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7화: 빅토리아(1)
지금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들 모두 배경이 만만찮다.
이른바 대한민국에서 말하는 명문가의 자제들이다.
그중 유일하게 설미주는 현재 부모님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
중학교1학년 때 입양되었다고 했다.
설미주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만큼 당당하다.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술을 권했다.
“아니 뭐야? 소주 아냐. 양주 없어?”
권혜림이 잔을 들고서 말했다.
술을 따르려던 설미주가 받아쳤다.
“무식한 소리 작작해. 참치에 소주보다 더 좋은 건 없어.”
“미주 너 말버릇은 여전하구나.”
“아니 그럼 타고난 이빨이 어디 가.”
권혜림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빈 잔에도 소주를 넘치도록 채운다.
“다들 잔 채웠죠. 자 백서그룹의 금강산 개발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갑작스럽게 백서그룹 금강산개발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사에 권혜림의 눈이 커졌다.
“회장님 뭐하세요? 건배 안 할거야.”
“응...우웅!”
째앵!
힘차게 잔들이 부딪쳤고 모두가 단번에 잔을 비운다.
“정말 고마워.”
“존경하는 회장님, 건배의 완성은 잔을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그 술을 비우는 것입니다. 잘 아시죠?”
설미주의 으름장에 권혜림은 쓰게 소주잔을 비웠다.
그때 요리사 복장을 한 남자 직원이 음식을 담은 카트를 밀고 들어섰다.
만들어서 가져오지 않고 이곳에서 직접 스시와 회를 제공한다.
요리사는 탁자와 카트를 붙이고서 스시를 만들고 회를 뜨기 시작했다.
직접 만들어 현장에서 건네주는 요리사의 솜씨와 매너에 여자들은 즐거워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때 권혜림이 전화를 받았다.
“잠깐만!”
권혜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걸어갔다.
소주를 마신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는데 표정이 굳어진다.
“지금 어디죠. 알겠어요. 당장 가죠.”
전화를 끊은 권혜림은 탁자로 다가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급히 보고 받아야 할 내용이 있어서.”
“나도 급히 만나야 할 사람 놔두고 왔다고.”
“누군 백수인줄 알아?”
여기저기서 짜증을 내는 소리에 미안하다며 다시 한 번 사과를 한 뒤 권헤림은 백을 들고 곧장 사라졌다.
“저 언니는 항상 바빠?”
누군가 투덜댔고 설미주가 말을 받았다.
“요즘 금강산 개발 건으로 바쁘기도 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회사일과는 무관해 보이는데.”
“무슨 뜻이야?”
설미주 맞은편에 앉은 서른 후반에서 마흔 초반 정도로 보이는 가슴골이 드러날 만큼 깊이 파인 흰색의 니트를 입은 여자가 물었다.
시아버지가 여당 국회의원이고 국내에서 손꼽히는 왁슨이란 게임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남편을 둔 손채림인데 영화배우이기도 했다.
“보면 몰라?”
설미주는 젓가락으로 참치 살 한 개를 밀어 넣었다.
“급한 일 생긴 눈치잖아.”
“급한 일, 그게 뭔데?”
“그건 나도 모르죠. 사모님.”
아나운서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사람 보는 안목이 저절로 생겼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관계로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영어권 특파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안목이 더욱 예리해진 것이다.
“너도 가려고?”
일어서는 설미주를 향해 손채림이 묻는다.
“니코틴 부족으로 가슴이 뛰잖아. 좀 진정시켜야지.”
“그냥 여기서 피워. 뭘 어때? 우리만 괜찮으면 됐지.”
그러면서 요리사를 바라보았다.
요리사는 빙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안 된다는 뜻이다.
“됐어 됐어. 바람이나 좀 쐬지 뭐.”
설미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직도 이놈의 나라에서는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걸 동물원 구경하는 듯 바라본다.
더욱이 알려진 얼굴이니 더욱 볼 것이다.
결국 설미주는 담배를 드러내 놓고 피울 수 없는 사춘기 학생들처럼 음습한 곳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정원의 공간이 넓어 숨어 피울 만한 곳은 적지 않았다.
건물 뒤로 돌아가자 으스름한 가로등 아래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다.
요즘 추워진 날씨로 연못은 살짝 얼어 있었는데 인기척이 없어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후우우!
담배 연기를 길게 내 뿜는다.
마치 목에 걸린 뭔가라도 뱉어내듯 뿜어내는 한숨이었다.
고민은 없다.
걱정거리도 없다.
그런데 근래 들어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큰 돌을 올려 놓은 것처럼 무겁다.
그렇다고 소화가 안되는 것도 아니고 병원을 찾아가 사진이란 사진은 죄다 찍고 검사했지만 이상 없다고 했다.
‘나도 늙어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는다.
홱!
설미주는 번개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맙소사!”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연못으로 빠질 뻔했다.
처음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지금 왔는지는 모른다.
자신과 불과 7,8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는 커다란 가이스카 향나무 아래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담배를 모두 피울 때까지 전혀 몰랐을지 모른다.
시끄러운 곳도 아닌 외지고 한적한 곳이다.
10미터가 채 안되는 짧은 거리에, 그것도 나무 사이로 충분히 사람이 보이는데도 자신이 전혀 몰랐다는 것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기척이 없을 수 있을까.
차라리 유령이다.
“그렇게 해요.”
통화를 끝낸 사내는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더니 불을 끄고 사라졌다.
설미주는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사내를 한참동안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스윽!
얼마나 놀랬던지 이마에 땀이 맺혔다.
어군을 나간 권혜림은 조그만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놓고 구장철과 마주 앉아 있었다.
구장철의 설명을 들은 권혜림의 표정이 굳어있다.
“틀림없는 얘긴가요?”
“괜한 얘길 하겠습니까?”
권혜림은 굳은 표정으로 실내를 스윽 훑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지금 갑자기 사직서를 내 버리면 오히려 더 의심을 받을 것 아니에요. 아무리 권총수라고 해도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테니 좀 더 지켜보죠.”
“불안한 모양입니다.”
“이런 일 하면서 즐거울 줄 알았을까요? 우리가 괜히 큰 돈을 쑤셔 박았냐구요?”
“아무래도 여자다보니.”
“왜 여자들의 사회진출이 떨어지는 줄 아세요? 스스로 약하다고 자신을 평가하는거에요. 제까짓게 뭔데, 한 번 해볼테면 해보자며 달려들어야 하는데 피하려는 습성을 보여요. 어느
신문기사에도 나왔더군요. 회사에서는 연약한 여자 코스프레를 하고 밖에 나와서는 차별에 목청을 높인다고.”
구장철은 씁쓸한 표정을 했다.
“어차피 이제 우린 한 배를 탔어요. 공동운명체라는 걸 강조하세요. 뭐가 무섭다고 사직서를 내니 마니 해 못난 년.”
권혜림이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권혜림을 바라보는 구장철의 눈이 좁혀진다.
확실히 예전보다 거칠어졌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사나워진 것이다.
세상도 동물들이 사는 정글과 다름없으므로 사나워져서 잃을 건 없다.
중요한 건 이성적으로 사나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만 앞세우며 설치는 사나움은 객기이고 만용이다.
“모처럼 마음 편한 사람들과 한 잔 하려는데.”
권혜림은 아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이라도 돌아 가시죠.”
“술자리 나왔다가 다시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쪽팔리게.”
권혜림이 인상을 쓰자 구장철은 빙긋 웃는다.
권총수가 탄 흰색 랜드로버가 어군 주차장을 빠져 나온다.
운전석에는 대리기사가 아닌 어군 직원이 앉았고 권총수는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으며 오민철은 뒷좌석에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마낙춘은 조수석 창가로 다가와 미소를 물며 인사했다.
“자꾸 이러시면 이제 안 옵니다.”
올해 나이 쉰, 환갑이 된 사람이 올 때마다 예의를 차리는 것이 부담스럽다.
물론 마낙춘의 인생에서 권총수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권총수가 자신을 죽였다면 지금은 이런 호사는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돈은 충분히 벌었다.
장안의 명소가 되면서 정,재계는 물론 문화 스포츠계까지 두루두루 사람을 사귀고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면 초대장까지 받을 때도 있다.
그 모든 화려한 삶을 선물한 이가 권총수인데 어찌 환갑이 되었다고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김대리, 부탁해요.”
“걱정마세요. 사장님.”
운전기사 김천술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출발 시켰다.
차가 골목을 빠져 나와 4차선 도로에 진입했다.
뒷좌석에 앉은 오민철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왼쪽 유리를 조금 내렸다.
딸칵!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열린 틈 사이로 담배연기를 뿜어내던 오민철의 눈이 반짝했다.
우연히 창문 유리를 통해 반대편 차선을 보는데 길가에 벤츠 한 대가 멈추더니 두 사내가 내려 걸어가는 여자를 강제로 차에 태웠다.
여자는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차에 태워졌고 벤츠는 빠르게 사라졌다.
“김대리, 유턴에서 저 벤츠 쫓아가봐요.”
“저것 말입니까?”
오민철이 빠르게 달려 사라지는 벤츠를 가리켰고 곧장 1차선으로 진입하더니 달려오는 차량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차를 돌렸다.
“뭔데?”
조수석 권총수가 물었다.
“글쎄, 여자를 누가 납치해 가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알아?”
“끌고 갔어.”
오민철이 눈을 빛낸다.
부우웅!
유턴을 한 렌드로버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벤츠를 쫓았다.
하지만 벤츠의 속도는 너무 빨랐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더욱이 도로가 내리막길이 되면서 푹 꺼지듯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 개자식들 봐라.”
오민철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속도 줄이세요. 그리고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요.”
그때 권총수의 말을 따라 김천술 대리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화려했다.
수 많은 유흥업소들 간판이 도배하듯 형형색색의 불을 켜고 있었으며 젊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 속에 움직이는 벤츠 한 대가 보였다.
다행히 사람이 많아 속도를 내지 못한 탓에 금세 시야에 잡힌 것이다.
벤츠는 백여미터 정도 앞서가고 있었는데 천천히 골목 오른쪽으로 멈춰섰다.
문이 열리고 두 사내가 여자를 끌어내더니 건물 지하 계단으로 사라졌다.
벤츠 운전석 문이 열리고 검정색 자켓을 걸친 사내가 내려 역시 지하계단을 타고 사라진다.
쾅!
지하 계단 입구의 철문이 세차게 닫힌다.
랜드로버는 벤츠를 지나가 멈췄다.
“괜한 일에 끼어드는 것 아냐. 형?”
오민철의 넓은 오지랖 때문에 난처한 일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길가에서 여자 하이힐에 두들겨 맞는 남자를 돕다 오히려 자신이 맞는 일도 있었다.
오민철 딴에는 돕는다고 끼어 들었는데 두들겨 맞고 있던 남자가 뒤통수를 갈겨 버린 것이다.
“꺼져 자식아, 나 우리 마누라에게 맞을 짓 했거든.”
오민철은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야 했다.
오민철의 정의감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길을 가는 할머니에게 폭언을 퍼붓는 흑인청년을 주먹으로 때릴 듯 눈을 부라리며 꺼지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알고보니 할머니는 청년의 손가방을 훔쳐 도망치다 잡힌 소매치기였다.
할머니는 변장한 삼십 대 여자였다.
늙은 사람으로 변장을 하다보니 의심을 사지 않고 사람들이 경계하지 않는다는 걸 노린 수법에 오민철이 당한 것이다.
“아뇨. 김대리는 앉아 있어요.”
권총수는 내리려는 김천술에게 그냥 차에 있으라고 했다.