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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0화 (10/356)

< 낭만필드 - 010 >

“이 새끼야!! 빨래가 이게 뭐야!! 이게 빨래라고 한 거냐? 이게 돌았나...”

“아, 아아... 다시 하죠.”

“요? 요? 아니, 이 새끼가 완전히 쳐 돌았나... 너 미쳤냐? 응? 어디서 선배한테 그 따위 태도를 보이고 지랄이야!?”

성배는 완전히 정신이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성배에게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전부 꿈이라는 느낌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며칠 전 밤에 자신의 전 애인인 자스민, 그리고 사랑하는 딸 엘리자베스, 그리고 자신이 행복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을 가슴에 안고 쓰러졌는데, 그 다음 날에는 어릴 적 살았던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눈을 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새끼... 일단 빨래하고 보자. 오늘 훈련 끝나고 남아라. 정신 교육 좀 해야겠다. 이 개념 없는 새끼야.”

“아... 예...”

시기는 중학교 마지막 대회가 끝나고 진학이 결정된 고등학교 축구부 훈련에 합류했던 16살의 겨울이었다.

청주의 한 사립학교 재단인 영원 재단의 영원중-영원고를 나온 성배는 이 시기 즈음해서 예비 입학자 자격으로 미리 영원고 축구부 훈련에 합류해 있었다.

이 시기가 얼마 안 되는 성배의 학창시절 중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밑에 아무도 없는 완전 쌩 막내 시절이었고, 운동부 내에서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 하에 별의 별 가혹행위들이 벌어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던 성배였다.

욕설은 기본이고 체벌이나 구타까지 만연하던 이 시기에 어린 시절의 성배는 매일 눈물을 흘렸었다.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의 성배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미 서른여섯까지 인생을 살았고, 그 과정에서 인생의 쓴맛이라는 쓴맛은 모두 경험했던 성배가 고작 육체적인 고통에 힘들어할 리가 없었다.

당하는 그 순간에는 힘들었지만, 그냥 그 순간만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 뭐야? 이거... 주부습진 아닌가?”

선배들의 트집에 빨았던 빨래들을 다시 빨기 시작한 성배는 자신의 손을 보고 흠칫 놀랐다.

다시 돌아온 지 불과 며칠 만에 손에 주부습진이 걸린 것이었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수십 명들이 매일매일 몇 시간씩 훈련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땀에 젖은 빨래의 양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그로 인한 빨래의 양 역시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주부습진이 걸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긴... 이 때 쯤 주부습진을 달고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직접 살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너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20년이나 뒤로 돌아오고 나서 금방 적응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사실, 지금 이 생활이 현실인지, 아니면 자신이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빨래를 마친 성배는 다시 그 유니폼을 들고 행거에 옷을 널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도 안 되어서 선배들에게 찍혀버린 성배였기 때문에 혼자서 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빨래를 너는 것은 동기들이 함께 도와주어서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동기들이 자신을 불쌍하게 쳐다보았지만, 정작 성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동기라는 이름이고, 다들 기억이 나는 얼굴이었지만, 그냥 귀여웠다.

“아, 진짜... 선배들 너무하네. 성배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게. 아무리 선배들이라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우리는 나중에 선배되면 절대 그러지 말자.”

빨래를 널고 있는 성배를 도우면서 함께 선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동기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선배들의 앞에서는 절대로 이런 말들을 하지 못했다.

운동부의 쓸데없는 똥군기가 한창인 시절이었기 때문에 선배들도, 후배들도, 심지어 감독마저도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반항이 나올 리 없었다.

“됐다. 빨래나 널어. 어차피 시킨 건 다 해야 될 거 아냐? 개길 생각 없으면 시킨 거나 열심히 해.”

“에이, 새끼... 하여튼 재미없다니까. 재미없는 새끼.”

“지 편을 들어줘도 난리야. 알았다, 빨래나 널지, 뭐.”

뒷담화라는 것은 잠깐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뭔가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선배들에게 까이는 것이 성배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처럼 동기들의 위로나 뒷담화도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지금의 성배는 정말 그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좋아 부동심이지, 그냥 현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다고 해야 했다.

빨래를 다 널고 나서야 성배와 동기들도 유니폼과 장비, 그리고 축구화까지 갖추고 운동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다행히 선배들이 운동장으로 나오기 전, 집합 시간 10분 전에 미리 운동장에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전에 말했던 대로, 오늘은 연습 시합을 한 게임 한다. 2학년이 한 팀이고, 1학년이랑 예비 1학년이 한 팀이다.”

영원고등학교는 축구로 그렇게 유명한 학교가 아니었다.

청주에서는 그나마 조금 알려진 학교였지만, 전국으로 따지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

청주에서 두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전국으로 따지면 한 40번째에서 50번째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 중간 정도의 학교였다.

당연히 부원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제 졸업을 코앞에 둔 3학년들은 K리그 진출자는 없었지만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고, 2학년 10여 명, 1학년 10여 명, 그리고 입학 대기자 10여 명이 전부였다.

“야, 주성배. 너 왼발잡이지? 그러면 네가 왼쪽 풀백으로 들어가라.”

“예.”

그러다보니, 각 학년으로 구성했을 때 열한 명의 한 팀을 구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학년에 같은 포지션 경쟁자들이 두 명에서 많게는 네 명까지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제 곧 2학년으로 진학하는 1학년들로는 한 팀을 만들 수 없었다.

예비 입학자들 가운데 몇 명이 주전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고, 1학년과 예비를 모두 찾아봐도 왼쪽 풀백을 맡아줄 선수가 없었다.

사실 왼발잡이도 흔치 않고 수비수가 인기가 없는데다가 대한민국 축구계에 포백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여전히 학원 축구계에서는 쓰리백이 대세였고, 심지어 작년에 있었던 한일 월드컵에서도 대한민국 대표팀은 쓰리백을 사용했다.

성배가 입학한 영원고는 작년부터 포백 시스템을 쓰고 있는, 포백을 사용하는 몇 안 되는 팀이었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풀백 자원을 구하는 것이 당장 급한 상황이었다.

“대충 수비 어떻게 하는지는 알지? 걸리적거리지 마라. 뭐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뚫리지만 마. 나대지 말고.”

“......”

“이 새끼가, 대답 안 하냐?”

“아... 예...”

1학년의 구심점인 센터백 선배가 성배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성배는 지금 선배가 뭐라고 하는 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연습시합이지만,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그라운드에 서는 것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을 합쳐도 그라운드에 서본 지 한 달이 넘었다.

‘다시는 이 곳에 서지 못할 줄 알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성배는 그라운드에, 축구에 거의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평생이라고 해도 30년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서른여섯에서 이상하게 끝난 성배의 인생에서 30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은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뒤로 하고 그라운드에서 쫓겨나면서 억지로 포기하려 했던 축구.

무슨 일인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에휴... 야!! 저 새끼 불안하니까 왼쪽 커버 잘 해라. 3학년 선배들 다 나갔고, 우리도 이제 2학년이다. 지금부터 눈에 못 띄면, 네들 프로는커녕 대학도 못 가, 새끼들아.”

1학년부터 주전급 센터백으로 뛰었던 선수는 동기들을 채찍질하면서 2학년 선배들을 잡아내겠다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성배와 함께 경기에 나선 동기는 한 명.

그 친구도 비인기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성배를 빼고는 모두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왼쪽 측면 수비에 대한 임무를 받고 혼자서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녀석이었다.

‘음... 이게 꿈이라면 몸이 내 마음대로 따라주겠지만... 현실이라고 해도 고등학생들, 그것도 뛰어난 것도 아닌 고등학생들 정도는 가볍게 막겠지.’

꿈이 아니라면, 어제까지 공격수로 뛰었던 자신이기 때문에 분명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왼쪽 풀백으로 움직이는 방법은 잘 알고 있고, 그대로만 하면 문제없이 왼쪽 풀백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머리와 몸이 따로 놀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2부 리그이지만 프로에서 16년을 구르면서 지금의 몸에서 어느 부분이 발전하고 어느 부분이 떨어졌는지, 그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제발... 제발, 꿈이지 마라. 이게 현실이어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더 나은 커리어를 만들 수 있게 해 줘...’

그라운드에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조금씩 성배에게 현실감이 돌아오고 있었다.

현실이든 꿈이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방금 전이었는데, 지금은 제발 지금 이것이 현실이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일 경우, 자신이 기억하는 서른여섯 주성배의 마지막 순간에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후회했던 일들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현실감을 되찾은 성배였기 때문에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기억하는 서른여섯의 몸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을 것이었다.

그것이 무서워서 어떻게든 이 상황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라운드를 밟은 순간, 그 모든 결심은 깨지고 말았다.

< 낭만필드 - 010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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