아? 풀백으로는 한 번도 뛰어본 적 없어?”
“예. 없습니다.”
1학년 팀이 2학년 팀과 비등한 경기를 펼쳤던 데는 성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선수들에 비해, 그리고 공격수나 미드필더에 비해 경기 자체를 자신들의 분위기로 끌고 올 수 있는 영향력 자체가 미미한 측면 수비수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배의 플레이는 팀 전체의 플레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성배가 혼자서 상대의 오른쪽 공격을 모두 막아냈고,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오버래핑을 올라가면서 반대로 자신은 상대의 오른쪽 측면을 초토화시켰다.
성배의 플레이에 1학년 팀의 왼쪽 측면 미드필더 역시 힘을 냈고, 한쪽 측면이 무너진 2학년 팀의 밸런스 자체가 크게 흔들리며 개인기량에서 확고한 우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학년 팀과 비등한 경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너, 내일부터 왼쪽 풀백으로 뛰어라.”
“예.”
감독과 코치가 눈을 부릅뜨고 열렬하게 찾아 헤맸던 풀백이 바로 이 곳에 있었다.
포백 시스템의 핵심은 강력한 풀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포백 전술에서 풀백은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이었다.
아직은 세계적으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주장이었지만, 십 년 정도 뒤에는 꽤나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카푸-카를로스의 브라질이나 리사라수-튀랑의 프랑스처럼 강력한 풀백을 가진 팀들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몇 년 만 더 지나면 풀백의 가치가 높아지게 될 것이었다.
특히, 대한민국은 쓰리백 일변도에서 이제 조금씩 포백을 사용하는 팀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풀백, 그리고 제대로 될 풀백 유망주의 가치가 점점 오르고 있었다.
별 뜻 없이 왼발잡이라는 이유만으로 레프트백 자리에 넣었던 감독은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좋아!!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들 다치지 않게 몸 풀어주고 들어가라. 이만!!”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아직 겨울이고 방학이었기 때문에 훈련은 그렇게 오래 진행되지는 않았다.
예비 입학생들이 빨래를 하느라 참가하지 못해도 신경도 안 쓰는 간단한 기본기 훈련 이후에 연습시합, 그리고 훈련 종료.
선수들에게 인사를 받고 감독과 코치가 퇴장하자, 2학년 선배들이 왕이 되었다.
“야, 예비!! 엎드려뻗쳐!!”
훈련이 시작되기 전부터 예고했던 대로 얼차려의 시간이 되었다.
새롭게 주장이 된 2학년의 구심점, 진현필을 중심으로 2학년들이 앞에 서고, 그 옆으로 1학년들이 예비 입학생들을 둘러싸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예비 입학생들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렸다.
< 낭만필드 - 01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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