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하지만 시비 거는 정민현은 그 모습에서 오히려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자존심이 정말 크게 상했다. 불과 몇 달 전에 과내에서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웠던 조민호 행동과는 너무 달랐다.
“이 새끼가.”
조민호도 정민혁 목소리가 올라가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173에 도달한 키 덕분에 이전과는 사뭇 그 기세가 달랐다.
“어.”
정민혁조차 그 기세에 움찔 놀라서 뒤로 세 걸음 물러났고, 옆에서 늘 몰려다니는 두 사람 역시 지난 학기 조민호 모습과는 전혀 분위기에 화들짝 놀랐다.
조민호는 하룻강아지도 되지 않은 정민현 일행을 보면서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용건이 뭐야?”
정민현 패거리는 조민호 눈치를 봤지만 마침 다음 강의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어, 그게......,나중에 두고 보자!”
조민호는 어이가 없었지만, 하룻강아지를 상대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최영준 차장 통해서 소문이 서서히 퍼져서 욕심내는 인간도 있을 것 같은데, 반응이 좀 많이 늦군.’
***
조민호 입장과 최석준 회장 처지는 사실 많은 차이가 있었다. 조민호는 단순히 호객 수단으로 최석준 회장을 이용했지만, 최석준 회장은 조민호에 대한 정보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직까지다 밝혀지지 않은 조민호의 신비한 지압 치료 능력이라면 그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최석준 회장도 은인인 조민호 정보를 처음에는 이용하는 것을 망설이기는 했지만 자기 발등에 당장 떨어진 불을 보자 도저히 그 유혹을 참지 못했다.
뒤늦게 최영준은 이 사실을 알고 최석준 회장 서재를 찾았는데, 진심으로 조민호를 걱정했다.
“아버지 정말 괜찮겠습니까?”
최석준 회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그 친구에게 다소 무리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환자 치료야. 치료사가 아픈 병자를 치료하는 게 뭐가 이상해?”
“환자 아들이 전국정원 미림팀장 아닙니까. 설마 그 녹취 테이프 때문입니까?”
“......”
최석준 회장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최영준 차장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버지 모습이 멀게만 느꼈는데, 이미 사내 전략팀을 통해서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찌라시를 통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결국 오성 그룹 때문입니까?”
최석준 회장은 나직이 한 숨을 내쉬면서 20년 넘게 끊은 담배를 꺼내서 결국 피고 말았다. 그조차도 어떻게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나야 설사 그 파일에 엮인다고 해도 뭐 특별한 것이 있겠냐. 하지만 오성 그룹은 좀 달라. 특히 과거 7년 전 대선 관련한 이야기는 절대로 외부로 노출할 수 없다.”
“결국 오성 그룹에서 압력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넌 누구보다 우리 회사 사정 잘 알지 않느냐. 경영진 중에 오성 그룹 라인을 말하는 거다.”
“조민호 그 친구가 과연 사실을 알면 순수하게 수락하겠습니까? 아니 다 좋습니다. 일단 조민호에게 진실을 말씀하실 겁니까?”
“그게 말이다. 솔직히 복잡한 정치 내막까지 그 친구가 알 필요가 있을까?”
“아버지, 조민호 그 친구는 제 은인입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아니 차후라도 조민호 그 친구 도움을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하실 거고, 그때 가서 그 친구 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합니까?”
“그만해라.”
“하지만 전 조민호 그 친구에게 진실을 우선 털어놓을 겁니다. 그렇게 아십시오.”
최석준 회장은 벌떡 일어나서 서재를 나가는 최영준을 차마 잡지 못했는데, 솔직히 심적으로는 조민호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기에 망설였다.
그는 슬쩍 책상 위에 놓인 조민호 프로필을 살폈는데, 조민호의 대홍실업 직원들에 단호한 조치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조민호는 단순히 치료만이 아니라 그 능력을 이용해서 무술에도 놀라운 능력이 보였습니다. 실제로 대홍실업 직원 모습은 누군가에 지독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 보입니다.
‘하긴 조민호 그 친구 능력이 범상치 않지. 차라리 지금은 영준이 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어.’
***
조민호도 대홍실업 직원을 단호하게 처리해서 은근슬쩍 정보를 흘린 것은 날파리가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고, 뒤통수치는 이들에게 사전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도 한편으로 최영준 차장 말을 믿으면서도 만약을 대비했는데, 다만 배신과 같은 일은 시간이 많이 흘러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후라고 생각했다.
“.......정말 미안하네.”
“참 대단하십니다. 아니 어떻게 한 달을 못 참습니까?”
“할 말이 없네.”
조민호가 걱정하는 것은 환자 치료나 괴상한 테이프 따위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괜히 국가기관에 자기 정보가 흘러가는 것을 염려했다.
“설마 CIA에 알린 것은 아니겠죠?”
“그건 아니네.”
“그 말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게......후유,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어차피 자네 능력은 지금 이 방식대로라면 권력과, 재력 가진 사람 귀에 들어갈 거네.”
“저도 압니다!”
“후유.”
“그 최영민씨도 제 신분을 압니까?”
“아니 아직은 모르네.”
“전 국정원 직원이라면 지금까지 힌트만으로 제 신분을 충분히 추적하고도 넘쳐흐르겠습니다.”
최영준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다시 사과하지.”
조민호도 이미 예상한 일이라서 겉과는 달리 내심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어.’
“좋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최소 그분만이 저에 대한 정보를 알 테니, 일단 그분을 우선 만나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알겠네.”
***
전 국정원 미림 팀장은 한때는 국정원 내에서 그 위세가 대단했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퇴직한 이 시점에서는 몇몇 인맥을 제외하고는 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최영민은 혹시라도 정치권력에 휘둘려서 토사구팽당한 것을 대비해서 나름 중요한 도청 테이프를 따로 보관했지만 그걸 적극 활용하지 않았다.
문제는 찌라시가 떠돌았다.
그조차 그 배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앞으로 검찰 압수수색과 같은 일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경험상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나름 녹음 당사자 중에 가장 마음 편한 최석준 회장에게 넌지시 테이프 정보를 흘려서 대비했다.
하지만 최석준 회장이 보인 행보는 전혀 생뚱맞은 쪽이었다.
바로 최근 각혈이 심해진 그의 어머니 김미숙의 병세에 대한 것을 언급했다.
-당신 어머님의 각혈을 동반한 만성 기관지염을 치료 방법이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상상도 못한 최석준 회장 메시지에 치매가 왔나라고 생각했지만 그 증거가 놀랍게도 최석준 회장의 맏며느리 정연희 예후였다.
‘믿을 수가 없군.’
최영민은 비록 국정원에서 퇴직했지만 그렇다고 인맥이 전혀 없지 않아서 그들을 동원해서라도 이 X파일 같은 황당한 진실을 파해 치려고 했다.
최영준이 조민호와 같이 최영민 집을 찾아온 것이 딱 이 시기였다.
조민호는 최영민을 만나기 무섭게 자신과 관련된 부분을 구체적으로 질문했고, 최영민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해주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습니다.”
“네?”
최영민은 이미 최석준 회장 통해서 이야기된 터라 최영준이 협상 대리인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조민호가 끼어들자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당황했다.
하지만 조민호는 이미 시즌2 단계를 사전에 염두에 뒀다.
“제가 정연희 환자를 치료한 사람이고, 그 증인은 여기 그분의 남편되는 최영준 차장님입니다. 지금부터 질문받겠습니다.”
“?”
최영민은 영문을 몰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그 주제가 자신의 어머니 치료에 관한 것이라서 많은 의혹을 접었다.
“저, 정말 단순 마사지만으로 만성 기관지염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고대 한의학의 힘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질문은 빙빙 돌아서 별다른 결말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최영준 차장이 직접 자기 처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기관지염과 전신마비는 전혀 다른 질환 아닙니까? 그런데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고대 한의학의 놀라운 공능입니다.”
“하지만.......”
조민호는 의심 구만리를 남발하는 최영민 행동에 결국 냉랭한 목소리로 일축했다.
“솔직히 최영민 씨가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결과만 가지고 협상하겠습니다. 만약 환자 치료가 되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좋습니다.”
그는 평범치 않은 조민호 모습도 있지만 이미 옆에 그 증거인 최영준 차장이 있는 터라 더 구질구질하게 늘어지지 않았다.
조민호는 미국으로 튄 박상철 과장 일을 떠올리면서 두 손가락을 내밀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딱 두 가지 하나는 치료비 현금 1억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 관련해서 앞으로 저를 도와주세요.”
최영민은 치료비 현금 1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부분은 최석준 회장 통해서 이미 들은 메시지를 떠올리면서 넘어갔고, 도와달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일테면 지금 최영민씨가 제 뒷조사를 따로 하려고 했지 않습니까? 만약 국가기관 같은 곳에서 그런 짓을 하면 알아서 사전에 막아달라는 겁니다. 일테면 정보교란 행위 말입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능력이 안 됩니까? 설마 국정원 미림 팀장이라는 관록까지 있는 분이 고작 그걸 못한다고 하실 겁니까? 정 안되면 그 인맥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도 생각보다는 깐깐한 조민호 반응에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으음.”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말만 하고 뒤통수 칠 때 단단히 각오하세요. 뭐 본인이나 가족이 영원히 불치병이 걸리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최영민도 갑작스러운 조민호 협박에 깜짝 놀랐지만, 옆에 동행한 최영준 역시 눈을 크게 치켜떴다.
조민호는 급격한 두 사람 행동에 피식 웃으면서 슬그머니 당근을 내놓았다.
“하지만 앞으로 저랑 상부상조를 잘한다면 그만한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설마 그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는 없겠죠?”
최영준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네.”
“영민씨는 어때요?”
“단 제 어머니 질병이 완치된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좋네요. 자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환자를 보러 갈까요?”
조민호는 물론 사전에 현금 1억부터 확인했는데, 그 과정은 간단했다.
최영민 차장이 1억을 최영민에게 보냈고, 최영민은 아는 지인 통해서 박주명 사장에게 다시 그 현금 1억을 보냈다.
조민호는 번거롭지만 이게 증거를 안 남기는 방법이라서 묵인했고, 최종적으로 현금 1억 메시지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복잡한 사연을 알 수 없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절대선이 더 잔혹한 경우가 많지. 그냥 단순하게 나를 공격한 놈은 절대악이고, 날 도와준 이는 절대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